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6
6장, 머리를 열다 (2)
일순 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누가 갑자기 에어컨이라도 킨 것 같았다.
반다르 왕자는 방금 막 탁기를 배출시켜 기운이 허해진 상태다.
지금 충격을 받으면 몸이 상할 수 있다.
한지호는 전후사정을 잘 모르지만 우선 반다르 왕자를 진정시키려 입을 열었다.
“왕자님, 흥분하거나 화를 일으키면 안 됩니다. 어렵게 나쁜 기운을 빼냈는데 잘못하면 머리에 가득 찬 화기가 몸으로 내려올 수도 있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반다르 왕자는 심호흡을 시작했다.
벌써 화가 치솟았지만 흥분해서 건강을 잃으면 자신만 손해다.
몇 번의 심호흡을 거쳐 안정을 되찾은 반다르 왕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2왕자, 사둘라가 느닷없이 병문안을 온 이유는 역시 닥터 한 때문이겠지?”
“그런 것 같습니다. 보안에 힘썼지만 한국에서 대단히 유명한 의사가 찾아왔다는 소문이 새어나갔고, 왕자님의 치료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아보려 온 것이 아닐까 합니다.”
“어찌하면 좋겠나, 아지르?”
“왕가의 법도에 의하면 병문안을 거절할 수는 없습니다. 왕족이 병문안을 거절하는 것은 생사가 위험한 중병일 때만 가능합니다. 2왕자님을 돌려보내면 왕자님께서 그만큼 위중하다고 만천하에 알리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리되면 왕가에서의 내 입지는 더더욱 줄어들겠지. 안 그래도 흔들리고 있는 왕실의 가신들도 다른 왕자들 편에 붙을 수 있고.”
“그렇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의연하게 2왕자님의 병문안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야기를 듣자하니 진퇴양난인 모양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2왕자 사둘라는 반다르 왕자의 최대 정적이다.
반다르 왕자가 병상에 누우며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도 다름 아닌 사둘라다.
당연히 둘의 사이는 좋을 리 없었다.
왕가의 법도와 정치적 문제 때문에 병문안을 거절 하기 힘든 상황 같았다.
“왕자님, 제가 곁에 있겠습니다. 왕자님께선 오늘 탁기를 배출해 기운이 허해졌고, 내일 머리를 여는 치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혹시 2왕자라는 분의 도발에 휩쓸려 화를 내게 되면 치료가 더욱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옆에서 보필하겠습니다.”
한지호는 원활한 치료를 위해 반다르 왕자 옆에 남겠다고 말했다.
자칫 손쓸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면 지난 3일의 수고가 물거품이 된다.
그러나 반다르 왕자와 아지르 모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둘라 왕자님이 닥터 한의 얼굴을 본다면…….”
“좋은 생각이 아니네, 닥터 한. 위험해질 수도 있어.”
둘은 거의 동시에 한지호를 만류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한지호는 흔들림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사우디에 올 때부터 위험은 감수했습니다. 제가 옆에 있지 않는 사이 왕자님의 화기가 더욱 치솟으면 치료는 불가능해집니다. 그것만은 막아야겠습니다.”
“정말… 괜찮겠는가?”
“괜찮습니다.”
한지호는 반다르 왕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힘주어 말했다.
괜한 객기를 부리는 게 아니다.
한의사로서 환자를 지키겠다는 결연한 의지일 따름이다.
그의 각오를 느낀 반다르 왕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지르 무하드 쉐이파, 명을 내리겠다.”
“받들겠습니다, 왕자님!”
“왕가의 법도에 따라 2왕자 사둘라가 데려 온 호위 병력을 모두 안가 밖에 대기시키도록 하라. 오직 사둘라의 병문안만 허락하겠다.”
“그리 알리겠습니다.”
거의 90도로 허리를 숙인 아지르가 밖으로 나갔다.
침실 안에서 반다르 왕자를 지키는 경호원들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사둘라 왕자가 호위 병력 없이 혼자 온다면 크게 위험할 일은 없다.
하지만 그는 기회가 주어지면 언제든 반다르 왕자를 암살까지 할 수 있는 요주의 인물이다.
현재 사우디 국정을 주도하는 정치적 실세이기도 하다.
베테랑 경호원들이 긴장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닥터 한, 곧 다른 방에서 사둘라의 병문안 인사를 받을 것이네.”
“네, 왕자님.”
“자네의 말처럼 나도 흥분하지 않고 의연히 대처하겠네. 그러니 닥터 한도 침착하게.”
“명심하겠습니다.”
