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239화 (239/255)

# 239

3장, 세계를 움직이는 침 (2)

띠이이- 띠이이-

무미건조한 통화연결음이 들려왔다.

생각보다 오랫동안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따지고보면 장관에게 곧바로 전화를 건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니다.

장관과 통화를 하기 위해서는 며칠 전부터 비서를 통해 스케줄을 잡는 게 일반적이다.

물론 한지호는 언제나 양성문과 직통으로 전화를 주고받았고, 이것이 대단한 특혜라는 인식조차 없었다.

그에게는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바쁘신가…….’

연결되지 않는 전화에 한지호가 종료 버튼을 누르려 했다.

간혹 이럴 때가 있었다.

자신도 진료 중이거나 미팅을 하고 있을 때는 양성문이나 신영준이 전화를 걸어도 받지 못한다.

“한 원장.”

그 순간, 수화기 너머 양성문의 음성이 울렸다.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던 한지호는 다시 폰을 귓가로 붙였다.

“장관님, 불쑥 전화드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말을. 나보다 더 바쁜 한 원장이 먼저 전화해주면 늘 반갑지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드라마는 아주 재밌게 챙겨보고 있어요. 남자 주인공이 한 원장보다 인물이 못 한 거 같아서, 허허.”

“바쁘실 텐데 드라마까지… 제가 감사드릴 일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바쁘지 않아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여기 일을 정리하고 있어서 아주 한가합니다.”

예상 외로 양성문 장관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거취를 알린 것이다.

한지호는 기다렸다는 듯 화제를 파고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장관님. 조만간 물러나신다는 이야기가 들려와서…….”

“그렇게 되었어요. 사실 이만하면 꽤 오래 버티고 있었던 거지요. 한 원장이 추위안차오 상무위원을 치료해준 덕택에 이만큼이라도 버텼어요. 내 그 은혜는 평생 잊지 않으리다.”

“제가 장관님께 받은 도움이 더 큽니다. 그럼 혹시 WHO로 가신다는 이야기도 사실인가요?”

“아이고, 그 소식도 벌써 전해졌네요. 맞아요. 국제보건기구의 아시아 소장으로 가게 됐습니다. 이거 참, 말년에 팔자가 핀다고 해야 할까.”

“사실이었군요. 축하드립니다!”

한지호는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장관에서 물러나면 더 이상 올라갈 자리가 없다.

정치인이 되지 않는 이상 관료로서 경험할 수 있는 끝판왕이 바로 장관이다.

그런데 양성문에게는 새로운 길, 그것도 장관보다 더 높은 길이 열린 셈이었다.

UN 산하에서 독자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WHO에 부임하게 됐으니 개인적 차원을 넘어 국가적 경사였다.

“아직까지는 외부에 알려지면 곤란해요. 한 원장이 알아서 잘 하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단속 철저히 하고 있겠습니다.”

“고마워요. 늙으니 노파심만 늘어나는 거 같아서 원, 부끄럽게.”

“제가 여쭤보고 싶었던 것들을 먼저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장관님께서 더 넓은 세상을 위해 일 하실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WHO로 가게 되면 한 원장의 도움이 많이 필요해질 거에요. 원화 아카데미, 그리고 존스 홉킨스에서 얻은 인사이트를 많이 많이 나눠주세요.”

“저야 영광이죠.”

“내 거취가 공식적으로 정리되면 따로 한 번 보십시다. 먼저 전화할게요, 한 원장.”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한지호는 미소를 머금은 채 전화를 끊었다.

현 정부에서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바로 양성문이다.

장관 한 명을 완전한 자기 편으로 두고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른다.

그런 양성문이 세계 보건을 좌지우지하는 WHO로 진출하게 됐다.

아시아 소장이면 한중일 3국을 포함해 엄청나게 넓은 영역을 커버하는 자리다.

국제사회에서의 중요도로는 대통령을 능가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막중한 직책이고, 또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가진 자리다.

한국을 넘어 전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한지호에게는 더 없이 좋은 파트너가 생긴 셈이었다.

실리적인 이유를 떠나서도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잘 되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이다.

같은 뜻을 품고, 서로 도우며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의 성공을 바라보는 기분은 무척 짜릿하다.

