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2
5장, 왕자의 난 (1)
리야드 공항의 분위기는 여느 국제공항들과는 사뭇 달랐다.
한지호는 한의학 월드 투어를 다니는 유일무이한 한의사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나라를 대표하는 국제공항을 경험해봤다.
선진국의 공항만 밟아본 것도 아니었다.
런던 히드로 공항이나 미국 LA 공항, 그리고 홍콩 공항을 주로 이용하지만 라오스 비엔티안 공항도 리스트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 공항은 이질적이었다.
시설이 낙후됐고, 공항 규모가 작아서 이상한 게 아니다.
오히려 시설은 선진국의 공항 못지않게 훌륭했고, 관리도 잘 돼 있었다.
그러나 분위기가 엄숙했고, 알아듣기 힘든 아랍어 방송이 귓가를 어지럽혔다.
여자들은 히잡이나 차도르로 얼굴과 몸을 가렸고, 수염을 길게 이른 사우디 남자들은 어딘지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뿐만 아니라 기관총을 든 경찰들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외국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누구든 리야드 공항에 발을 내딛으면 위축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이 문을 지나면 내 역할은 끝이 나게 되겠지요. 후우…….”
입국 게이트 앞에서 양성문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사히 수속을 마치고 캐리어를 찾았지만 진짜 모험은 게이트 너머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사우디 왕가에서 나온 사람들은 한지호를 따로 데려갈 것이다.
양성문은 리야드에서 1박만 한 후 먼저 귀국한다.
그의 선택이 아니라 사우디 왕가에서 양성문의 동행을 허락하지 않은 탓이다.
“소장님이 알려주신 정보가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치료를 잘 해내고 서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한 원장, 꼭 무사히 돌아와야 해요. 반다르 왕자를 치료하고 중동 평화를 이끌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원장의 안위도 그만큼 중요하니까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상황이 허락한다면 틈틈이 연락하겠습니다.”
“그래요. 고맙고 미안해요, 한 원장.”
막상 리야드 공항에 도착하자 양성문도 마음이 약해진 모양이었다.
그러나 한지호는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
자기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성인이라면 당연히 갖춰야 할 자세다.
한편으로는 최악의 사태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오금희를 수련하며 쌓은 한지호의 무공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했다.
현실에서는 쓸 일이 거의 없지만, 무공을 펼치면 특수부대 요원도 어린아이처럼 다룰 수 있다.
만약 억류 될 것 같으면 맨몸으로 사우디 국경을 넘어 카타르나 아랍에미리트에 다다르면 된다.
영화 속 제임스 본드나 제이슨 본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지만, 한지호는 자신이 있었다.
누구도 모르는 최후의 보루가 있기에 사우디 행을 결정하는데 도움이 됐다.
물론 오금희를 의술이 아닌 무공으로 펼쳐야 하는 최악의 사태가 오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나가실까요?”
“그러지, 그래야지요.”
한지호는 캐리어를 끌고 입국 게이트를 통과했다.
자동으로 열리는 입국 게이트가 마치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관문처럼 느껴졌다.
게이트 앞에는 사우디 왕가에서 보낸 안내인과 경호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리야드 공항에 내리는 동양인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한지호와 양성문을 알아보는 건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디렉터 양, 닥터 한.”
진한 콧수염이 인상적인 중년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영어 발음에서 아랍어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분명 어릴 때부터 서양으로 유학을 떠난 사우디의 엘리트일 것이다.
한지호는 그를 쳐다보며 주위를 살폈다.
검은 정장을 입은, 누가 봐도 경호원 티를 내는 중동 남자들이 다섯 명 가량 서있었다.
무식하게 큰 기관총을 든 공항 경찰도 이쪽을 바라볼 뿐 함부로 다가오지 못했다.
아마 왕가에서 나온 사람이라는 티가 나는 모양이다.
“서울에서 보아요, 한 원장.”
“조심히 귀국하십시오, 소장님.”
책임자와 잠시 대화를 나눈 양성문이 다시 한 번 인사를 건넸다.
양성문을 안내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한지호는 그와 악수를 나누고 콧수염 사내를 따라나섰다.
