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244화 (244/255)

# 244

5장, 왕자의 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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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지겹도록 반복됐던 순간, 한지호는 전생의 기억 중에서 가장 강렬한 장면을 복기했다.

머리를 열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 조조의 장수들은 살기를 뿜어냈었다.

특히 하후연의 서늘한 눈빛은 담대한 규호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 정도였다.

현대에서도 반응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한지호는 반다르 빈 탈랄 왕자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선 머리를 열고 화기를 빼내는 게 유일한 방법이라 말했다.

말이 끝나자마자 방 안의 경호원들이 한지호를 노려봤다.

왕자가 있기에 과격한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당장 총을 겨눌 기세였다.

공항에서부터 한지호를 안내한 반다르 왕자의 최측근 아지르도 기함했다.

처음에는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쌍심지를 켰다.

한지호의 뒤통수를 노려보는 아지르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하하, 하하하! 머리를 연다? 그거 참 재미있는 말이로군.”

그런데 반다르 왕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조조의 차갑고 날카로운 웃음과는 느낌이 달랐다.

어쨌거나 당사자가 웃었다는 것까지 전생의 기억과 비슷했다.

반다르 왕자는 환자답지 않게 차분한 얼굴로 한지호를 쳐다봤다.

사람들이 상상하기 힘든 두통에 오래 시달렸고, 국무에서도 밀려나 이복 동생들에게 위협을 받는 처지가 됐지만 왕족의 기품을 잃지 않은 듯 했다.

“우선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네. 아무 이유 없이 머리를 열겠다고 하지는 않았을 터…… 영국 왕실의 신임을 받은 의사라면 깊은 뜻이 있겠지.”

반다르 왕자는 한지호에게 발언권을 줬다.

동시에 다소 흥분한 경호원들과 아지르를 진정시키는데도 성공했다.

한지호는 그를 다시 보게 됐다.

그저 운 좋게 사우디아라비아의 첫 째 왕자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병상에서도 리더십을 보이는 인물 같았다.

양성문이 괜히 반다르 왕자가 중동 평화의 희망이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지호는 숨을 들이마신 다음 설명을 시작했다.

“말 그대로 머리를 열자는 게 아닙니다. 물론 두개골 절개술을 하지 말란 법도 없지만.”

“머리를 여는 게 유일한 방법이라더니 또 머리를 열자는 것은 아니다?”

“기운을 말하는 것입니다, 왕자님. 한의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기의 흐름을 연구하며 발전해왔습니다. 특별한 침술로 머리의 기운을 완전히 열어버리면 굳이 두개골을 절개하지 않아도 됩니다.”

한지호는 자신만의 해법을 찾아냈다.

전생의 스승 화타는 조조의 두개골을 열어 두통을 치료하려 했었다.

조조의 화를 돋구기 위해 일부러 뱉은 말이 아니라 그게 유일한 치료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의 한지호는 더 많은 의학적 지식을 습득했다.

전생의 기억, 화타로부터 전수받은 규호의 의술과 더불어 현대 최첨단 정보가 더해진 셈이다.

세계를 누비며 다양한 환자들을 치료한 것도 경험이 됐다.

그렇게 발전시킨 한지호만의 의술로 일가를 이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0년 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의 한의사 한지호는 삼국지 시대의 의성 규호를 넘어선 것이다.

“조금 더 자세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왕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침을 어깨와 뒷목, 그리고 안면과 머리에 놓을 겁니다. 이후 약재를 배합하여 향을 피우고, 추궁과혈의 수법으로 기운을 격동시킵니다. 그렇게 되면 머리를 감싸고 있는 모든 기운이 일시적으로 사라집니다. 매우 위험한 상태지만, 왕자님의 머리 깊이 파고든 화기를 날려보내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영어로 표현하기 힘든 단어가 많아서 설명이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한지호는 손짓을 섞어가며 자신의 의도를 충실히 알렸다.

반다르 왕자는 진지한 얼굴로 한지호의 말을 경청했다.

극심하다못해 죽음에까지 이르게 만드는 두통을 치료하고, 자신을 사우디아라비아의 후계자로 다시 세워 줄 수도 있는 의사의 설명이다.

열과 성을 다해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뒤쪽에 선 아지르도 한지호가 말하는 내용을 한 자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위험도가 어느 정도인지 간단히 말해줄 수 있겠나? 실제로 머리를 여는 게 아니라고 해도… 닥터 한의 설명을 들으니 안전한 치료법은 아닌 것 같아서 말이네.”

반다르 왕자는 비교적 한지호의 설명을 잘 알아들었다.

안전한 치료법이었다면 머리를 연다고 표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한지호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

괜히 오래 생각하며 표현 수위를 다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환자 스스로 각오를 하지 않으면 치료를 시작할 수 없다.

한지호도 사우디라는 이역만리에서 크나큰 위험부담을 지고 치료를 해야 한다.

