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8
7장, 3만 명의 목숨값 (1)
쏴아아아아-!
기운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혈도를 타고 흐르는 기(氣)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수련이 깊어지면 보통 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감각이 생긴다.
고대에는 그것을 기감(氣感)이라고 불렀다.
한지호의 기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현실 세계에서는 그보다 더 기감이 좋은 사람을 찾기 힘들 것이다.
단전에 내공을 쌓은 채 꾸준히 수련을 하는 사람이 한지호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그는 매일 다른 사람들의 기운을 감지하며 의술로 풀어주는 역할을 해왔다.
당연히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를 느끼는 감각이 극도로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보인다, 보여.’
한지호는 반다르 왕자의 머리에서 기운이 빠져나가는 걸 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느끼고 있었다.
스윽-
그는 두 손을 반다르 왕자의 정수리 위로 가져갔다.
곧이어 손바닥에 열이 올라왔다.
그동안 반다르 왕자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극심한 두통을 초래한 화기(火氣)가 빠져나가는 것이다.
손바닥이 금방 데워질 정도로 반다르 왕자의 머리를 채웠던 화기는 막강했다.
백회혈의 문을 열고 화기를 빼내는데 성공했지만, 넋 놓고 있을 틈은 없었다.
한지호는 두 눈을 부릅뜨고 바로 다음 조치를 취했다.
‘화기와 함께 다른 기운들도 빠져나갈 수 있어. 어느 정도는 감수할 수밖에 없지만… 심해지면 자칫 생명이 위태로워지겠지.’
한지호의 손가락이 반다르 왕자의 머리와 목 부근의 혈도를 짚기 시작했다.
백회혈이 열린 상태에서 화기만 빠져나가고 다른 기운은 그대로 머물게끔 점혈(點穴)을 하는 것이다.
한의학에서는 인체가 기로 구성 되어 있다고 본다.
기운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빠져나가면 인체의 균형이 무너지고, 곧 영혼이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쉽게 말해 산송장이 된다는 뜻이다.
머리에서 화기를 빼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기운의 손실을 최대한 막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후속 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못하면 화기를 고치려다 반다르 왕자를 식물인간으로 만들지 모른다.
한지호는 최악의 경우를 굳이 상상하지 않고 눈앞의 치료에 집중했다.
꾸욱- 꾸욱!
손가락에 내력을 담아 혈도를 누르기 바빴다.
반다르 왕자는 마치 시체처럼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당장 탈이 난 것은 아니다.
약향과 침술의 영향을 받았고, 백회혈이 열리며 일시적으로 의식을 잃은 것뿐이다.
하지만 치료를 끝냈을 때 그가 멀쩡히 눈을 뜰지 장담할 수도 없다.
한지호로서는 그저 최선을 다해야 할 따름이었다.
‘오행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오행이야.’
그는 화타가 창안한 오금희의 깊은 뜻, 오의(奧義)를 되뇌고 있었다.
인간의 몸을 이루는 게 기(氣)라면, 기는 서로 다른 다섯 가지 모습으로 발현된다.
그 원리를 꿰뚫은 무공이자 의술이 바로 오금희인 것이다.
‘녹공으로 물의 기운을 붙잡고, 원공으로 흙의 기운을 다지고… 호공과 웅공으로 다른 기운들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아야 해.’
반다르 왕자의 혈도를 누르는 손가락이 빨리 움직이는 것보다 머리가 더 바쁘게 회전했다.
점혈을 하는 손가락에 오금희 조공은 담지 않는다.
화기가 빠져나가는 중이기에 불의 기운을 더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대신 물의 기운을 지닌 녹공과 흙의 기운을 지닌 원공으로 반다르 왕자를 안정시켰다.
물과 흙은 오행의 기본 요소이고, 인체의 중심을 잡는 기운이다.
그 다음은 금(金)의 기운을 지닌 호공과 목(木)의 기운을 지닌 웅공의 차례다.
날카롭고 묵직한 두 기운이 수문장이 되어 반다르 왕자의 머리를 지키는 것이다.
빠져나가야 할 화기를 제외한 다른 기운들이 인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끔 철저하게 수호한다.
한의학과 오행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여길 확률이 높다.
현대 의사들은 백날을 연구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이치다.
