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
4장, 천의(天醫) (1)
“보모어 12년입니다.”
검은 정장에 꽁지머리를 한 바텐더가 정중한 자세로 술을 따랐다.
절도있는 태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알고보면 세계 바텐더 대회에서 수상한 유명인사다.
하지만 지금 한지호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고마워요.”
한지호는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그의 재력이면 한 병에 수백만 원, 아니 수천만 원이 넘는 희귀한 위스키나 와인을 얼마든지 마실 수 있다.
그러나 청담동의 몰트 바에서 30만 원 정도에 판매하는 보모어 12년이 제일 좋았다.
“입맛은 참 무서운 것이야. 결국 돌고돌아 보모어인가.”
한지호의 옆자리에는 노인이 앉아있었다.
천하의 한지호에게 혀를 찰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육신은 늙었으되 눈빛은 형형한 평창동 황만금 회장이었다.
태자병을 치료받은 이후 황만금은 건강을 지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해왔다.
그렇게 좋아하던 육식과 술, 그리고 여자까지 절제하며 건강한 노후를 위해 힘썼다.
다행히 하늘이 노력을 외면하지 않아서 황만금의 건강은 나날이 좋아졌다.
태자병에 걸리기 전보다 훨씬 정정해진 황만금은 평창동을 벗어나 무려 청담동까지 행차했다.
이유는 오직 하나, 한지호의 고민을 들어주기 위해서였다.
“회장님께서도 아직까지 청국장을 즐기시지 않습니까.”
“허허허, 그렇지. 온갖 산해진미를 지겹도록 먹었어도 마지막에 생각나는 것은 동네 백반집의 6천 원짜리 청국장이더군.”
“오랜만에 건배나 하시죠.”
“그럽세.”
기다란 바 테이블에 나란히 앉은 한지호와 황만금이 잔을 부딪쳤다.
두 사람의 만남은 다분히 즉흥적인 것이었다.
한지호는 혼자 청담동의 바에서 위스키를 마시는 중이었다.
그런데 황만금이 전화를 걸었고, 한지호의 목소리에서 고민이 묻어나오는 것을 파악한 그가 청담동까지 달려온 것이다.
황만금에게도, 한지호에게도 서로는 특별한 존재다.
태자병을 치료하며 인연을 맺지 않았다면 황만금은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한지호도 황만금의 도움이 없었다면 원화 한의원을 열 생각을 못 했다.
원화 아카데미를 설립하는 과정에서도 황만금은 선뜻 거금을 투자해줬다.
비록 미한약품 신영준 회장의 합류로 투자금이 필요치 않게 됐지만, 한지호가 필요할 때 언제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황만금이다.
원래 사람은 어려울 때 도와줬던 것을 잊지 못한다.
그만큼 한지호와 황만금 사이에는 끈끈한 뭔가가 있었다.
“자, 이제 제법 취기도 올랐을 터이고. 어디 한 번 말해보지. 무엇이 자네를 이리도 고민하게 만들었나?”
황만금이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반쯤 비운 위스키 잔을 내려놓은 한지호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황만금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회장님, 양성문 장관님을 아시죠?”
“보건복지부 장관이지 않았나. 얼마 전 퇴임했고, WHO로 가면서 화제가 됐다고 했지. 잘은 모르나 소문이 나쁘지 않더구만.”
“양 장관님, 아니 이제는 양 소장님께 부탁을 받았습니다.”
“무슨 부탁인가?”
“중태에 빠진 사우디의 왕자를 치료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사우디의 왕자?”
황만금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밑바닥부터 시작해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은 황만금이지만 스케일이 다른 이야기였다.
한지호는 잔에 남아있던 위스키를 한 모금 더 마신 후 설명을 계속했다.
“그것도 왕위 계승 서열 1위라고 하더군요. 사우디 온건파를 이끄는 핵심 인물이고, 중동의 피바람을 잦아들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 합니다. 그를 치료하기 위해 UN과 WHO에서 세계의 명의들을 모으는 중이라는데… 쉽지 않다고.”
“당연히 쉽지 않겠지. 세계적인 명의가 뭐가 아쉬워 중동으로 가겠네. 유럽에서도 테러가 빵빵 터지는 요즘 같은 시국에 말일세. 자칫 치료에 실패하면 사우디에서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고, 혹여 성공한다 해도 대가에 비해 위험부담이 너무 큰 일 아닌가.”
“최악의 경우 사우디 강경파에서 의료진에게 암살자를 보낼 수도 있습니다.”
“허어, 거 참. 그래서 자네는 뭐라고 했나?”
“고민해보겠다고 했습니다.”
