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2
11장, 드라이브 (1)
요시모 유타에게 완치 선언과 녹음 파일 선언을 동시에 한 게 이틀 전이다.
그 다음 갑자기 홍콩으로 찾아온 추위안차오는 한지호를 책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박수까지 치며 좋아하고 있었다.
여러 경우의 수를 떠올렸던 한지호가 상상도 못한 반응이었다.
요시모 유타의 약점을 운운하는 걸 보니 자세한 이야기를 듣긴 들은 모양이다.
한지호는 자리에 앉아 그를 쳐다봤다.
추위안차오는 수많은 정적들을 제거하며 중국을 움직이는 8인에 들어간 사람이다.
지금은 서로 우호적인 사이지만 속내를 쉽게 예단할 수 없었다.
“요시모 유타 대사님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한지호는 별 일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질문을 던졌다.
긴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는데, 아직 눈앞의 추위안차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파악하기 전이다.
이럴 때는 신중하게 상대의 카드를 알아보는 게 우선이다.
한지호의 물음에 추위안차오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내가 한 선생을 소개했으니 쪼르르 찾아와 하소연을 하였지. 치료비를 받지 않고 녹음 파일로 협박을 했다면서 말일세.”
“상무위원님께서 소개해준 환자인데 제가 결례를 범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게 최선이었습니다.”
“결례는 무슨, 나도 그놈이 우리 땅에서 파렴치한 짓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네. 공산당 정치인이었으면 사형이지, 사형이야.”
한지호는 자신에게 동조해주는 추위안차오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중국 정치인들은 뇌물이나 부정부패, 성매매 문제가 터지면 엄청난 처벌을 받는다.
심지어 사형을 선고 받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러나 공산당 정치인들이 다른 국가에 비해 청렴한 것은 아니다.
권력자의 눈 밖에 났거나 너무 정도가 심한 경우만 적발될 뿐,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향락과 사치에 쩔어 있다.
하지만 굳이 중국 공산당의 모순을 지적할 필요는 없었다.
추위안차오는 한지호의 묘한 표정을 감지했는지 화제를 돌렸다.
곧장 본론을 꺼낸 것이다.
“한 선생은 빙빙 돌려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
“그런 편입니다.”
“요시모 유타의 녹음 파일, 내게도 넘겨줄 수 없겠나?”
당황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일순 한지호의 마음이 요동쳤다.
중국, 나아가 아시아 최고의 권력자 중 한 사람인 추위안차오의 요청이다.
거부할 경우 어떤 불이익이 주어질지 예측이 어렵다.
어쩌면 대답 여하에 따라 홍콩 원화 한의원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한지호는 일단 숨을 고르기로 했다.
“원본 파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 아니네. 원본은 한 선생이 갖고 있게. 다만 복사한 것이라도 파일을 원하는 것뿐이지.”
“이유를 여쭤본다면 결례일까요.”
“한 선생도 아시아의 평화라는 대의 때문에 요시모 유타를 치료한 것 아닌가? 돈 대신 녹음 파일을 확보한 것도 모두 아시아 3국의 평화로운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이고. 나도 마찬가지라네. 요시모 유타, 그리고 일본 정부가 제대로 일하게끔 안전 장치를 갖고 싶은 것이지.”
명분은 그럴싸했다.
하지만 한지호는 추위안차오의 말 이면에 자리잡은 욕심을 모르지 않았다.
주중 일본대사의 약점이 담긴 녹음 파일은 국제 정치에서 엄청난 무기가 될 수 있다.
추위안차오 입장에서는 군침을 흘릴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카드가 등장한 셈이다.
짧은 순간, 한지호의 고민은 깊고 또 깊어졌다.
사실 마음 편히 녹음 파일을 넘기면 그만이다.
어차피 추위안차오와는 좋은 인연을 맺었고, 파일을 넘긴 대가로 계속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한지호의 선택은 남달랐다.
그는 시간을 질질 끌지 않고 눈을 부릅떴다.
아랫배에 힘을 주고 자기 자신의 의지를 굳건히 다졌다.
“죄송합니다, 상무위원님. 녹음 파일은 드리기 어렵겠습니다.”
“크흐음.”
한지호의 대답이 의외였는지 추위안차오가 헛기침을 했다.
