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247화 (247/255)

# 247

6장, 머리를 열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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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호는 아무렇지 않게 사둘라 왕자의 위협을 되받아쳤지만, 어느 정도는 마음이 뒤숭숭 할 수밖에 없었다.

사둘라 왕자의 말이 아예 틀린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약 반다르 왕자의 치료가 잘못되면 그는 안전을 보장 받기 힘들어진다.

반대로 치료가 잘 되어도 사우디 영토를 벗어나기 전까지는 위험하다.

사둘라 왕자를 비롯한 반대파에서 한지호에게 앙심을 품고 습격을 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각오는 했지만 이러나 저러나 위험한 상황.

게다가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의 실세인 사둘라 왕자를 직접 만나서 악감정을 쌓았다.

물론 다시 어제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러나 한지호도 사람이기에 기분이 마냥 개운하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개의치 말자. 모든 것은 치료가 끝난 다음… 그 다음에 고민해도 늦지 않아. 집중하지 못하면 반다르 왕자의 생명도, 그리고 중동에서 피 흘리는 수많은 사람들도 전부 잃게 될 거야.’

이제 반다르 왕자의 머리를 열기 위해, 정확히 말하면 백회혈을 개문하기 위해 나아가야 할 시간이다.

한지호는 운기조식을 마치며 잡생각을 털어냈다.

오늘 하루의 치료를 위해 지난 삼일 동안 고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고 하는데, 눈을 잘 못 그리면 용을 아무리 잘 그려 놓았어도 망친 그림이 된다.

그는 호텔 스위트룸 못지않게 넓고 편안한 방을 뒤로하고 나왔다.

방문 앞에는 아지르가 먼저 도착해 조용히 서있었다.

아지르는 한참 전에 한지호의 방 앞에 왔음에도 노크를 하거나 재촉하지 않았다.

중요한 하루를 시작할 한지호가 마음을 다스리고 나오길 기다린 것이다.

“닥터 한, 준비가 되셨습니까?”

“가시죠.”

“알겠습니다.”

짧게 고개를 끄덕인 아지르가 등을 돌렸다.

한지호는 말없이 그를 따라나섰다.

머리를 여는데 쓸 침은 품 안에 챙겼다.

시술에 필요한 다른 약재와 향초 등은 아지르에게 미리 말해 준비해 놓았다.

두 번, 세 번 확인해서 철저하게 준비를 마쳤다.

환경 탓을 할 수는 없다.

만약 치료가 실패한다면 의술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지호는 누구에게도 책임을 돌리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곧이어 구불구불한 복도와 계단을 가로지른 아지르가 방 문 앞에 섰다.

오늘도 반다르 왕자는 어제와 다른 침실에 있었다.

똑똑-

“왕자님, 닥터 한과 함께 왔습니다.”

노크를 하고 낮은 음성으로 보고를 마친 아지르가 문을 열었다.

방문을 열자마자 이제는 익숙한 두 얼굴이 보였다.

경호원 두 명은 왕자의 심복인 아지르와 주치의 한지호가 온 것을 알면서도 예리한 눈길로 수상한 점은 없는지 확인했다.

그들 뒤에는 여지없이 네 명의 경호원들이 추가로 도열해 있었다.

과연 반다르 왕자를 가장 가까이서 지키는 여섯 명의 경호원은 잠은 언제 자고 밥은 언제 먹는 것일까.

사소한 호기심이 치솟았지만 생각이 오래 이어질 틈은 없었다.

반다르 왕자는 평소와 달리 침대에 누워있지 않았다.

한지호가 오기 전부터 방 안의 소파에 앉아 자기만의 방법으로 마음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왔는가, 닥터 한.”

“잠은 잘 주무셨습니까, 왕자님.”

“덕분에 제법 잘 잤네. 아주 오랜만이더군.”

반다르 왕자의 안색은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고 있었다.

원래는 극렬한 두통으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었다.

수면 부족이 이어지니 다크 서클은 짙어지고, 눈동자고 움푹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지호가 이틀 동안 몸의 균형을 회복시키고, 또 하루를 들여 탁기를 배출시키자 놀라운 변화가 나타났다.

아직 부족하긴 해도 3-4시간 가량 깊은 잠에 빠진 것이다.

잠을 편히 잘 수 있다는 것도 엄청난 축복이다.

근 3년만에 축복을 다시 느끼고 있는 반다르 왕자는 무척 고무 된 얼굴이었다.

“내가 체험하고 있지만 믿기 힘든 일이지. 고작 3일만에 컨디션이 이토록 좋아질 줄 누가 알았겠나.”

