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243화 (243/255)

# 243

5장, 왕자의 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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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르는 한지호가 외친 조조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물어봤다.

하지만 한지호는 솔직히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전생에 삼국지 시대를 살았고, 조조는 당시 최고이자 최강의 영웅이었다는 사실을 말하면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것이다.

사우디까지 와서 반다르 빈 탈랄 왕자를 보지도 못하고 추방당할 게 뻔했다.

그래서 뭔가를 발견했을 때 외치는 한국말이라고 대충 설명했다.

졸지에 조조는 유레카의 한국식 표현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 알려지게 됐다.

‘그런데 정말 조조의 병과 비슷해.’

한지호는 헤프닝을 일단락하고 반다르 왕자의 안가로 들어섰다.

그는 성채의 입구에서 다시 한 번 보안 검사를 받으면서도 계속 조조를 생각했다.

전생의 스승 화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흉.

공중보건의 시절 가장 자주 꿨던 꿈에서 조조와 규호가 대립하던 장면이 생생하다.

한국에서는 몰락한 위천 한방병원의 이사장 조준혁이 조조를 닮아 있었다.

하지만 외모와 분위기가 비슷했을 뿐, 조조가 앓았던 질병을 조준혁이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반다르 빈 탈랄 왕자의 증상은 조조가 앓았던 질병의 증상과 상당히 흡사했다.

정상적 범주를 초월한 심각한 두통이 핵심이다.

그로인해 호흡곤란 등의 부차적 증세가 발생하는 것 같았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비행기를 탈 때 증상 발현이 두드러진다는 사실이다.

초진도 비행기 안에서 이뤄졌다.

단순한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장거리 비행과 발병의 상관관계가 있을 것이고, 그것을 밝혀내는 게 치료의 키포인트가 될 것 같았다.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그때 아지르의 목소리가 한지호의 상념을 일깨웠다.

보안검사를 통과하고도 멍하니 서있던 한지호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의 짐은 경호원이 안가 내 모처로 옮겼다.

말이 안가(安家)이지 궁전이나 다름없는 반다르 왕자의 성에는 방이 50개가 넘는다고 한다.

혼자서는 길을 잃기 십상이다.

그렇기에 항상 아지르와 함께 동행할 수밖에 없다.

길을 알게 되더라도 아지르가 함께하지 않으면 매번 경호원들로부터 검문을 당할지 모른다.

반다르 왕자의 증세가 심해진 이후 경호팀도 무척 예민해졌다.

1왕자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해진 틈을 타 암살이나 독살 시도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왕자님께서는 매일 침실을 바꾸고 계십니다.”

아지르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한지호는 그를 따라 넓은 복도를 걸어가며 물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이곳은 다른 곳도 아닌 반다르 왕자님의 안가인데…….”

“만일을 대비하는 것이지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한지호는 양성문에게 들었던 사우디 정세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우디의 국왕은 늙었고, 그를 지탱해온 가신들이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

마흔살을 넘긴 반다르 왕자는 국왕의 뒤를 이어 국무를 수행하던 시점에서 갑자기 병이 심해졌다.

그 덕에 가신들도 반다르 왕자를 지지하는 그룹과 2왕자, 3왕자 등을 미는 그룹으로 계파가 갈렸다.

반다르 왕자가 완전히 사라지면 권력의 추는 다른 왕자들에게 급격히 쏠린다.

가능성은 낮지만 누군가 무리수를 둬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이곳입니다.”

얼마나 걸었을까.

계단과 복도를 한참 헤집고 다닌 끝에 하얀 문 앞에 다다랐다.

바닥이나 벽이 대리석인 경우는 흔하지만 방문이 대리석으로 장식 된 것은 처음봤다.

통짜 대리석은 아니지만 그래도 무게가 꽤 나가기에 문을 열고 닫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들어가겠습니다.”

아지르는 노크를 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쿠구구궁-

문틈 너머로 시꺼먼 얼굴이 보였다.

검은 정장을 입은 경호원 두 명이 방문 바로 앞에 우뚝 서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경호원부터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아지르의 얼굴을 알아보고 천천히 길을 터줬다.

