# 251
8장, 전생을 뛰어넘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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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이례적인 일입니다. 한중일 3국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비슷한 시기에 국제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한국 정부가 예멘 내전으로 인한 민간인 지구 폭격과 학살을 중단해야 한다는 공식 성명을 발표하고 이틀 뒤, 일본 정부도 외무성 공식 성명을 냈습니다. 이에 중국 외교부 대변인도 국제 사회가 공조하여 예멘 내전의 평화로운 해결에 힘을 보태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동아시아 3국이 같은 시기, 같은 내용의 국제 성명을 발표한 경우는 흔치 않아서 국제 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UN에서도 해당 안건이 공식적으로 논의 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자세한 내용, 뉴욕에 나가있는 김지수 특파원이 보도하겠습니다.”
9시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TV 스피커를 타고 넓은 거실에 울려 퍼졌다.
한지호의 청담동 빌라 거실은 웬만한 아파트를 통째로 집어넣은 것보다 더 넓었다.
100평에 이르는 초호화 고급 빌라이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에 걸맞게 TV 역시 영화관 스크린처럼 컸고, B&O 스피커를 통해 울리는 사운드도 짱짱했다.
한지호는 가죽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샴페인을 마시고 있었다.
러시아 황제의 샴페인이라는 루이 로드레 크리스탈이다.
백화점에선 한 병에 100만 원, 강남의 레스토랑에서 마시려면 150만 원 이상은 줘야 하는 최고급 샴페인을 자기 집 거실에서 혼자 마시기 쉽지 않다.
돈이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다.
모름지기 혼술의 정석은 소주 아니면 맥주다.
그럼에도 한지호는 소소한 사치를 즐기며 홀로 축배를 들고 있었다.
물밑에서 열심히 뛰어다닌 성과가 하나 둘 수면 위로 나타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한중일 3국에 걸친 그의 인맥은 외교부의 에이스도 부럽지 않았다.
단순한 인맥이 아니다.
한지호의 네트워크는 그야말로 3국을 움직이는 핵심에 닿아 있다.
주중 일본대사 요시모 유타, 공산당 상무위원 추위안차오.
두 사람은 지금 당장의 위치도 위치지만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인물들이다.
현재 권력인 동시에 미래 권력이기에 정부를 움직일 힘이 충분하다.
한국은 말 할 것도 없다.
전직 장관과 막역한 사이고, 현직 대통령이 한지호의 부탁을 들어주라고 지시를 내렸다.
한지호는 대통령과 독대한 후 훈장을 수여 받았었다.
용은 용을 알아보는 법, 정치권에서 정점에 오른 대통령은 한지호의 출중함을 인정한 바 있다.
이렇듯 한중일 3국의 동시 성명은 철저하게 한지호의 개인기로 이뤄낸 쾌거였다.
성명이 발표됐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 된 것은 아니다.
UN에서 정식 안건으로 다뤄진 다음 결의안을 채택할지 지켜봐야 한다.
사우디아라비아 왕궁도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공조는 중동의 플레이어들에게 분명한 압박이 된다.
시아파, 수니파를 막론하고 예멘 내전을 지원하는 세력은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3국의 국제 성명이 발표된 이후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양 측 모두 비상 대책 회의를 열었을 게 확실하다.
UN이 직접적인 결의안까지 채택하면 석유 수출에 제한이 생길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사우디와 이란은 동시에 크나큰 타격을 입는다.
한지호는 예멘에서 죄 없이 피 흘리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그야말로 엄청난 일을 행하고 있었다.
우연히 사우디 행 제의를 받은 것이 시작이었다.
반다르 왕자를 치료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지만, 그 다음의 원대한 행보는 계획적이었다.
그 첫 걸음을 성공적으로 뗐으니 값비싼 샴페인을 마시며 축배를 들어도 될 것 같았다.
“사우디에서 먼저 선택을 하면 이란도 호응 할 수밖에 없어. 그렇게 되면 종전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휴전에 이르겠지. 휴전만으로도 당장 수천 명이 살 수 있고, 민간인 지구가 폭격 위험에서 자유로워져.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일이야, 이건.”
샴페인으로 목을 축인 한지호가 혼잣말을 읊조렸다.
반다르 왕자의 치료비로 거액을 받았지만, 그 외의 일은 돈이 안 된다.
예멘 내전이 진정되어도 한지호에게 주어지는 것은 없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특별한 운명을 부여 받은 사람은 그만큼 책임을 져야 한다.
한지호는 스스로의 운명을 자각했다.
왜 전생을 깨닫는 기연의 주인공이 됐는지, 이제는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침 하나로 세계를 움직이는 사람이 되는 것.
한의학으로 천하를 좌우하는 사람이 되는 것.
그리 되면 지옥으로 변해가는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바꾸는데 힘을 보탤 수 있다.