“양 장관, 그 사람도 너무하는군. 사지나 다름없는 곳에 와달라는 부탁을 해? 앞길이 창창한 한지호에게!”
다소 흥분했는지 황만금의 언성이 높아졌다.
한지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피붙이 하나 없는 황만금이 자신을 손자처럼 생각하기에 흥분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양 소장님도 무척 조심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WHO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중동의 정세를 위해, 거창하게 말하면 세계 평화를 위해 저를 찾으신 거겠죠.”
“흐음… 자네가 그리 말한다면 틀림이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마음에 안 드네. 한 선생, 자네 어깨에 놓인 짐이 좀 무겁나? 2천억으로 시작해 이제는 5천억 가까이 투자를 받은 원화 아카데미의 신약 개발, 그리고 한의학 체계화, 또 서울과 홍콩에서 목이 빠져라 자네를 기다리는 환자들을 어떻고. 가끔 미국이나 유럽처럼 안전한 곳으로 진료를 다녀오는 거면 몰라도 이런 상황에서 중동이라니……. 거절할 때는 빠르고 냉정하게 하는 법이 좋다네.”
과연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지금 한지호가 처한 현실에서는 황만금의 말대로 냉정하게 거절하는 것이 정답이다.
모샤드 일라이를 치료하러 LA에 갔던 것, 영국 왕실의 부름을 받아 런던으로 날아간 것과는 차원이 다른 요청이었다.
보상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안전이 확보되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게다가 한지호처럼 바쁜 사람에게는 정확한 스케줄이 나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요소다.
반면 사우디로 가게 되면 스케줄을 장담하기 힘들어진다.
현지 사정에 따라 교통편이 얼마나 지연될지 모른다.
혹여 테러에 휩쓸리거나 소규모 교전이 일어나면 중동에서 발이 묶일 수도 있다.
가장 위험한 부분도 남았다.
영국이나 미국 등지에서는 VVIP의 치료에 실패해도 보복을 당하지 않는다.
그런 걱정을 할 필요조차 없다.
하지만 사우디에서 1왕자의 치료에 실패하면, 아마 그를 초청한 1왕자 측 사람들에 의해 보복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
중동의 왕실은 21세기가 됐지만 여전히 중세나 다름없는 세계관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역시 거절하는 게 맞겠죠?”
“그럼, 그럼. 만에 하나를 생각하게. 원화 정의 네트워크에 딸린 식구가 몇이고,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또 몇인가. 자네가 잘못되면 그저 혼자만의 악재가 아닌 것일세.”
황만금은 거듭해서 한지호를 말렸다.
한지호의 마음도 기우는 것 같았다.
“한 잔 더 부탁해요.”
한지호는 바텐더에게 독한 위스키를 재차 주문했다.
어두운 밤, 고민은 밤보다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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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마셨구만.”
걸걸한 목소리가 정겨웠다.
한지호는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고 청담동 빌라 대신 원화 한의원으로 왔다.
이곳에서 바로 샤워를 하고 오전부터 진료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3층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명징 약초의 최치우 사장이 집에 가지 않고 남아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약초 배합을 연구하느라 밤을 새웠다는 최치우를 보니 괜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최치우는 3층으로 들어온 한지호가 과음했음을 단번에 알아봤다.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숙취에 좋은 한방 차를 우려내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최 사장님.”
한지호는 깊은 향이 피어나는 찻잔을 받고 고개를 숙였다.
서울 원화 한의원 3층으로 이전한 명징 약초는 서울 시내 최고의 약재상이 됐다.
원래도 유명했지만,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식구가 되면서 인지도가 급상승했다.
명징 약초를 운영하는 최치우도 덩달아 유명인사가 됐다.
강남의 사모님들 사이에서는 털보 사장이 지어주는 한약과 한방차의 효능이 기가 막히다는 소문이 돈지 오래였다.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정점에 서있는 한지호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최치우 역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거인이다.
그런 최치우도 오직 한 사람, 한지호에게는 모든 것을 다 내줄 것처럼 마음을 보였다.
경동시장 약재 거리에서 한지호를 만난 이후 인생의 새로운 목표를 찾았고, 이전에는 꿈 꾸지 못한 삶을 살아가게 됐기 때문이다.
“어떤가? 속이 좀 풀리지 않나?”
“한 모금만 마셔도 금방 속이 진정되는 느낌이 듭니다. 역시 최 사장님 한방차는 명불허전입니다.”
“커허허, 모두 자네 덕분이지. 우리 한 선생을 만난 이후 나도 약초를 보는 눈이 달라졌지 않은가. 지금은 강남 중심에서 높은 분들에게 대접 받으며 약재를 팔고 있고…… 참 세상 일은 모르는 것일세. 내 인생이 이리 되다니.”