옷과 의료기구가 든 캐리어는 경호원 한 명이 전담해서 들어줬다.
“반갑습니다. 저는 반다르 빈 탈랄 왕자님을 모시는 아지르 무하드 쉐이파입니다. 아지르라고 부르면 됩니다.”
“한지호입니다.”
콧수염이 인상적인 중년인은 걸어가며 자기 소개를 했다.
한지호는 그가 어딘지 서두른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지르는 이름과 소속을 밝힌 것 외에는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저 빠른 걸음으로 공항 입국장을 벗어나 밖으로 나가는데 주력했다.
“타십시오.”
밖에는 검은색 리무진이 서있었다.
의전차량으로 자주 쓰이는 벤츠 S 클래스였는데 유리창 빛깔이 독특했다.
‘방탄 처리가 돼 있어.’
한지호는 방탄 유리를 한눈에 알아봤다.
다른 곳도 아닌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에서 왕위 계승 서열 1위 왕자의 사람들이 왜 이렇게 안전에 신경을 쓰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섣부른 질문은 화를 낳는다.
한지호는 그저 치료를 하기 위해 온 의사다.
말없이 자동차 뒷좌석에 탄 그는 아지르와 나란히 앉았다.
경호원 한 명이 조수석에 탑승했고, 나머지 경호원들은 다른 차에 타서 따라올 것 같았다.
“%#[email protected]%@^!”
아지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아랍어로 운전기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얼핏 듣기만 해서는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부우웅-
곧이어 진하게 방탄 처리 된 벤츠 S 클래스가 미끄러지듯 나아가기 시작했다.
“후우…….”
차가 출발하자 뒷좌석 옆에 앉은 아지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한지호로서는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다만 당황한 티를 내지 않고 포커 페이스를 유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미리 설명을 드렸어야 했는데 급박해서.”
그제야 아지르가 한지호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보아하니 무슨 사정이 있는 게 확실했다.
“위험한 상황이었습니까?”
“2왕자님께서 예정에 없던 공항 시찰을 나왔다고 합니다. 자칫 공항에서 마주치게 되면 곤란해질 수도 있어 급히 모시고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2왕자님이요?”
“반다르 빈 탈랄 왕자님의 이복 동생이십니다. 현재 왕위 계승 서열 2위이시고.”
간단한 설명이었지만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꼬치꼬치 캐묻지 않아도 아지르가 왜 서둘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2왕자 측에 한지호, 혹은 반다르 왕자를 치료할 의사가 도착한다는 소식이 새어나간 것이다.
만약 반다르 왕자가 회복되지 않으면 2왕자는 자동으로 왕위 계승 서열 1순위가 된다.
그렇기에 공항에서 마주쳤다면 말도 안 되는 구실을 붙여 한지호를 억류했을지 모른다.
그게 아니더라도 한지호의 얼굴과 인적사항을 파악해 다른 일을 꾸밀 수 있다.
새삼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분이었다.
양성문에게 설명을 들었지만 진짜 현실이 되니 느낌이 달랐다.
‘잘못하면… 정말 위험해질 수도 있어.’
한지호의 표정에서 뭔가를 읽었는지 아지르가 재빨리 부연을 덧붙였다.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 곧장 반다르 왕자님의 안가로 갈 겁니다. 그곳은 리야드에서 가장 안전하게 지켜지고 있습니다. 닥터 한은 예정대로 치료를 마치고, 무사히 서울로 돌아가게 될 겁니다.”
“반다르 왕자님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양 소장님께 대략적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발병 경위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군요.”
사우디에 도착하기 전까지 많은 게 베일에 싸여 있었다.
반다르 왕자의 증상은 곧 안가에 다다라서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발병 경위를 비롯한 그동안의 경과는 설명을 들어야만 한다.
아지르는 당연하다는 듯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 시작은 대략 3년 전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 열린 국제 회의에 참석하신 후 리야드로 돌아오는 전용기 안이었습니다.”
“기내 발병이군요.”
“갑자기 왕자님께서 호흡곤란 증세를 호소하셨습니다. 기내에 동항한 주치의가 응급 처치를 했지만 호전 되지 않았고, 리야드에 도착해서 입원까지 하게 됐습니다.”