혼자만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니라 세상을 치유하는 한의사가 되는 것이다.
사람을 넘어 세상을 치료하는 의원.
한지호는 그것이 자신이 묵묵히 걸어가야 할 운명임을 깨달았다.
그 길을 걷다보면 부와 명예는 자연스레 쌓인다.
이미 한지호의 발 아래에 쌓인 부와 명예도 웬만한 사람은 꿈꾸지 못할 수준이다.
물론 혼자만 잘 사는 길을 걷는 게 훨씬 쉽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랬다면 원화 아카데미를 세워서 천문학적 액수의 돈을 쏟아 부으며 연구 개발에 투자 할 필요도 없다.
지금처럼 중동의 평화를 위해 모든 인맥을 총 동원하며 애태울 필요도 없다.
그저 원화 한의원 운영과 VIP 환자들의 진료에만 집중해도 평생 다 못 쓸 돈을 벌고, 한의사로서 최고의 명성을 누릴 수 있다.
그렇지만 눈을 감는 그 순간, 삶을 돌아볼 때 떳떳하지 못 할 것이다.
운명의 부름을 외면하고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인생을 살다가 후회가 밀려오면 정신적으로 감당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어려운 길을 선택한 한지호는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았다.
태어난 이유를 깨달은 사람은 확신으로 가득 차 주위를 환하게 밝힌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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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하네요. 이런 느낌, 오랜만인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원탁 테이블에 앉은 한지호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미소를 짓고 있지만 눈동자는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가 말한 것처럼 정말 초조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의 왼쪽과 오른쪽으로 미한약품 신영준 회장과 Y대 암센터의 최규열 센터장이 보였다.
그들 역시 입술이 말라붙었다.
한지호 못지않게 긴장을 했다는 뜻이다.
원화 아카데미의 최대 주주인 세 사람이 동시에 모이는 날은 흔치 않다.
더구나 그들 셋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한지호는 신약 개발이 지속됨에 따라 추가적으로 투자를 받았다.
오늘은 후속 투자자 중에서 1000억 원 이상을 지원한 사람들 두 명이 초대됐다.
한 명은 이제 막 40대가 된 재벌 2세다.
바이오 분야에 관심이 지대한 신성그룹의 차남이다.
또 한 사람은 외국계 사모펀드를 이끄는 시니어 매니저다.
그는 자신의 역량으로 펀드를 설득해 통 큰 투자를 성사시켰다.
이렇듯 중요한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30분 정도만 지나면 신약의 동물 실험 결과가 발표 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2차 실험 이후 예상보다 일찍 동물 실험 데이터가 나오게 됐다.
당연히 우연에 의한 것은 아니다.
한지호는 실험 기간 단축을 위해 메디데이터(Medidata)라는 업체에 천문학적 액수의 로열티를 지불했다.
메디데이터는 임상 실험 속도를 높여주는 바이오 IT 컨설팅 업체다.
그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컨설팅 실력과 프로그래밍 노하우로 실험 기간을 단축하도록 도와준다.
원화 아카데미뿐 아니라 화이자, 미한약품 등 국제적인 제약 회사가 메디데이터의 파트너다.
막상 동물 실험 결과가 예상보다 훨씬 일찍 나온다고 하니 메디데이터에게 지불한 돈이 아깝지 않았다.
사업의 손익만 생각한다면 실험 컨설팅 업체에 수백억 원을 로열티로 지불하기 어렵다.
하지만 한지호는 원화 아카데미의 신약 개발을 하늘이 내린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 쏟아 부은 만큼의 결과가 속속 나타나는 것이다.
인생은 생각보다 공평하다.
시간이든 돈이든 투자한 만큼 성과가 나온다.
가끔 기대 이상, 혹은 기대 이하의 결과가 나올 때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예외일 뿐이다.
“이거 참, 도박을 즐기지 않는데 마치 카지노 테이블에 앉은 기분입니다.”
그때 신성그룹의 2세가 입을 열었다.
긴장을 풀기 위해 농담을 던진 셈이다.
한지호는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번 동물 실험이 실패하면… 대략 200억 원 정도가 허공에 사라지는 것이죠. 그러나 도박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뭔가요?”
“도박에서는 200억을 잃어도 달라지는 게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패해도 200억 원이 들어간 실험의 결과를 데이터 삼아 한 걸음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확신에 가득 찬 말이었다.
신성그룹의 2세 유현성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버클리 대학과 와튼 스쿨이라는 최고 명문대에서 공부한 다음 신성그룹의 경영 중추를 이끌고 있다.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엘리트임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한지호를 200% 인정하고 있었다.
물려받은 기업을 경영한 게 아니라 바닥에서 맨주먹으로 원화 정의 네트워크를 일으킨 것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2세와 3세들은 자수성가한 사람을 보면 두 가지 감정을 갖는다.