그러나 한지호는 자신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기운의 변화를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
수천 년 전부터 계승되어 내려온 동양 전통 의학의 정수, 화타에서 시작해 규호를 거쳐 자신이 발전시킨 한의학의 오묘한 힘을 믿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한지호는 단전의 기운을 정교하게 조절하며 손을 움직이는 내내 자신을 다독였다.
딴 생각을 하는 게 아니다.
한 끝 차이로 반다르 왕자의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이다.
한지호는 절벽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심정이었다.
그렇기에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을 믿어주며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이다.
스스로를 믿지 않으면 무엇 하나 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손가락으로 혈도를 누르는 위치와 강도가 조금만 어긋난다면, 혹은 오금희의 기운을 너무 강하거나 약하게 담는다면, 모든 변수가 화살이 되어 반다르 왕자의 생명을 찌를 수 있다.
이 순간, 한지호가 감당해야 하는 부담감과 스트레스는 말로 표현이 불가능하다.
게다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집중력이 요구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지호는 계속해서 할 수 있다는 주문을 외우며 의술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갔다.
지금 한지호가 내딛는 곳이 한의학의 새로운 세계다.
이제껏 누구도, 심지어 전생의 스승 화타도 백회혈을 열어 머리의 기운을 빼내본 적은 없었다.
“후우……!”
살짝 벌어진 한지호의 입술 사이로 긴 한숨이 나왔다.
몸을 격렬히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때보다 체력 소모가 심했다.
단전의 내력을 이처럼 정교하게 조절하며 사용한 적은 처음이다.
집중력을 쥐어짜내며 내력까지 컨트롤하느라 탈진 직전의 상태였다.
하지만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다.
아직 반다르 왕자의 머리에서 화기가 빠져나가고 있다.
식은땀을 흘리는 그의 이마 위에서 한지호의 손은 쉴 틈이 없었다.
‘식고 있어!’
한지호는 손바닥이 더 이상 뜨겁지 않음을 느꼈다.
정수리 위로 발산되던 화기의 양이 줄어들었다는 뜻이다.
머리를 채우고 두통을 유발했던 근본 원인이 사라졌다.
물론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뒷 수습을 완벽히 한 다음 반다르 왕자가 깨어나길 기다려야 한다.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은 한지호가 반다르 왕자의 몸에서 침을 뽑아냈다.
수욱-
화아아아악!
백회에 꽂혀있던 장침을 걷어내는 순간, 아주 짧게나마 빛이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그 빛은 쏜살같이 반다르 왕자의 머리로 퍼져나갔다.
한지호는 방금 본 신기루가 무슨 현상인지 직감할 수 있었다.
의술에 의해 인위적으로 열렸던 백회혈이 완전히 닫힌 것이다.
개문(開門)은 끝났다.
믿기 힘든 일이지만, 한지호는 성공적으로 사람의 머리를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침 하나를 뽑았을 뿐이지만 천국과 지옥을 오간 기분이 들었다.
한지호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나머지 침을 회수했다.
그렇게 반다르 왕자의 몸에 놓았던 침을 모두 뽑았다.
방 안을 집어삼킨 짙은 약향도 어느덧 잔향만 남기고 사라졌다.
한지호는 준비해둔 얇은 천으로 반다르 왕자의 몸을 덮었다.
눈을 꼭 감은 그는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때 억지로 정신을 깨우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저 체온을 유지시키며 스스로 의식을 회복하길 기다릴 수밖에 없다.
현대 의학이었다면 바이탈 체크를 시작으로 온갖 의료 장비를 연결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의학은 다르다.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를 다 했으니 인체의 자연치유력을 믿고 기다린다.
그게 한의학의 정도다.
“곧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한지호는 누워있는 반다르 왕자를 내려다보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사실 당장 침대에 뻗고 싶었지만 밖에서 기다리는 아지르에게 설명을 해줘야 한다.
끼이익-
그가 방문을 열고 나오자 아지르와 경호원들이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은 치료가 계속되는 동안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문 밖에서 기다린 것이다.
과연 단순한 부하가 아니라 반다르 왕자를 진심으로 모시는 최측근다웠다.
“쉿!”
한지호는 손가락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소리를 내지 말라고 했다.
혹시라도 바깥의 소음이 들어가 반다르 왕자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리를 조금 옮겨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한지호의 말을 들은 아지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호원들은 반다르 왕자가 누워있는 방 문 앞을 지킬 것이다.
대신 아지르만 한지호와 함께 복도 끝의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치료는 어떻게 됐습니까? 왕자님께서는?”
