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1
4장, 천의(天醫)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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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로 가겠습니다.”
한지호의 선언은 청천벽력(靑天霹靂)과도 같았다.
특히 서울 원화 한의원과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대소사를 담당하는 박우식은 말 그대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이전에도 한지호는 급박한 해외 일정을 만든 적이 꽤 있다.
세계적으로 이름 높은 유일한 한의사이기 때문에 이해해야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사우디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박우식뿐 아니라 서울의 부원장 문재영, 홍콩의 부원장 바이룽도 난색을 표했다.
이 소식이 원화 아카데미를 함께 운영하는 신영준 회장과 최규열 센터장 귀에 들어가면 또 한 번 난리가 날 것 같았다.
박우식과 문재영, 바이룽은 비슷한 문제제기를 했다.
모두 한지호가 사우디 행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수없이 되물었던 문제였다.
“언제 돌아올 수 있다는 기약 없이 원장님을 어떻게 보내드리겠습니까.”
각각 말투와 내용은 조금씩 달랐지만 뜻은 한 가지였다.
스케줄을 빼는 것은 어렵지 않다.
믿음직스런 부원장 두 명이 서울과 홍콩을 지키고, 나머지 스텝들도 실력이 일취월장 하고 있다.
원화 아카데미 역시 시스템이 자리를 잡았다.
신약 개발은 순항 중이고, 한지호가 자리를 비워도 팀장과 연구진이 일을 게일리 하지 않는다.
신영준 회장과 최규열 센터장도 아카데미를 챙기기 때문에 걱정 할 필요는 없다.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다른 원장들도 각 지역을 대표하는 거물 한의사로 입지를 다진지 오래다.
네트워크에서 한지호의 영향은 절대적이지만, 그가 세계 곳곳으로 의료 투어를 다닌다고 해서 휘청거릴 허약한 시기는 벗어났다.
이만큼 네트워크를 키워놓은 장본인 한지호 입장에서는 더 없이 뿌듯한 일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기약이 없어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다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었고, 그런 우려가 괜한 호들갑은 아니었다.
그러나 결심을 굳힌 한지호를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만약 마리아 수녀이나 유초아가 만류한다면 또 모른다.
하지만 마리아 수녀는 전화 통화로 이야기를 듣고 기도하겠다며 한지호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유초아 역시 불안하고 걱정되지만 한지호의 선택을 언제나 믿는다고 답했다.
그를 말릴 수 있는 두 사람 모두 나서지 않았다.
한지호는 박우식을 비롯한 측근들에게 생각이 바뀌지 않을 것임을 확언해줬다.
“주중 일본대사인 요시모 유타도 내키지 않았지만 한중일 3국의 평화를 위해 치료했습니다. 사우디의 왕위 계승 1순위인 반다르 빈 탈랄 왕자가 회복되면… 당장 수천, 수만 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습니다. 그가 말 한 마디로 분쟁지역에서 군사를 물리기만 해도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외면을 하겠습니까?”
느리지만 진심을 꾹꾹 눌러담아 뱉은 한지호의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박우식은 신약 개발과 원화 정의 네트워크를 지키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항변했지만 기세가 한 풀 꺾였다.
한지호는 박우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내가 조금 늦어져도, 돌아올 수만 있다면 신약 개발과 네트워크는 건재할 겁니다. 그러나 사우디에 가지 않으면 앞으로 중동에서 사상자가 나올 때마다 죄책감에 시달릴 것 같습니다. 하늘이 내게 준 재능을, 축복을 이럴 때 써야하는 게 업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늘이 내린 한의사.
최치우가 했던 말은 한지호의 가슴 깊이 박혀 잊을 수 없는 울림을 선사했다.
그는 스스로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이미 전생을 각성하며 얻은 능력으로 사리사욕만 추구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바 있다.
사우디에서 일정이 지연되어도 무사히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
한지호는 자신을 믿기로 했다.
반다르 빈 탈랄 왕자를 치료할 수 있다고, 설령 일이 잘못 되어도 한계를 초월한 무공으로 탈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운명을 피하지 않는 용기인지 무모한 도전인지 누구도 결론을 내릴 수 없다.
한지호는 염려와 만류를 뿌리치고 비밀스럽게 사우디 행을 추진했다.
보건복지부 장관에서 WHO 아시아 소장이 된 양성문이 그의 사우디 행을 도왔다.
한국 정부도 음지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지호가 사우디 왕자를 치료하기만 하면 한국은 중동 지역 외교에 사용할 수 있는 비장의 카드를 얻는 셈이다.