혼자만 잘 되어봤자 오래 갈 수도 없고, 그리 기쁘지만은 않기 마련이다.

한지호는 하늘을 뚫고 천외천(天外天)으로 비상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함께 날아오른다는 사실이다.

폰을 내려놓은 한지호는 양성문과의 훈훈한 통화를 곱씹으며 오래도록 미소를 짓고 있었다.

+++

한지호는 오래지 않아 양성문으로부터 다시 연락을 받았다.

공개되지 않은 소식을 접하고 통화를 한 게 3주 전이었다.

그 사이 청와대는 대대적인 개각을 발표했고, 보건복지부 장관에서 물러난 양성문이 WHO 아시아 소장으로 부임한다는 뉴스도 공식화됐다.

장관에서 퇴임하자마자 국제기구의 임원이 되는 경우는 무척 드물다.

그렇기에 정치권을 비롯한 각계각층에서 양성문의 진가를 다시금 인정하는 계기가 됐다.

양성문에게는 요즘이 여기저기서 오는 연락을 받느라 가장 바쁜 시기일 것이다.

그럼에도 한지호에게 전화를 한 것을 보면 단순한 안부 연락은 아닌 듯 싶었다.

“네, 장관님. 이제는 소장님이라고 해야 하겠죠?”

한지호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양성문의 전화를 받았다.

나이 차이는 꽤 나지만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다.

수화기 너머 양성문도 웃고 있었다.

“허허, 아직 부임하기 전이니 그냥 동네 할아버지인 셈이지. 그나저나 바쁠 텐데 내 전화를 바로 받아줘서 고마워요.”

“진료 중만 아니라면 무조건 바로 받아야죠.”

“사실 한 원장과 긴히 의논하고픈 일이 있어요.”

양성문이 톤을 낮췄다.

역시 평범하게 안부를 물으려 전화를 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한지호는 눈을 빛내며 천천히 대답했다.

“WHO에 부임하시는 것과 관련된 일입니까?”

“이거 참…. 역시 한 원장 앞에서는 뭘 숨길 수가 없네요, 없어.”

“제 입이 무거운 것은 장관님께서도 아실 겁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편히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요. 사실 공식 취임은 다음 달이지만 이미 WHO와 함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중동 쪽에서 문제가 하나 터져서…….”

“중동이요?”

“아시아 소장으로 내정 된 나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할 정도이니, 정말 심각한 문제라고 봐야겠죠. 시간이 된다면 한 원장과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괜찮겠어요?”

“물론입니다. 그런데 제가 내일 홍콩으로 출국하기 때문에 장관님 일정이 어떻게 되실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맞춰야지요. 오늘 밤 늦게라도 봤으면 하는데…….”

양성문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 걸 보면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닌 게 확실하다.

한지호는 망설이지 않고 스케줄을 확정했다.

다른 일정이 있어도 미루고 조율하면 된다.

그동안 겪었던 양성문은 실 없는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까지 급히 만나기를 원하는 걸 보면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역삼동에서 진료가 오후 6시쯤 끝납니다. 장관님께서 괜찮으시다면 7시에 저녁 드시며 이야기 나누는 건 어떨까요?”

“아주 좋아요. 그럼 내가 7시까지 강남으로 가도록 할게요, 한 원장.”

“리츠 칼튼 호텔 일식집의 룸을 제 이름으로 예약해 놓겠습니다.”

“배려해줘소 고마워요. 가서 이야기하면 알게 되겠지만, 내 허튼 소리를 늘어놓지는 않으리다.”

“무슨 말씀을 하셔도 좋습니다. 오랜만에 장관님을 뵐 수 있으니까요.”

한지호는 듣는 사람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말로 통화를 마무리했다.

어떻게 보면 아부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한지호는 누구에게 굳이 아부를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똑같은 말이라도 한지호가 하면 진심인 것처럼 전해졌다.

전화를 끊은 한지호는 곧장 박우식 사무장을 호출했다.

급작스러운 저녁 식사가 잡혔으니 다른 일정을 조절해야 한다.

박우식응 호출한 그는 양성문이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해봤다.

‘중동에서 문제가 터졌고, WHO 아시아 소장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할 일이라면…… 국제 분쟁과 관련된 긴급 의료 지원인가?’

중동은 세계의 화약고로 불리는 위험한 지역이다.