그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참았던 질문을 쏟아냈다.
한지호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저도 매우 지친 상태라 짧게 말하겠습니다. 치료는 무사히 끝났고, 왕자님은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치료가 성공했는지, 다른 부작용은 없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왕자님이 깨어나야 합니다. 다만 억지로 깨우면 외부의 충격에 의해 부작용이 나타날지 모릅니다. 지금으로선 스스로 눈을 뜰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깨어나신다면, 늦어도 오늘 밤에는 눈을 뜨실 겁니다.”
“만약 더 늦어진다면…….”
“이틀이나 사흘을 넘긴 경우는 정상이 아닙니다. 그렇게 된다면 치료에 문제가 생겼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겠죠.”
“오늘 밤 깨어나셔도 부작용이 있는지는 확인을 해봐야 하는 것, 맞습니까?”
“맞습니다.”
한지호는 있는 그대로 사실만 이야기했다.
괜한 기대감을 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설명을 들은 아지르의 얼굴에는 수심이 떠올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현재로선 어떤 것도 장담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닥터 한도 고생하셨는데 편히 쉬고 계십시오.”
한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이라도 잠을 자고 운기조식을 해야 체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반다르 왕자의 운명은 자신의 손을 떠났다.
이제부터는 그야말로 하늘의 선택에 달린 일이다.
아지르가 아닌 다른 수행원에게 안내를 받은 한지호는 셔츠를 벗고 곧장 침대에 누웠다.
땀을 닦거나 씻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방 안의 모든 불을 끈 한지호는 깊은 어둠 안에서 조용한 안식을 누렸다.
잠깐이지만 달콤한 휴식이 그를 찾아왔다.
+++
부스럭, 부스럭-
‘응? 뭐지?’
한지호는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몇 시간 정도 깊이 잠들었는지 모른다.
어쨌거나 꿈도 꾸지 않을 만큼 깊은 잠을 잤기에 체력이 많이 회복됐다.
텅 빈 느낌이 들었던 단전도 든든해졌다.
공력이 깊어지며 내공이 차오르는 속도도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빨라진 것 같았다.
그는 잠에서 깨자마자 낯선 인기척을 느꼈다.
침실 안에서 감지 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 밖에서 거슬리는 기운이 그의 감각을 자극하고 있었다.
‘이건… 아지르가 손을 썼군.’
이불을 걷어내고 상체를 일으킨 한지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방 문 바깥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다름 아닌 경호원들의 것이다.
반다르 왕자의 안가에는 6명의 최측근 경호원 말고도 꽤 많은 병력이 상주하고 있다.
아지르가 그들 중 일부에게 명령을 내려 한지호를 지키라고 한 것 같았다.
명목은 경호겠지만 의도는 뻔하다.
만에 하나 반다르 왕자가 깨어나지 못하거나 잘못되면 책임을 묻기 위해서일 것이다.
위험을 감수하고 사우디아라비아에 왔지만, 막상 예상하던 일이 펼쳐지니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아지르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다.
반다르 왕자를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오른팔로서 당연한 조치다.
그러나 한지호도 사람이기에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어차피 이 정도 경호원으로는 나를 막을 수도 없는데 말이지.’
그는 조용히 셔츠를 챙겨 입으며 감각을 끌어올렸다.
문 밖에는 두 명의 인기척이 느껴진다.
아마 총을 들고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한의사를 제압하는데 훈련 받은 경호원 둘이면 충분하다고 여겼을 터이다.
물론 아지르는, 그뿐만 아니라 세상 누구든 한지호의 진면목을 모른다.
한지호는 작심하고 오금희를 무공으로 펼치면 총을 든 경호원 수십 명과 붙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는 최악의 경우 혼자서 탈출해 카타르 국경을 넘을 각오까지 하고 왔다.
하지만 굳이 그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
그때였다.
방문 밖에서 아랍어로 시끄럽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급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조심스레 옷을 입고 헝클어진 머리를 만지던 한지호의 눈빛이 변했다.
무슨 일이 터졌다.
바깥이 시끄러워질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반다르 왕자가 깨어났다!”
한지호가 혼잣말을 내뱉자마자 방문이 노크도 없이 벌컥 열렸다.
“닥터 한-!”
무슨 뜻이 담겼는지 모를 아지르의 음성이 한지호의 고막을 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