한지호는 반다르 왕자의 말을 새겨들었다.
그와 아지르가 이처럼 경계할 정도면 사둘라 왕자는 만만치 않은 인물일 것이다.
“의복을…….”
“참, 잊고 있었군.”
탁기를 배출하느라 반다르 왕자는 알몸인 상태였다.
한지호는 그의 몸을 닦은 물수건과 침대 위에 깔아둔 하얀 천을 한데 모아 버렸다.
그 사이 반다르 왕자는 침대 옆에 가지런히 정리해둔 옷을 입었다.
탁기는 나쁜 기운이지만 어쨌든 몸 안에 들어있던 것이다.
한 순간에 어마어마한 양의 탁기를 배출하면 몇 끼를 굶은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인지 반다르 왕자의 안색이 약간 창백해 보였다.
한지호는 수행원들에게 포도 주스를 가져오라고 일렀다.
사둘라 왕자의 병문안을 받기 전에 일시적으로 당과 기운을 회복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오늘만 잘 넘기자, 오늘만. 그럼 내일 개문을 할 수 있어.’
지금 한지호는 누구에게라도 기도를 드리고 싶었다.
반다르 왕자의 머리를 열기 하루 전, 뜻밖에 찾아온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픈 마음밖에 없었다.
이제 대략 20분 정도가 지나면 사둘라 왕자를 보게 된다.
또 하나의 승부가 시작되는 것이다.
+++
똑똑-
노크 소리가 마치 천둥처럼 들렸다.
그리 크지 않은 소리지만 사방이 고요했기에, 혹은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기에 천둥처럼 들린 건지도 모른다.
한지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반다르 왕자는 대리석으로 치장 된 넓은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는 화려한 공간이었다.
아마 사둘라 왕자에게 위용을 보이기 위해 이 방을 선택한 것 같았다.
끼이익-
노크 소리가 잦아들고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방문 앞에는 언제나처럼 건장한 체구의 경호원 두 명이 서있었다.
나머지 넷은 반다르 왕자가 앉아있는 의자 주위를 지켰다.
이들 여섯 명이 반다르 왕자를 지근거리에서 경호하는 마지막 장벽이다.
곧이어 방문 앞 경호원 두 명을 지나쳐 아지르와 사둘라 왕자가 들어왔다.
사둘라 왕자는 정말 혈혈단신이었다.
대동하고 온 수행원과 경호원 일행을 안가 외부에 두고 왔기 때문이다.
제발로 호랑이 굴에 들어온 배짱이 보통이 아닌 것 같았다.
“형님, 강녕하십니까?”
반다르 왕자에게 인사를 하는 목소리는 하이톤이었다.
듣기에 따라 다소 경박스럽게 느껴질 법도 하다.
키는 컸지만 체구도 호리호리한 것이 남자다운 스타일은 아니었다.
이목구비는 흔히 말하는 꽃미남 과였다.
일반적인 중동 미남들보다는 선이 여리고 고왔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꽃중년이지만 소싯적에는 사우디 여자들의 마음을 휘젓고 다녔을 것 같았다.
‘눈 밑이 검다. 음흉해.’
한지호는 사둘라 왕자의 인상을 파악하고 있었다.
수려한 외모지만 눈 밑에 살이 없고 그늘이 졌다.
평상시에 머리를 아주 많이 쓰면서 스트레스를 잘 받는다는 뜻이다.
모략가들이 보통 이런 인상을 타고난다.
삼국지 시대에서는 위 나라의 천재 모략가인 곽가가 사둘라 왕자처럼 화려한 이목구비를 자랑했었다.
“염려해준 덕분에 많이 좋아지고 있다.”
반다르 왕자는 한지호의 조언대로 차분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사둘라 왕자가 굳이 병문안을 온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치료가 되는지 떠보기 위해 행차한 것이다.
만약 반다르 왕자의 병이 낫는다면 사우디의 국정 주도권을 돌려줘야 한다.
국제회의에도 다시 반다르 왕자가 사우디를 대표해서 참석하게 될 것이다.
“이자가 형님을 치료하러 온 의사입니까? 한국에서 왔다는?”
사둘라 왕자가 손가락을 들어 한지호를 가리켰다.
둘은 아랍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어서 한지호가 알아들을 순 없었다.
하지만 무척 오만한 태도라는 것은 저절로 느껴졌다.
“한국에서 온 닥터 한이다.”
반다르 왕자가 한지호의 정체를 밝힌 순간, 사둘라 왕자는 기다렸다는 듯 영어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닥터 한? 천한 출신이라 왕가의 법도를 모르나? 왕자를 보고도 고개를 숙이지 않다니.”