“여기까지만 들어선 원인 불명의 비행 증후군처럼 보이는군요.”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습니다.”
아지르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양성문에게 듣기로 아지르는 반다르 빈 탈랄 왕자를 20년 가까이 수행한 최측근이라고 한다.
그만큼 반다르 왕자에 대한 애정이 각별할 것이다.
정치적으로도 반다르 왕자가 소외되면 아지르의 앞길 또한 막히게 된다.
단순한 주종관계가 아니라 운명 공동체인 셈이다.
한지호는 유별날 정도로 짙은 아지르의 콧수염을 지나쳐 눈동자를 바라봤다.
검은 눈동자 가득 수심이 어려 있었다.
“입원 후 사흘만에 퇴원하신 왕자님은 금방 원래대로 회복한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두통을 호소하며 남몰래 괴로워하셨고, 장거리 비행을 할 때마다 호흡곤란과 발열 등의 증세가 나타났습니다.”
“두통… 그리고 비행기에 타면 반복되는 호흡곤란과 발열이라…….”
“두통도 그냥 두통이 아닙니다. 늘 통증을 수반하고 있지만, 시시때때로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의 두통이 엄습한다고 하십니다. 지금은 증상이 심해져 정상적으로 국무를 수행하기 힘든 지경까지 됐습니다.”
“3년이나 됐는데 치료가 불가능했던 것입니까?”
“처음에는 주치의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사실을 알리지 못했습니다. 왕자님의 발병 사실이 알려지면 사우디 왕가에서 내분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고통을 참으며 비행기를 타고 국외 일정을 수행하셨습니다.”
“병을 숨기고 참느라 더 악화시켰군요.”
“중간 중간 세계적인 의사들을 초빙했지만 원인을 파악하기 힘들었고, 정밀 검사에서도 특별한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와서는…… 아시다시피 부담감을 느낀 의사들이 사우디로 들어오려하지 않는 상황까지 됐습니다. 더 이상 증상을 숨기기 힘들어진 것은 물론이고.”
반다르 빈 탈랄 왕자는 공식적으로 병가를 내고 휴식을 취하는 중이다.
원래라면 그가 수행해야 했을 국제기구 회의 참석 등의 업무는 2왕자와 3왕자 등 배 다른 왕자들이 대신하고 있다.
지금으로선 비행기를 오래 탈 수 없고, 리야드 안에서도 심각한 두통 때문에 나랏일을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당장 오늘내일 생사의 고비를 넘나드는 병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증세는 충분히 심각한 지경이었다.
이대로 병이 깊어지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른다.
게다가 국무 수행 공백이 장기화 될 경우 왕위 계승 서열 순위에서 아예 탈락할 수도 있다.
그것이 반다르 왕자에게는 죽음보다 더 무서운 일이고, 세계적으로는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을 중재할 유일한 정치 지도자가 중동에서 사라지는 셈이다.
‘어딘지 익숙한 증상인데…….’
아지르에게 설명을 들은 한지호는 혼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태의 심각성은 충분히 인지했다.
그런데 반다르 빈 탈랄 왕자의 병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비행기에서 처음 증상이 나타난 것은 이례적이었다.
전용기를 타는 왕자가 이코노미 증후군을 앓을 가능성도 없다.
그러나 전반적인 증상과 발병 양태가 익숙했다.
“곧 도착합니다.”
그사이 한지호를 태운 차는 반다르 왕자의 안가 근처에 다다랐다.
다른 경호원들이 탄 차량도 뒤에서 잘 따라오고 있었다.
한지호는 고개를 들어 운전석 앞을 쳐다봤다.
진하게 썬팅 된 방탄 유리 너머로 으리으리한 궁전이 보였다.
보나마나 저곳이 반다르 빈 탈랄 왕자의 안가일 것이다.
그 순간, 전생에서 가장 강렬한 기억이 불현 듯 떠오르며 현실과 오버랩됐다.
“조조!”
잊고 있던 그 이름, 효웅 조조의 이름이 입밖으로 튀어나왔다.
아지르는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고, 한지호는 눈을 부릅뜬 채 반다르 왕자의 성을 주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