한국 최고를 넘어 세계 최고의 한의사이자 대체의학 전문가로 우뚝 선 한지호는 정상의 자리에서 가장 위험한 곳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세계적인 의사들이 리스크를 이유로 사우디 왕가의 요청을 외면할 때, 오직 한지호만이 대의를 떠올리며 위험을 무릅쓰려 한다.
하늘이 내린 한의사라는 최치우의 평가가 사탕발림은 아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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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무사히 돌아오셔야 합니다.”
조기운이 한지호의 두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입술을 깨물다시피 다문 표정을 보니 어지간히 걱정스러운 모양이다.
굳이 한지호를 배웅하기 위해 인천공항까지 나온 조기운의 진심이 전해졌다.
한지호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기운아, 너가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어디 죽으러 가는 것 같잖아.”
“워낙 위험한 곳으로 가시는 것 같아서… 솔직히 돌아오실 때까지 제대로 잠이나 잘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할 텐데, 넌 진짜 못 잘까봐 걱정이긴 하다.”
한지호는 멋지게 독립에 성공한 동생을 바라보며 환하게 미소지었다.
조기운이 설립한 HJ 에스코트는 국내 VIP들이 앞장서서 찾는 경호업체로 성장했다.
한지호의 투자와 지원이 있었지만 조기운 스스로 역량을 발휘한 결과다.
바닥에서 시작해 원화 정의 네트워크를 세운 한지호의 곁에서 보고 배운 게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내가 사우디에서 치료에 성공하고 돌아오면 너한테 큰 선물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네,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중동 외교의 물꼬를 터준 대가로 우리나라에 국빈 방문하는 외국 VIP 경호를 HJ 에스코트에 맡기라고 요청할 계획이다. 정부에서도 충분히 들어줄 거야.”
“형님께서 위험을 무릅쓰셨는데 제게 그렇게까지…….”
한지호의 계획을 들은 조기운은 감격했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한지호는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치며 말했다.
“내가 HJ 에스코트 지분을 40%나 갖고 있잖아. 니 회사지만 내 회사기도 해, 임마. 돈 많이 벌고 잘 되면 나한테도 쏠쏠하다고. 그러니까 감동하지마!”
“형님의 마음을 제가 어떻게 한시라도 잊겠습니까. 한결 같은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너는 아직 20대면서 꼭 사극 배우처럼 말하더라. 짜식.”
말은 이렇게 해도 훌쩍 큰 조기운이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한지호는 동생의 충심을 다시 확인하고 고개를 돌렸다.
조기운 옆에는 선글라스와 모자로 얼굴을 반 넘게 가린 여성이 서있었다.
가린다고 가렸지만 묘하게 아름다운 분위기는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유초아다.
데뷔 드라마에 이어 여러 편의 CF와 예능 출연, 그리고 한지호를 모델로 한 한의학 드라마에서 활약하며 핫(hot)해진 여배우 유초아가 직접 온 것이다.
“바쁠텐데 와줘서 고맙다, 초아야.”
한지호와 조기운, 유초아는 공항 구석에 서있었다.
다행히 출국 시간이 늦어져 사람들이 많이 붐비지 않았다.
하지만 혹시라도 유초아의 정체가 드러날까봐 신경이 쓰이는 게 당연했다.
손 꼽히는 신인 여배우로 한창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는 유초아에게 열애설은 득이 될 게 없다.
한지호는 그녀를 좋아하는 만큼 더더욱 지켜주고 싶었다.
막 피어나기 시작한 유초아의 꿈이 자신 때문에 가로막히면 견디기 힘들 것 같았다.
“회사에서는 조심하라고 했지만, 그래도 어떻게 안 나올 수가 있겠어요. 건강하게 다녀와야 해요, 지호 오빠”
“너무 걱정 말고, 수녀님과 아이들한테 잘 말해주고. 혹시 귀국이 조금 늦어져도 별 일 없을 거니까, 알겠지?”
“네. 수녀님과 아이들 잘 돌보고 있을게요. 요즘은 드라마 촬영 끝나서 전보다 더 자주 천사원에 들려요.”
“내가 돌아오면 같이 가자, 천사원에. 그리고…… 수녀님께 말씀도 드리고.”
한지호와 유초아가 마리아 수녀에게 같이 말할 이야기는 하나 밖에 없다.
두 사람이 천사원 출신의 오빠 동생에서 서로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사이가 됐다는 사실을 알려야 했다.
둘은 자주 보지는 못해도 틈이 날 때마다 통화와 메신저로 마음을 키워왔다.
한지호의 말뜻을 알아들은 유초아는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요. 좋아요, 오빠. 그러니까 꼭 빨리 와요.”
“그럴게. 기다리고 있어.”
아쉽지만 너무 오래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출국 게이트 너머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에서 양성문 소장이 먼저 도착해있다.