그는 대뜸 한지호에게 시비를 걸었다.
의도가 뻔히 보이는 도발이었다.
반다르 왕자든 한지호든 흥분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만약 한지호가 걸려들어 실수를 하면 그 핑계로 트집을 잡을 게 분명하다.
물론 실제로 처벌을 못 해도 의료진의 멘탈을 흔들면 치료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
한지호는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한국에서 온 한지호입니다.”
“듣자하니 제대로 된 의사가 아니라던데. 전통 의학이라는 게 따지고 보면 미신 아닌가? 만약 형님의 몸에 이상이 생긴다면 왕가를 대신하여 네놈을 참수하겠다. 너의 목숨이 걸린 일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치료하는 게 좋을 것이야.”
사둘라 왕자가 작정하고 온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눈이 뒤집힐 소리였다.
그는 반다르 왕자를 걱정하는 척 하면서 한지호에게 노골적으로 부담을 줬다.
치료에 실패하면 목을 치겠다는 말, 웬만큼 용감한 의사라도 간이 쪼그라들어 심리적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다만 하필이면 상대가 한지호라서 사둘라 왕자의 의도가 통하지 않을 따름이었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존스 홉킨스 의학전문 대학원에서 교수로 임용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계적인 기준에서 봐도 제 의술이 미신에 속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에 오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목숨을 건지 오래입니다. 사둘라 왕자님의 말씀 받들어 최선을 다해 반다르 왕자님을 치료하겠습니다.”
한지호는 너무나 평온한 말투로 사둘라 왕자의 말을 100% 받아쳤다.
태도는 정중하고 흠 잡을 데 없었다.
그러나 누가 봐도 알 수 있다.
한지호가 사둘라 왕자의 턱 밑에 어퍼컷을 날린 셈이다.
“네놈이…….”
예상 못한 반격에 사둘라 왕자가 주먹을 꽉 쥐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지호는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혹시 제가 실언이라도 했습니까?”
사둘라 왕자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한지호의 말에서 트집 잡을 구석이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둘라, 병문안을 와줘서 고맙구나. 그러나 내가 오랜 치료로 피곤하니 이만 물러가는 게 좋겠다.”
반다르 왕자가 적절한 타이밍에 나섰다.
결국 사둘라 왕자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또 찾아뵙겠습니다, 형님.”
“왕궁에서 보자.”
정치의 중심부 사우디 왕궁으로 돌아가겠다는 반다르 왕자의 의지가 읽혔다.
사둘라 왕자는 어깨를 쫙 펴고 들어왔을 때와 달리 얼굴을 붉힌 채 퇴실했다.
그가 나가자 아지르와 반다르 왕자가 동시에 한지호를 쳐다봤다.
“닥터 한, 이제껏 사둘라 왕자님을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든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그러게 말이네. 의술만큼 입담과 배짱도 대단하더군.”
아지르와 반다르 왕자가 질세라 한지호를 칭찬했다.
한지호는 아까와 달리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왕자님께서 흥분하지 않으셔서 다행입니다.”
“내가 흥분할 틈도 없이 닥터 한이 사둘라를 흥분시키지 않았나? 아마 사둘라는 오늘 밤 잠을 이루지 못할 듯 싶네.”
반다르 왕자는 생각하면 할수록 통쾌한 듯 웃음기를 띄었다.
그가 이렇게 웃는 모습은 처음 봤다.
한지호는 만족감을 느끼며 반다르 왕자에게 다가섰다.
“탁기가 빠진 혈도에서 기가 원활히 순환되도록 추궁과혈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녁은 식사를 든든히 하세요.”
“모두 닥터 한이 말하는대로만 따라야지.”
반다르 왕자는 한지호를 단순한 주치의로 여기지 않았다.
3일만에 그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은 것이다.
치료가 성공하면 반다르 왕자는 훗날 국왕이 될 사우디의 실세로 복귀한다.
한지호는 한중일 3국과 영국에 이어 중동의 지도자에게도 의술로 빚을 지울 것 같았다.
침 하나로 세계를 좌우하는 한의사.
한지호 이전에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 전부 현실로 이뤄지고 있었다.
드디어 내일, 반다르 왕자의 머리를 열고 화기를 빼내기만 하면 이무기가 여의주를 찾고 용이 되듯 하늘 높이 오를 것이다.
더불어 전생에서 조조를 상대로 해내지 못한 치료도 현생의 의술로 극복하게 된다.
여러모로 한지호에게 새로운 발판이 될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