시야를 가리고 있던 커다란 덩치 두 명이 비켜서자 그제야 방 안이 보였다.

당연하게도 방은 웬만한 집의 거실보다 넓었고, 창가가 있는 쪽에 침대가 놓여 있었다.

한지호는 신중하게 걸음을 뗐다.

방 안에는 경호원 두 명만 있지 않았다.

문 앞을 지킨 경호원이 두 명이었고, 또 다른 경호원 둘이 더 있었다.

“왕자님.”

침대 근처까지 걸어간 아지르가 조심스레 반다르 빈 탈랄 왕자를 불렀다.

한지호는 그의 동태를 살피며 침실의 환경을 확인했다.

수액을 맞고 있는 게 보이지만 그 외의 의료 장비는 없었다.

링겔은 일반 가정집에서도 흔히 맞을 수 있는 것이다.

심각한 병증을 호소하는 사우디 왕자라면 최첨단 의료장비를 갖추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실제와 예상은 달랐다.

궁전과 방이 화려한데 비해 의료 시설은 초라한 정도가 아니라 전무한 수준이다.

이유가 궁금했지만 한지호는 말을 아꼈다.

눈을 감고 있던 반다르 왕자가 상반신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아지르….”

잠에서 막 깼기 때문에 반다르 왕자의 목소리는 가뭄에 걸린 논밭처럼 갈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제법 탄탄해 보였다.

얇은 실크 잠옷 너머 보이는 실루엣엔 군살이 거의 없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콧수염도 뚜렷한 이목구비와 잘 어울렸다.

중동 미남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얼굴이다.

다만 눈이 너무 깊이 들어갔고, 진하게 내려온 다크 서클이 피로함을 드러내보였다.

“왕자님, 한국에서 온 닥터 한입니다.”

“한지호입니다.”

고개를 숙였다 든 한지호는 다시 한 번 반다르 왕자의 안색을 자세히 확인했다.

얼핏 보면 그저 피로해 보일 뿐이지만, 눈동자와 얼굴에 생기가 없었다.

많이 지쳐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영국 왕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고 했지.”

반다르 왕자는 완벽한 영국식 엑센트를 구사했다.

어설프게 배운 영어가 아니었다.

“나도 런던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었지. 그래서 닥터 한, 그대에게 거는 기대가 아주 크다네.”

역시 그는 영국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었다.

한지호가 영국 왕실의 인정을 받은 게 초빙에 큰 영향을 끼친 것 같았다.

“어렵게 사우디까지 왔습니다. 꼭 제 역할을 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믿음직스럽군. 필요한 게 있다면 아지르에게 말하도록 하게. 무엇이든 줄 것이네.”

“알겠습니다. 먼저 진맥을 한 다음 치료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한지호는 곧장 본론에 들어갔다.

그는 가능한 빨리 치료를 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어차피 반다르 왕자도 한시 빨리 지긋지긋한 두통과 질병이 해결되길 원하고 있었다.

아지르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고, 방 안의 경호원들은 날카로운 눈길로 침상을 주시했다.

한지호는 서서히 다가가 반다르 왕자의 손목을 쥐었다.

진맥이야말로 한의학의 첫 걸음이자 모든 것이다.

그는 모든 편견을 내려놓고 맥박이 뛰는 소리에만 온 정신을 집중했다.

“…….”

침묵의 시간이 길어졌다.

1분, 2분.

짧지만 무척 길게 느껴지는 시간 동안 다들 입을 열지 않았다.

한의학 방식의 진맥을 처음 받아보는 반다르 왕자는 약간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 한지호가 눈을 뜨길 기다렸다.

“후우-.”

한지호는 긴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반다르 왕자와 아지르는 무슨 말이라도 듣길 원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진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몸 곳곳을 만지겠습니다.”

한지호의 말에 반다르 왕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호원들은 침상 쪽으로 가까기 한 걸음씩 움직였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언제든 한지호를 제압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한지호는 경호원들의 동태에 신경을 껐다.

오직 눈앞에 앉아있는, 기력이 점점 쇠하는 중인 반다르 왕자에게만 집중했다.

처억-

그는 손바닥으로 반다르 왕자의 가슴을 짚었다.

단순히 몸을 만지기만 하는 게 아니다.