최소한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환자의 의지라도 확실해야 부담이 덜 할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실제로 두개골을 절개하는 것보다 아주 조금 덜 위험합니다.”

“아주, 아주 위험하다는 뜻이로군.”

“그렇습니다. 머리의 기운이 열린 상태에서 약간의 충격이라도 주어지면 뇌손상이 일어날 겁니다. 두뇌를 둘러싼 뼈와 근육, 피부는 그대로지만 평소에 보호막 역할을 하던 기운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가 되니까요.”

“경호에 만전을 기하면 될 일, 내 배다른 동생들이 아무리 나를 죽이고 싶어한들 감히 이곳으로 직접 쳐들어오진 못 할 것이네.”

반다르 왕자의 말에서 위엄이 느껴졌다.

병상에 누워 국무에서 손을 뗐지만 여전히 왕위 계승 서열 1위다운 카리스마를 품고 있었다.

“외람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외과의사들이 어려운 수술에 도전하는 것처럼 이 치료법은 제게도 힘든 도전입니다.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100% 장담할 수 없습니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반다르 왕자는 섣불리 입을 열지 않고 생각에 잠긴 듯 했다.

이윽고 그가 한지호 대신 아지르를 불렀다.

“아지르.”

“네, 왕자님!”

“내가 이대로 국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아가는 게 나을 것 같나? 아니면 위험하더라도 닥터 한의 치료에 몸을 맡기는 게 나을 것 같나?”

“그, 그건…….”

너무도 직접적인 물음에 아지르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정답은 분명하다.

그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 반다르 왕자의 병을 방치하면 목숨조차 부지하기 힘들어진다.

세계 최고의 의사들도 손을 뗐고, 사우디로 와줄 의료진을 더 찾기도 힘든 상황이다.

지금으로선 한지호에게 희망을 거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지르는 감히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못했다.

평생을 모셔온 왕자에게 목숨을 건 도박을 하라고 권유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지르, 난 이제 자네의 눈만 봐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지.”

“왕자님…….”

“세월의 힘이 있지 않나.”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하여 왕자님께서 이런 고충을…….”

“병에 걸린 게 어찌 자네 탓이겠나. 나는 닥터 한에게 운명을 맡길 터이니 당분간 안가의 경계에 신경을 써주게. 동생들이 딴 마음 품지 못하도록 정보도 철저히 지켜야 되겠군.”

“빈틈 없이 조치하겠습니다.”

반다르 왕자는 뜻을 굳혔다.

그의 의중을 알아차린 아지르는 고개를 숙이며 경호에 만전을 기할 것을 다짐했다.

곧이어 반다르 왕자가 한지호를 불렀다.

“닥터 한.”

“네.”

“내 목숨을 자네 손에 맡기지. 사실 나도 무척 떨리지만, 그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 보이는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따지고보면 수술대에 들어가는 환자와 마찬가지인 셈이니 특별히 더 겁을 먹을 필요는 없을 것이네만, 그래도 내가 잘못 된다면… 나의 조국과 중동의 정세는 겉잡을 수 없이 어지러워지겠지. 나는 그것이 염려되어 아직은 죽지 못하겠네.”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당연히 누구나 더 살고 싶어한다.

하지만 반다르 왕자는 자신이 사라졌을 때 혼탁해질 사우디아라비아와 중동의 정세를 걱정하고 있었다.

양성문의 말이 맞았다.

이 사람을 살리면 중동에서 피 흘릴 수천, 수만 명의 목숨을 덩달아 같이 살릴 수 있다.

한지호는 위험천만한 사우디까지 날아온 게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환자의 의지입니다. 왕자님, 반드시 살겠다고 생각하십시오. 저도 기필코 왕자님 머리의 화기를 빼내겠습니다. 그래서 예전처럼 비행기를 타고 세계를 다니며 중동의 평화를 이끌어 내시기를, 종교라는 하잘 것 없는 이유로 피 흘리는 사람들을 살리시기를 바라겠습니다.”

한지호가 진심으로 내뱉은 말은 굉장히 수위가 높았다.

종교를 하잘 것 없다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제정일치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신성 모독으로 감옥에 끌려갈지 모르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반다르 왕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으로 죽은 사람들이 작년에만 수만 명이 넘는다.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은 물밑에서 군자금과 무기를 지원하며 중동의 내전을 지속시킨다는 오명을 사고 있다.

실제로 억울한 오해가 아닌 사실이다.

반다르 빈 탈랄.

그가 1왕자로서 지위를 회복하고 순조롭게 왕위에 오르면 사우디와 중동은 달라질 수 있다.

한지호는 이번에야말로 수만 명의 목숨과 세계 평화를 걸고 환자를 치료하게 됐다.

그가 놓는 침 하나에 천하가 달린 셈이다.

규호가 절규했던 것처럼 의술로 천하를 좌우하는 자리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시간이 많지 않을 터이니 오늘부터 바로 치료를 시작하겠나?”

한지호가 사우디 왕실과 약속한 일정은 5일이다.