이라크 전쟁 이후 대규모 교전은 잦아들었지만, IS와 같은 신흥 테러 세력이 창궐하며 여전히 정세가 어지럽다.

게다가 각 국에서 종교적 내전이 끊이지 않고, 수많은 난민들이 쏟아지는 중이다.

오죽하면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는 미국마저 이라크 전쟁 이후 중동 질서 유지에 손을 놓고 있는 실정이다.

“중동이라, 중동.”

한지호는 혼잣말을 읊조리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아무래도 오늘 진료가 끝날 때까지 중동이라는 단어는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

드르륵-

한지호가 미닫이 문을 열었다.

강남의 지옥 같은 교통정체 때문에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었다.

룸 안에는 먼저 도착한 양성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장관님.”

“허허, 아니에요. 한 원장이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 잘 아는데 이렇게 급히 나와준 것만해도 고맙지요.”

“시장하실 테니 식사와 술은 제가 주문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래요.”

한지호는 가장 비싼 코스와 뒤끝 없이 맑은 사케 한 병을 주문했다.

특별히 대화가 끊기지 않게끔 에피타이저와 메인 요리를 한 번에 올려달라고 부탁했다.

곧이어 종업원들이 한지호의 요청대로 사케와 에피타이저, 메인 사시미를 한 상 가득 올려놓았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 양성문과 이런저런 안부 인사를 나눈 한지호가 술병을 잡았다.

“먼저 한 잔 올리겠습니다. WHO 아시아 소장님이 되신 것,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허허, 다 한 원장이 물심양면 도와준 덕분이지요. 아니었으면 이렇게 무사히 장관직을 수행하지도 못했을 테니.”

덕담이 오가고, 둘 다 사케 한 잔을 단숨에 마셨다.

확실히 앞에 음식과 술이 놓이니 본격적인 이야기를 할 분위기가 조성됐다.

자질구레한 대화는 이미 충분히 나누었다.

한지호는 조심스레 본론을 꺼냈다.

“아침에 전화로 말씀하신 이야기, 중동에 문제가 터졌다고 하신 게 궁금합니다.”

“그게 참……. 결국은 또 정치로 귀결되는 문제이지 말이에요.”

방금 전까지 기분 좋게 대화를 하던 양성문이 한숨을 푹 쉬었다.

말을 꺼내기 전부터 이러는 걸로 봐서 정말 어려운 문제 같았다.

“중동 정세가 불안정하다는 것은 한 원장도 잘 알 것이고, 그 중심에는 시아파와 수니파 사이의 종교 갈등이 있어요.”

“네, 잘은 모르지만 신문 기사를 통해 대략적인 내용은 접했습니다.”

“중동 갈등의 핵심부에 사우디 아라비아가 있는데, 여기는 수니파의 본산이라고 봐도 좋아요. 사우디가 배후에서 중동 곳곳의 수니파 세력을 지원하며 갈등이 끊이지 않는 것이지요.”

“미국이 견제하기도 힘든 상황인가요?”

“사우디의 왕권이 워낙 튼튼하고, 이라크 전쟁 이후 국내 정치에서 동력을 상실한 미국은 쉽사리 끼어들기 힘든 상황이고…… 아무튼 문제는 다른 쪽에서 터졌어요. 사우디의 차기 왕위 계승 1순위 후보는 상당히 온건한 인물이지요. 그가 통치권을 물려받으면 중동의 갈등도 완화될 거란 기대를 할 만큼.”

“듣기만 해도 그가 얼마나 중요한 인물일지 알 수 있습니다.”

한지호는 주중 일본대사인 요시모 유타를 치료해준 적이 있다.

요시모 유타도 동아시아 3국의 평화에 기여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양성문이 말한 사우디의 왕자는 다른 차원에 살고 있다.

그의 정치적 영향력에 따라 수만에서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피를 흘리지 않고 살게 될지도 모른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화약고 중동의 피바람을 잦아들게 만들 인물인 것이다.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사우디에서 왕위 계승 1순위인 온건파 반다르 빈 탈랄 왕자가 2달 전부터 병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에요. 이에 UN과 WHO에서는 세계의 명의들을 수소문하고 있지요. 한 원장, 내가 왜 급히 만나자고 했는지 알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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