오금희의 기운을 손바닥에 끌어올려 반다르 왕자의 몸에서 나오는 기운과 맞춰보는 것이다.

가슴 다음은 이마다.

마치 어머니가 아이의 열을 체크하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손바닥에서 후끈후끈한 기운이 느껴졌다.

반다르 왕자의 체온이 높아서가 아니다.

피부에 닿는 체온이 아닌 무형의 기운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다른 의료 기구가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왕자님?”

“어차피 쓸모가 없기 때문이네. 만성이 되어버린 두통, 이따금 심해지는 통증. 그것이 내 증상인데 무슨 의료 기구로 대처를 할 수 있겠나?”

그러고 보면 틀린 말이 아니었다.

반다르 왕자가 최첨단 의료 설비를 쓰지 않았을 리 없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도 차도가 보이지 않기에 반쯤 포기하는 심정으로 수액만 맞고 있는 것이다.

그의 가슴과 이마를 짚어본 한지호는 손을 떼고 한숨을 쉬었다.

진맥이 잘 안 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명확하게 병명을 알 것 같았다.

문제는 치료법이다.

한지호는 복잡한 눈빛으로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두통이 심해지며 호흡 곤란과 발열이 일어날 때, 증상의 경과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3년이나 따라다닌 병이네. 당연히 기억하고 말고.”

“발열감이 전신에서 느껴집니까, 아니면 머리. 그러니까 목 위에서 집중적으로 느껴지십니까?”

“열이 나면…… 주로 이마가 불에 탄 것처럼 뜨거워지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다른 사람들이 이상한 점을 알아볼 정도네.”

“역시 그렇군요.”

한지호는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의사가 환자 앞에서 감정을 내보일 수는 없었다.

금방 포커 페이스를 회복한 그는 반다르 왕자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봤다.

“비행기에 타면 고도와 기압으로 인해 체열이 몸 위쪽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큰 문제가 안 됩니다만, 왕자님은 다릅니다. 머리에 열기가 가득 차 있는 상태이기에 비행을 할 때마다 증상이 심해지는 것입니다.”

“열기가 머리에 차있다?”

“쉽게 말하면 언제든 날뛸 수 있는 불 덩어리가 왕자님의 머리 안에 들어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상했던 정도인지, 아니면 더욱 심각한 말인지 반다르 왕자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이제껏 병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의료진은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한지호는 다른 의사들과 달리 진맥을 통해 뭔가를 알아낸 것 같았다.

“치료를 하지 않으면 계속 만성 두통에 시달리게 될 겁니다. 이미 비행기를 타기 힘들 정도라면 증상이 위험 수위에 다다른 것이고, 방치할 경우… 남은 수명이 어느 정도일지 예상하기 어렵습니다. 설혹 생명에 지장이 없더라도 정상적으로 국무를 수행하며 비행기로 외국을 다니기는 힘들겠죠.”

“이미 국무에서 밀려나 침대에만 누워있지 않은가. 살아도 산 것이 아니네.”

“제가 알기로 치료를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무엇인가?”

반다르 왕자의 눈빛이 변했다.

시름시름 앓아가던 얼굴이 아니라 눈에 빛이 돌았다.

아지르도 깜짝 놀란 표정으로 한지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한지호는 쉽게 입을 열기 힘들었다.

그 옛날, 치료법을 말했다가 스승을 죽게 만든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번에도 한의사로서 소견을 말했다는 이유로 곤욕을 당할지 모른다.

사우디 같은 국가에서 반다르 왕자가 명을 내리면 즉결 처형도 가능하다.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지.’

잠깐 고민한 한지호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환자에게 거짓을 말하거나 진실을 숨길 수는 없다.

최악의 사태가 벌어져도 책임을 지는 것, 그것이 의성(醫聖)의 자세다.

“머리를 열고 가득 찬 화기를 빼내야 합니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수천 년의 세월을 거슬러 화타의 제자 규호를 괴롭혔던 운명의 굴레가 한지호에게 전해졌다.

머리를 열어야 한다는 말을 전생이 아닌 현생에서 내뱉은 한지호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반다르 왕자는 경악한 듯 한지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의 시험대가 열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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