이윽고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혹시 한국 정부에 파일을 넘기려는 것인가?”
“그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아시는 것처럼 치료비를 받지 않고 확보한 파일입니다. 의사로서의 윤리까지 어기면서 말이죠. 그렇기에 녹음 파일은 오직 요시모 유타가 아시아의 평화에 기여하도록 채찍질을 하는 용도로만 쓰고 싶습니다. 조금이라도 다른 의도로 사용 된다면 돈으로 치료비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지 않겠습니까.”
한지호는 정중하지만 확실하게 자신의 뜻을 전달했다.
정치적인 용도로 녹음 파일이 사용 될 우려를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추위안차오는 가타부타 말 없이 한지호를 가만히 쳐다봤다.
과연 그가 한지호의 거절을 빌미로 태도를 바꾸게 될까.
그렇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한지호는 이미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뒀다.
홍콩 원화 한의원은 눈부신 성공을 거뒀고, 한의학으로 동양 전통 의학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중국에 깃발을 꽂았다.
일방적인 규제로 홍콩에서 철수하게 돼도 실패라고 할 수 없다.
그때 추위안차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녹음 파일을 한국 정부에도 넘기지 않겠다고 약속해줄 수 있겠나, 한 선생?”
“약속하겠습니다.”
“하오! 그럼 이것으로 파일 이야기는 그만하도록 하지. 한 선생의 깊은 뜻은 내 충분히 알았으니…. 생명의 은인에게 더 이상 강요를 할 수는 없겠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지호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했다.
추위안차오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그릇이 큰 인물 같았다.
권력을 이용해 무리해서 압박하지 않고 깔끔하게 녹음 파일을 포기했다.
덕분에 한지호의 마음도 한결 편해졌다.
“그거 아는가? 내가 상무위원이 된 다음 뭔가를 부탁했을 때 거절한 최초의 사람이 바로 한 선생이라네.”
“영광… 인 거겠죠?”
“허허, 그리 생각해주면 고맙지. 한 선생은 내 생명을 구한 한의사인데 공연히 정치적인 고민 거리를 안겨줬구만. 나의 과욕이었으니 오늘 일은 잊어주게.”
“네. 계속 의사로만 남겠습니다.”
한지호는 추위안차오와 눈을 맞추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병마와 싸우며 사람을 치료하는 한의사, 그것이 한지호의 본분이다.
한의사로서 명예와 힘을 얻었다고 선을 넘어서려는 순간 스텝이 꼬이게 될 것이다.
요시모 유타를 치료하며 녹음 파일을 확보한 것만 해도 모험이었다.
더 이상은 복잡한 정치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추위안차오가 그의 진심을 알아줘서 무거운 짐을 덜어낸 기분이었다.
‘다시 본래의 자리를 지킨다. 내가 서있어야 할 곳을.’
예기치 못한 의뢰와 치료 덕분에 한지호는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었다.
새삼 침 하나에 담긴 무게가 느껴졌다.
다사다난한 여정의 한 챕터가 저물고, 한중일 3국의 은인이 된 한지호는 또 다른 걸음을 내딛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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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두 가지 안건으로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K-메디컬 타운에 자리잡은 원화 아카데미 5층은 기획 전략실이다.
이곳에서는 중요한 전략적 판단을 내리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한다.
기록실, 약재 연구실, 신약 개발실처럼 직접적인 연구를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기록실과 약재 연구실, 신약 개발실에서 각고의 노력 끝에 만들어낸 성과를 어떻게 활용할지 결정하는 게 바로 기획 전략실의 역할이다.
대리석으로 세팅 된 원탁에는 한지호와 신영준 회장, 최규열 센터장이 앉아 있었다.
원화 아카데미의 주주이자 경영자인 세 사람이 한 자리에 모이는 건 드문 일이다.
그만큼 중요한 보고가 있을 거라는 뜻이었다.
세 사람 앞에서 이야기를 시작한 기획 전략실장도 다소 긴장한 모습이었다.
아무리 베테랑이라고 해도 당연한 일이다.
세 사람 모두 각각의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거물이다.
어느새 국민 한의사를 넘어 국제적으로 한의학계를 대표하게 된 한지호, 미한약품이라는 굴지의 제약회사를 만든 신영준, 그리고 Y대 암센터를 이끄는 최규열까지.