“오늘 치료만 무사히 끝나면 지난 3년의 고통은 기억도 나지 않으실 겁니다.”

“그래, 그렇지. 문제는 오늘이지…….”

반다르 왕자가 말끝을 길게 늘였다.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지만 그도 긴장한 게 분명했다.

한지호는 머리를 여는 치료가 얼마나 위험한지 확실하게 말했었다.

반다르 왕자는 큰 수술을 앞둔 기분일 것이다.

“왕자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무엇을 말인가?”

“머리를 열어 화기를 빼내는 치료는 성공을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미리 말씀드린 것처럼 최악의 경우 왕자님의 생명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습니다.”

“각오하고 있네.”

“그러나 몸의 균형을 맞추고 탁기를 빼내는 치료는 위험하지 않죠. 그것들만 반복해도 두통은 상당히 완화 될 겁니다. 장시간 비행기를 타거나 복잡한 국무를 수행하는 일은 어려울지 몰라도 평범한 일상 생활은 어느 정도 괜찮아질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닥터 한.”

“지금이라도 왕자님께서 선택을 내리면 개문을 하지 않고, 두통 증상을 완화시키는 장기적인 치료법을 알려드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뜻밖의 말이었는지 반다르 왕자가 말없이 한지호를 쳐다봤다.

아지르는 감히 둘의 대화에 끼어들지 못했다.

본인의 안위와 관련된 결정인 만큼 반다르 왕자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잠시 후 반다르 왕자가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위험을 무릅쓰고 머리를 여는 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말 그대로 그냥 사는 것밖에 더 되겠나? 국가를 대표해 외국에 방문할 수 없고, 국무를 수행할 수도 없다면 내 인생의 의미는 사라지는 것이지. 지난 3년, 살아도 산 게 아닌 삶은 충분히 맛보았네. 닥터 한, 나는 후회하지 않을테니 자네의 최선을 다해주게.”

흔들리지 않는 결심이 전해졌다.

반다르 왕자를 마주본 한지호는 담담하게 그의 뜻을 받아들였다.

“옷을 벗고 침상 위에 누워주십시오. 침을 꽂기 전, 먼저 향을 피우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지.”

“지금부터는 모두 방에서 나가야 합니다. 왕자님과 저를 제외하면 아지르도, 경호원들도 모두. 아주 미세한 호흡이나 반응만으로도 집중이 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지호의 요청을 들은 아지르가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자신은 상관없지만 6인의 경호원들을 방 밖으로 내보내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반다르 왕자가 직접 명령을 내렸다.

“모두 들었겠지? 나가있도록 해라.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도 들어오지 말고. 내 목숨은 이미 여기 있는 닥터 한에게 맡겼다.”

그는 한지호가 알아들을 수 없는 아랍어로 지시를 내렸지만, 강고한 말투의 뉘앙스는 확실히 느껴졌다.

반론을 허락하지 않는 군주의 카리스마가 담긴 명령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경호원 6명은 이내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퇴장할 때도 군더더기 없이 질서정연했다.

그들은 아마 방문 바로 앞에서 치료가 끝날 때까지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다.

“왕자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지르도 반다르 왕자에게 허리를 숙인 다음 걸음을 옮겼다.

괜히 불길하게 마지막 인사처럼 요란을 떨지 않았다.

그저 여느 때처럼 평범하게 인사를 하고 나갔다.

그렇지만 목소리의 떨림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자, 이제 정말 내 목숨은 닥터 한의 손에 달렸네. 마음대로 하게나.”

반다르 왕자는 홀가분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목숨을 걸기로 마음먹은 사람은 초탈해지는 법이다.

한지호와 반다르 왕자는 서로 다른 의미로 머리를 여는 치료에 목숨을 걸었다.

살면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을 확률이 높다.

두 사람의 생과 사를 가를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

“속이 역하지는 않으십니까?”

향을 다 피우고 일각이 흘렀다.

입을 꾹 닫고 약재를 태워 향을 피우는데 집중하던 한지호가 입을 열었다.

알몸으로 침상에 누운 반다르 왕자는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한참 텀을 두고 그가 나지막히 말했다.

“괜… 찮네.”

느릿느릿 잠에서 덜 깬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잘못된 게 전혀 아니다.

한지호가 피운 약향이 효과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아지르를 통해 사우디에서 구한 약재로 만든 향은 긴장을 완화시킨다.

일종의 마취향이다.

침이나 주사로 몸을 마비시키면 그만큼 무리가 간다.

그러나 향을 통하면 몸이 훨씬 거부감 없이 약효를 받아들인다.