한지호는 마지막으로 천천히 조기운과 유초아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때 유초아가 손을 내밀었다.
한지호는 주저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온기가 살짝 긴장한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안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의 눈이 있어 포옹이나 키스를 할 순 없지만 이걸로도 충분했다.
“다녀올게.”
한지호는 재빨리 등을 돌렸다.
괜히 무거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싶지 않았다.
위험한 지역에 가는 것이지만 절대 죽으러 가는 것은 아니다.
그는 마치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출국 게이트를 통과했다.
믿음직한 동생과 사랑스러운 여자친구가 공항까지 와줘서 큰 힘을 얻었다.
이제부터는 실전이다.
보안 검색과 출국 수속을 무사히 마친 한지호는 곧장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로 걸어갔다.
퍼스트 클래스 티켓이나 최상위 등급의 마일리지 카드를 가져야만 입장이 가능한 라운지 안에는 양성문이 앉아 있었다.
이곳에서는 정보가 유출 될 염려를 하지 않아도 괜찮다.
퍼스트 라운지를 이용하는 인원이 워낙 적고, 대부분 각 분야의 최정상에 올라 콧대 높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남에게 신경을 기울이지 않는다.
“왔어요? 차가 많이 막히지요?”
“아닙니다, 금방 도착해서 잠시 인사를 나누느라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한지호는 양성문과 마주보고 앉았다.
가죽 소파 사이에 놓인 대리석 테이블이 은은한 조명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양성문은 테이블 위에 국제 신문을 올려놓았다.
방금 전까지 외신의 주요 뉴스를 확인했던 모양이다.
“현지 사정은 좀 어떻습니까?”
한지호는 궁금한 것을 물어봤다.
양성문은 WHO 아시아 소장 자격으로 사우디까지 함께 간다.
하지만 그의 역할은 사우디 입국과 동시에 종료된다.
사우디 왕가에서는 의료진 외에 다른 사람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치료를 원하면서도 무지하게 깐깐한 것이 악명 높은 중동의 종교국가다웠다.
그렇기에 양성문은 라운지와 비행기 안에서 한지호에게 필요한 정보를 전달하며 입국 가이드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공항에서 사우디 왕가 관계자를 만난 이후로는 한지호 혼자 모든 상황을 헤쳐나가야 한다.
이런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한지호는 다짜고짜 필요한 질문부터 던진 것이다.
사우디와 관련된 최신 정보를 하나라도 더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우디 국토 안에서의 군사 분쟁은 거의 일어나지 않고 있어요. 수도인 리야드는 더더욱 안전한 지역이지요. 그러나 안심할 수만은 없는 것이…….”
한지호는 재촉하지 않고 양성문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양성문은 한지호에게 사우디 행을 제안한 사람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열심히 한지호의 사우디 행을 위한 준비를 했다.
양성문이 알려주는 정보라면 신뢰할 수 있었다.
“반다르 왕자가 중태에 빠진 틈을 노려 다른 왕자들이 손을 쓸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워요.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세계적인 의사들이 사우디 행을 거절한 것이니까요.”
“반군이나 외국과의 교전 가능성은 없지만 사우디 내부에서 암살 시도가 있을 수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지요. 만약 다른 왕자들이 나선다면, 과연 반다르 왕자를 암살하려 할지 아니면…….”
“반다르 왕자를 치료하러 온 저를 노리는 게 더 편하고 빠른 길이겠죠.”
한지호는 양성문이 차마 하지 못한 말을 대신했다.
양성문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부탁을 해놓고도 한 원장에게 얼마나 미안한지 모릅니다. 우리 정부와 WHO, 그리고 UN까지 모든 경로를 통해 한 원장의 안전을 보장해달라고 강력히 요청해 놓았어요. 그래도 이 빚은… 역사와 세계가 알아주겠지요.”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결국 선택은 스스로 내린 것이니까. 반다르 왕자를 치료하지 못하면 사우디에 억류 될 가능성이 높겠지만, 그 경우는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왕자들의 위협을 이겨내고 그를 치료한 다음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도록 하죠.”
“그래요, 그래요. 반드시 그래야지요. 그리 될 겁니다, 한 원장.”
“사우디 왕가의 세력도나 주의해야 하는 왕족 리스트 등을 알려주시겠습니까?”
“내가 단단히 준비를 해왔어요.”
한지호와 양성문은 머리를 맞대고 외교가에서 특급 기밀에 해당되는 정보를 공유했다.
이런 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것도 양성문이 있는 인맥 없는 인맥을 다 동원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전, 한지호는 방대한 정보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하나라도 더 기억하는 게 생존 확률을 높이는 길이다.
하늘이 내린 한의사로서 뛰어든 도전은 이미 시작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