경우에 따라 사우디 체류 기간이 길어질 수 있다는 각오는 하고 왔다.

그러나 이왕이면 5일 안에 반다르 왕자의 병을 치료하고 돌아가는 편이 낫다.

물론 억지로 서두른다고 될 일은 아니다.

만약 반다르 왕자가 치료 도중 잘못되기라도 하면 5일이 아닌 50일 이상을 강제로 억류 당할지 모른다.

“머리를 여는 것, 정확히 말하자면 백회혈을 개방시키는 치료는 4일째에 시도하겠습니다.”

“백회혈?”

“정수리에 위치한 혈도입니다.”

반다르 왕자는 발음하기 힘든 백회혈을 용케 따라했다.

한지호는 그의 눈을 마주본 채 자신이 구상한 치료 계획을 간단히 알려줬다.

“오늘부터 내일까지는 왕자님의 무너진 신체 균형, 특히 머리와 연관된 균형을 바로잡겠습니다. 그리고 3일째 전신의 혈도를 자극해 탁기를 배출시킬 것이고, 4일이 되면 백회혈을 개방시켜 머리의 화기를 빼내겠습니다. 치료가 성공하면 5일째에는 몸에 다시 좋은 기운을 채우는 치료를 할 겁니다. 이후로는 약재 처방으로도 충분하리라 보여집니다.”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닥터 한이 계획한 것처럼 술술 풀렸으면 좋겠네.”

“그렇게 만들어야죠. 치료에 필요한 약재와 재료는.”

“아지르에게 말하게.”

반다르 왕자는 한지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지르를 가리켰다.

아지르는 기다렸다는 듯 한지호를 돌아보고 말했다.

“아무리 구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해도 반나절이면 가져오겠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종교적으로 극히 폐쇠된 국가지만 외국과의 교역은 활발하다.

1왕자의 최측근이 마음 먹고 지시를 내리면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

한지호는 아지르에게서 펜을 빌려 종이에 필요한 약재를 적기 시작했다.

침은 넉넉하게 챙겨왔다.

하지만 향을 피울 때 필요한 약재와 재료는 현지에서 공수해야 한다.

반다르 왕자의 병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얻지 못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한지호가 적어준 리스트를 챙긴 아지르는 당장 뛰쳐나갈 기세였다.

“왕자님, 다녀오겠습니다.”

“그러게. 여긴 걱정 말고.”

“돌아와서 뵙겠습니다.”

허리를 90도로 숙인 아지르가 밖으로 나갔다.

이제 침실 안에는 반다르 왕자와 한지호, 그리고 무생물처럼 서있는 경호원들만 남았다.

한지호는 품에 챙겨 온 침 케이스를 꺼냈다.

설명했듯이 오늘과 내일은 몸의 균형을 다시 잡는데 힘쓸 것이다.

3년 이상의 병증으로 반다르 왕자의 몸은 밸런스가 깨져 있었다.

특히 머리부터 목, 어깨, 척추로 이어지는 균형이 깨지면 두통이 더 심해진다.

한지호는 상체를 일으키고 앉아있는 반다르 왕자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침을 놓고 추궁과혈을 할 겁니다. 추궁과혈은… 마사지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내 목숨을 맡겼으니 뭐든 뜻대로 하게. 이미 닥터 한의 손에 붙들린 생명이네.”

반다르 왕자의 담담한 말투에서 오히려 삶에 대한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한지호는 그의 턱을 집중해서 쳐다보고 있었다.

손에 들린 장침이 놓일 자리가 아무래도 턱인 것 같았다.

“왕자님, 많이 아플 겁니다. 아주 많이.”

말을 마침과 동시에 한지호가 손을 쑥 뻗어 왕자의 턱 중앙에 침을 꽂았다.

“으읍… 으으음…….”

의연한 반다르 왕자도 신음을 참지 못했다.

한지호가 경고한 것처럼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턱이 들리면 목이 부담하는 하중이 늘어나고, 목이 무리를 하면 어깨가 딱딱하게 굳습니다. 어깨가 굳으면 척추가 휘고 몸의 균형이 틀어지는 것이죠.”

“그, 그런가?”

“오늘과 내일, 이틀만 지나도 머리가 한 결 가벼워지고 목과 어깨가 시원하게 풀리게 될 겁니다.”

한지호는 자신있게 말하며 두 번째 침을 놓았다.

아래턱과 목이 만나는 부분, 딱 보기에도 위험한 위치에 장침이 깊게 꽂혔다.

어찌보면 한지호는 그저 반다르 왕자의 자세를 교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건강의 팔할은 자세와 관련이 있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대계를 이뤄나갈 작정이다.

치료를 시작한 한지호의 눈에는 의심 대신 확신만 떠올라 있었다.

반다르 왕자를 치료해 중동에 새로운 바람을 불게 하는 것, 피바람이 아닌 의술의 힘으로 이뤄내는 왕자의 난.

한지호는 신중하게 그 초석을 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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