한 명씩 따로 만나도 바짝 긴장해야 하는 게 마땅한 인물들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포커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는 강심장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편하게 하세요, 실장님.”
한지호는 기획 전략실장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 한 마디가 힘이 됐을까.
고개를 끄덕인 기획 전략실장이 브리핑을 시작했다.
“먼저 기록실의 연구 성과 현황입니다. 기록실에서는 한의학 치료를 체계화시키는 작업을 계속 해오고 있습니다. 이번 달을 기점으로 1차 백서 정리가 끝나는 만큼, 면밀한 검토와 함께 언론 홍보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후에는 각 지역 한의대 및 의대와의 자료 공유를 통해 기록실에서 만든 백서를 바탕으로 한의학을 체계적인 학문으로 인정받게 만드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1차 백서의 범위는 어느 정도인가?”
한지호는 진행 상황을 세세하게 보고 받았지만 최규열과 신영준은 달랐다.
최규열의 질문에 실장이 곧바로 대답했다.
“원화 정의 네트워크 소속 한의원의 진료 내역와 처방을 레퍼런스로 삼았고, 우선 기초 질환 치료만 다뤘습니다. 희귀병과 난치병을 다룬 2차 백서 정리는 1차 백서의 공용화 작업이 끝난 다음 시작 할 예정입니다.”
관련자가 아니라면 알아듣기 힘든 말이지만 신영준과 최규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화 정의 네트워크에 소속된 한의원에서 감기나 몸살, 발열 등 기초적인 질병을 한의학적으로 치료하고 처방한 내역을 총 정리한 게 1차 백서라는 뜻이다.
이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이제껏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일을 원화 아카데미 기록실에서 해냈다.
기초 질환이라고 해도 체계적인 진료와 처방 기록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천지차이다.
1차 백서가 공식적인 인정을 받아 각 지역 한의대와 의대에 교재로 활용되기 시작하면 어떤 변화가 생길까.
한의학을 근본 없는 민간요법이라고 비하해온 사람들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물론 한의학계 스스로 그런 비난을 자초해온 바가 없지 않다.
한지호는 원화 아카데미에서 발간하는 백서를 뿌리로 삼아 한의학이 튼실한 열매를 맺길 원했다.
이제 그 위대한 첫 걸음을 뗀 셈이었다.
“주요 한의대 학과장과 교수들로 구성된 검증단을 만들어서 1차 백서를 검토하면 공신력이 더해지겠죠. 검증단 섭외는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그럼 검토가 끝나자마자 곧장 한의대 교재로 사용하는 것도 수월해지겠군.”
“그렇습니다. 남자라면 모름지기 일석이조를 노려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한지호는 신영준 회장과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결코 간단치 않았다.
한의대 교수들로 구성 된 검증단이 1차 백서를 인정하고나면 일대 파란이 일 것이다.
“언론 홍보는 실장님 선에서 기획서를 올려주세요.”
“네, 원장님.”
한지호는 홍보에 대한 지시까지 내린 후 기획 전략실장을 지긋이 바라봤다.
두 번째 안건으로 보고를 이어가라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눈치 빠른 기획 전략실장은 지체하지 않고 PPT 화면을 넘겼다.
이를 지켜보던 신영준과 최규열의 표정도 밝아였다.
그들이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프로젝트, 마황을 이용한 신약 개발 성과에 대한 보고였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는 신약 개발에 대한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1차에 이어 2차 부작용 제어 실험도 통과했습니다. 이사회에서 동물 실험 여부를 승인해주시면 최대한 빨리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자세한 설명을 원하시면 4층의 신약 연구실장님이 올라오실 겁니다.”
기획 전략실장은 군더더기를 싫어하는 한지호의 스타일대로 핵심만 콕콕 찝어서 보고를 했다.
중요한 대목은 단 하나였다.
2차 부작용 제어 실험도 무사히 통과했다는 것이다.
동물 실험 이후에는 임상 실험에 돌입하고, 이후 상용화 단계로 나아간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신약 개발이 이뤄지고 있었다.
초기 단계에서 한지호가 마황을 이용하자는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낸 게 큰 도움이 됐다.
한지호, 신영준, 최규열.
세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지금 이 순간, 나이도 경력도 배경도 모두 다른 세 명의 뜻이 하나로 모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