다만 단점이 있다.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도 향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보통 약재향을 이용한 아로마 치료는 환자 혼자만 누워있는 공간에서 진행된다.

한의사나 테라피스트는 향초를 피우고 방에서 나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돌아와 향을 끄기 마련이다.

하지만 한지호는 침실 안이 약향으로 가득차도록 향초를 피웠다.

이 상태에서 침을 놓아 백회혈을 완전히 개방시키려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반다르 왕자처럼 향의 영향을 받아 몸과 정신이 풀리고 마비가 된다.

마비 상태에서 치료를 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나 한지호는 철저하게 대비를 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도착해서 반다르 왕자의 병세를 확인하기까지, 시간은 촉박했으나 치료 계획은 철두철미하게 세웠다.

현생과 전생의 모든 기억과 경험을 쥐어짜서 한계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인 결과다.

한지호는 아침 일찍 자신이 만든 향초에 내성을 지닌 해독약을 복용해뒀다.

뿐만 아니라 단전으로 오금희 중 간의 기능을 강화시켜 해독능력을 활성화시키는 웅공을 펼치고 있었다.

이러한 조치들이 있기에 향이 방 안을 채웠어도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다.

‘일각이 지났다, 약초를 태운 향이 온몸의 모공으로 스며들고 있어.’

한지호는 반다르 왕자의 동공과 목젖, 호흡과 맥을 꾸준히 체크했다.

인위적으로 마취 주사를 놓으면 의식을 100% 상실하게 된다.

한지호는 그런 상태를 원하지 않았다.

심신의 긴장이 풀리고, 반쯤 잠이 든 것처럼 편안하게 어떤 잡생각도 하지 않는 이완 상태를 만들려 했다.

향을 피우고 일각이 지난 지금, 한지호는 원하던 효과를 봤다.

이만하면 최적의 조건이 갖춰졌다.

스윽-

마른 침을 삼킨 한지호가 침을 들었다.

이제껏 여러 번 어려운 고비를 넘기며 현대 의학이 포기한 환자들을 치료해왔다.

그러나 이만큼 큰 부담감이 느껴지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어쩌면 전생을 각성하기 위해 자신의 몸에 십삼대혈법을 펼치던 때와 비슷한 기분이다.

벼랑 끝에서 십삼대혈법을 펼친 것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한 치료다.

‘모두 잊자. 지금 이 순간, 내가 침이고 침이 내가 되어야 해.’

무공에서는 신검합일(身劍合一)이라는 전설의 경지가 있다.

말 그대로 검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경지다.

마찬가지로 의술에서도 궁극에 이르면 침을 놓는 게 아니라 침과 하나가 될 수 있다.

한지호는 손에 든 얇고 긴 침에 영혼을 담는다는 마음을 먹었다.

꾹-!

첫 번째 침이 누워있는 반다르 왕자의 미간에 꽂혔다.

그리 깊게 찌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눈썹 사이, 딱 봐도 위험한 위치에 장침이 수직으로 섰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백회혈, 정수리 중앙 깊이 침을 놓는 순간 반다르 왕자의 머리를 둘러싼 무형의 기운이 모조리 해제 될 것이다.

한지호는 머지않아 다가올 그 순간을 그리며 두 번째 침을 들었다.

‘진법이다, 진법.’

단순한 침술이 아니다.

침을 이용해 반다르 왕자의 얼굴과 머리에 진법을 그리는 것이다.

사람의 머리를 보호하는 원천적인 기운을 제거하는 진법이다.

양쪽 관자놀이에 가로로 침이 꽂혔고, 인중과 턱 아래에도 침이 놓였다.

땀이 흐르지도 않았다.

신검합일과 비슷한 경지로 정신을 집중해 침을 놓았기 때문일까.

처음의 긴장감과 부담감도 사라졌다.

어느새 마지막, 백회혈에 침을 놓기만 하면 된다.

과연 머리의 기운이 열리고 원활하게 화기가 빠져나오게 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그 옛날 화타나 규호조차 시도해보지 못한 침술이 한지호의 손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꾸우욱!

한지호는 마지막 침을 반다르 왕자의 정수리에 놓았다.

평소에는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깊이 침을 꽂았다.

더, 더, 조금만 더.

장침이 걱정 될 만큼 백회혈 깊숙이 들어갔다.

‘됐다.’

마지막 침을 다 놓은 순간, 한지호는 손맛을 느꼈다.

결과를 예단할 수 없는, 그러나 엄청난 것이 분명한 변화가 반다르 왕자의 머리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머리가 열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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