“워낙 실력이 좋으시니 낭중지추는 당연한 이치 아니겠습니까.”
“혼자 늙어가던 송곳을 꺼내준 게 자네, 한 선생이니 그 은혜를 내 어찌 잊겠는가. 커허허허, 오랜만에 둘이 있으니 괜히 말만 많아지는군.”
최치우는 멋쩍은 듯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전속 약재상이 되면서 사회적 지위는 물론이고, 엄청난 부를 쌓게 됐지만 그는 여전히 소탈했다.
경동시장 약재 거리의 털보 사장,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변함이 없었다.
한지호는 최치우가 우려낸 한방차를 마시며 가슴까지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너무 빠른 변화를 몸소 경험하고 있기에 예전 모습을 지켜주는 옛 사람들이 더더욱 고맙고 정겨웠다.
“헌데… 어떤 고민이 있기에 즐기지 않던 술을 이토록 마신 것인가?”
최치우도 한지호가 평소 같지 않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한지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간략하게 고민을 이야기했다.
말이 길어질수록 최치우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그도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일원이다.
한지호가 얼마나 중요한 프로젝트들을 이끌고 있는지 잘 아는 처지다.
그렇기에 양성문의 제안이 위험하다는 것을, 또한 한지호가 느낄 부담감을 단박에 이해했다.
“거 참, 난감한 문제로구만. 단칼에 거절을 하기도 쉽지 않고, 중동으로 가기도 어렵고…….”
“대충 결정을 내렸습니다. 사실 평창동 황 회장님과 상의를 하고 오는 길입니다.”
“어떤 결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감히 한 마디만 해도 되겠나?”
“감히라뇨. 최 사장님은 무슨 말을 해도 되는 사람이잖아요. 제가 특별하게 생각하는 거 아시면서.”
한지호가 눈을 크게 뜨고 대답했다.
단전에 자리잡은 오금희 내공 덕분에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금방 깬다.
게다가 한방차를 마셨더니 생각보다 빨리 정신이 맑아졌다.
최치우의 말을 경청 할 준비는 돼 있었다.
“내가 왜 한 선생에게 끌렸던 것일까 가끔 돌아볼 때가 있네. 물론 숨겨둔 자연산 약초를 찾아낸 천부적 후각, 그리고 청우단을 뚝딱 만든 의술까지, 자네는 약초쟁이라면 누구라도 반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지만. 그래도 그게 다가 아니었거든. 일선에서 은퇴해 후배들이 가져오는 약초나 팔던 내 심장을 미치도록 뛰게 만든 것은 한 선생의 능력이 아니었네.”
“그럼…….”
“자네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거 같았단 말이야. 이게 무슨 말이고 하니, 가진 것 없는 젊은 한의사였지만 땅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느낌이었지. 황당하게 들리는가? 커허허허, 하지만 내가 받은 느낌은 분명 그러했어.”
“하늘을 바라보고 산다. 하늘을.”
“물론 유명해지고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중하지. 허나 그게 전부였다면 지금의 자네, 한지호가 있었겠는가? 항상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무모한 도전에 뛰어들어 침 하나로 세상을 놀래켰던 모습. 그게 바로 한지호의 본질 아닌가 말일세. 원화 아카데미도, 신약 개발도, 지금 자네가 짊어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잊지 않기를 바라네. 주제 넘은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함세.”
울림이 있었다.
최치우의 말이 한지호의 가슴에 파동을 만들어냈다.
잔잔하게 퍼지기 시작한 울림은 점차 커지며 온몸을 휘감았다.
어째서 하늘은 한지호에게 전생을 깨닫게 했는가.
화타와 규호의 의술을 물려받고, 오금희를 수련하게 된 것은 분명 하늘의 뜻이다.
하늘이 돕지 않았다면 십삼대혈법을 펼치지도, 살아남지도 못했을 터였다.
강한 힘에는 강한 책임이 따른다고 했다.
한지호는 특별한 운명으로 선택 받은 만큼 세상을 위해 돌려줘야 할 게 많다고 믿었다.
“어떤 선택을 하건 당당하게. 내게 있어 자네는 하늘이 내린 한의사니까.”
최치우는 진심을 드러내놓고 쑥쓰러운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흠, 차 한 잔 더 내려오겠네.”
한지호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갈팡질팡 하지 않고 결심을 굳힐 순간이 왔다.
술이 깨서인지, 아니면 마음을 정해서인지 한지호의 눈동자가 원래대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