열등감을 느끼거나 존경하거나, 둘 중 하나다.
신성그룹의 차남 유현성은 후자였다.
그는 한지호의 확신과 열정을 보고 과감히 1000억 원 이상을 투자했다.
아무리 재벌 2세라 해도 1000억 원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돈이 아니다.
만약 원화 아카데미가 성과를 내지 못하면 신성그룹 후계 구도에서 크게 흠집이 잡힐 일이다.
그만한 리스크를 감수하고 이 테이블에 앉은 유현성은 한지호와 대화를 나누는 게 즐거운 듯 했다.
“이런 맛에 제약회사를 운영하는 것이지. 물론 수명은 한참 줄겠지만.”
잠자코 앉아있던 신영준 회장도 한 마디를 거들었다.
장성 출신에서 미한약품을 글로벌 제약업체로 키워낸 굴지의 경영인이 신영준 회장이다.
그는 의학분야 전문가가 아니라도 과감한 결단력을 통해 제약회사 경영이 가능하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냈다.
신영준 회장 역시 원화 아카데미의 신약 개발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신약 개발은 원화 아카데미가 추진하는 여러 프로젝트 중에서 백미(白眉)다.
사실 다른 프로젝트들은 이미 성공적으로 사회에 기여를 하고 있다.
한의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1차 백서는 전국 주요 한의대에 보급이 확정됐다.
한지호가 강의를 나가는 미국 존스홉킨스 의대 대체의학 과정에서도 1차 백서를 교재로 사용할 것이다.
큰돈이 되는 일은 아니지만 의학적 관점에서 볼 때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어 온 한의학이 원화 아카데미의 연구 덕분에 실증적 학문의 영역으로 진입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학문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백서를 발간하는 작업이 신약 개발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현재로서는 신약 개발이 워낙 고부가가치 산업이기에 기대를 받는 것이다.
연구도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다.
원화 아카데미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며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약 개발에 성공해야만 한다.
툭툭.
“이제 금방 올라오겠지, 한 원장?”
손가락으로 대리석 테이블을 두드린 최규열이 질문을 던졌다.
한지호는 왼쪽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스마트폰이 보편화 된 세상에서 시계는 남자의 취향을 드러내는 사치품이다.
시계 다이얼에 중앙에 새겨진 오데마 피게(Audemars Piguet)라는 글자가 한지호의 개성을 돋보이게 해줬다.
“4층에서 정리가 끝나는 대로 개발실장과 전략실장이 바로 올라올 예정입니다. 약간 딜레이가 되는 것 같지만… 금방일 겁니다.”
원화 아카데미 4층에 위치한 신약 개발실에서는 동물 실험의 데이터를 추출해서 정리하고 있었다.
어디에도 공개되지 않은 프로토 타입의 실험 결과가 오늘 처음으로 나온다.
한지호는 개발실장과 전략실장이 밝은 얼굴로 5층에 올라와서 브리핑을 하길 기대했다.
물론 어느 정도는 마음을 놓은 측면도 있었다.
유현성에게 말한 것처럼 실험 실패는 성공으로 가는 디딤돌이다.
그렇기에 결과가 안 좋아도 너무 낙담한 티를 내지 않도록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두었다.
지이이잉- 띠딩!
그때 4층에 멈춰있던 엘리베이터가 한 층 위로 올라왔다.
5층 기획 전략실의 대리석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 모두 동시에 눈을 빛냈다.
다들 말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들이 너무 뜨거워 마치 노려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4층을 책임지는 신약 개발실장이 고개를 숙이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전문적인 실험 데이터를 비전문가의 언어로 해석해서 브리핑을 할 기획 전략실장도 함께였다.
둘의 얼굴 표정에는 특이점을 찾을 수 없었다.
평소처럼 포커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지호는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 가장 궁금한 점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원화 아카데미, 나아가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대표이자 오너이기에 가감 없이 질문을 하는 게 가능했다.
“브리핑을 시작하기 앞서 최종 결과부터 듣고 싶군요. 동물 실험…… 성공했습니까?”
“성공…… 했습니다, 대표 원장님.”
개발실장은 감격스러워 목이 잠긴 듯 겨우 대답을 했다.
어떻게 표정을 숨겼는지 용할 따름이었다.
그제야 옆에 서있던 전략실장도 환한 미소를 지었다.
성공.
고작 두 글자의 말이 물결처럼 퍼져 나가 5층에 있는 사람들을 휩쓸었다.
한지호는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못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동물 실험이 성공했다.
이제 인체 실험만 통과하면 그가 구상한 신약이 거동이 불편한 전세계의 중증 질환자들에게 희망을 선사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한지호는 전생의 규호를 뛰어넘은 기분이었다.
앞으로 그가 내딛는 걸음은 전생보다 위대한 역사가 될 게 확실하다.
한지호의 현생은 신화가 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