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6
8장, 한중일(韓中日) (1)
상무위원, 상무위원.
대체 그게 얼마나 대단한 직위이길래 독을 타서 상대를 죽이려 들까.
한지호는 아직까지 정치에 깊은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그렇기에 중국 공산당의 상무위원이 가지는 권력을 100%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추위안차오의 달라진 스케일을 보니 까마득히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홍콩 시내 특급 호텔의 대연회장을 통째로 빌렸다.
수백 명이 넉넉히 들어와서 행사를 진행할 수 있는 규모였다.
그럼에도 대연회장 중앙의 광활한 원탁에는 단 두 사람만 앉았다.
바로 추위안차오와 한지호였다.
원탁 맞은편에 앉은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족히 10M는 될 것 같았다.
대화를 나누기 위해 평소보다 목소리를 살짝 키워야 할 정도다.
붉은색 나무로 만들어진 원탁과 호텔 직원들이 정성스레 서빙해 놓은 산해진미.
거기에 중국 최고의 명주라는 마오타이주가 화룡점정을 찍었다.
한지호는 추위안차오의 등 뒤에 세워진 병풍을 쳐다봤다.
병풍에는 여의주 8개를 다 모은 황금빛 용이 하늘 높이 승천하고 있었다.
금색 실로 일일이 자수를 놓은 것이다.
그 용이 마치 추위안차오를 상징하는 기분이었다.
1대1 미팅을 다른 도시도 아닌 홍콩의 특급 호텔 대연회장을 빌리려서 하는 것, 단순히 돈이 많다고 되는 아니다.
5성급 호텔에서도 아무에게나 이런 특전을 제공할 리 없다.
국가 수반급 대우를 받는 상무위원의 요청이기에 군말 없이 따르는 것이다.
“한 선생,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니 더 없이 즐겁네.”
“건강하신 모습을 보니 저도 기쁩니다.”
동글동글 복스럽게 생긴 추위안차오의 얼굴은 예전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화독에 중독 당했던 경험이 그를 일깨웠고, 이후로는 건강 관리에 더욱 힘을 썼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일을 겪지 않고 순탄하게 상무위원이 됐다면 권력에 취해서 몸이 망가졌을지 모른다.
그렇게 보면 중독 증세로 죽기 직전까지 내몰렸던 게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합법적으로 정적을 축출해내고, 건강도 살뜰히 챙길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한지호는 과연 인생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는 것을 추위안차오를 보며 다시금 느꼈다.
“홍콩에 올 때마다 한 선생을 보고 싶었지만, 선생도 이리저리 바쁜 듯 하여 오늘에야 시간을 냈네. 격조했던 것을 이해하게.”
“별 말씀을요.”
“먼저 한 잔 같이 하지 않겠나? 안주도 간단히 내오라 했는데 입에 맞을지 모르겠군.”
추위안차오가 잔을 들었다.
비정상적으로 큰 원탁을 사이에 놓았지만 한지호도 마찬가지로 잔을 들었다.
둘은 허공에다 잔을 부딪쳤다.
직접 건배를 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마치 홍콩 느와르 영화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크으- 좋구만!”
“천하제일의 명주라고 불릴만 합니다.”
마오타이주를 처음 마신 한지호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중국을 대표하는 명주답게 독특한 풍미가 입안 가득 오래오래 맴돌았다.
그에 어울리는 안주들도 추위안차오의 말처럼 간단히 차린 수준이 아니었다.
금 가루를 뿌린 캐비어, 트러플로 맛을 낸 전복 구이, 통째로 푹 찐 송이버섯 등 세계 최고의 음식들이 저마다 향을 뽐냈다.
한지호는 추위안차오가 자신과의 미팅을 위해 얼마를 썼을지 궁금했다.
술과 음식값, 거기에 대연회장 대관료를 합하면 겨우 2시간 이내를 위해 최소 수천만 원을 썼을 것 같았다.
물론 하늘의 나는 새도 떨어트리는 상무위원에게 잘 보이기 위해 호텔에서 편의를 제공했을 수도 있다.
많이 엄격해졌다고 해도 중국은 아직까지 그런 게 통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말이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술과 안주로 분위기가 풀어지자 추위안차오가 본론을 꺼내려 했다.
사소한 이야기는 아닐 게 확실하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대소사를 주관하는 상무위원이 잡담이나 나누자고 이런 자리를 마련했을 리 없다.
한지호는 추위안차오의 연락을 받았을 때부터 예상을 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아주 중요한, 어쩌면 아주 부담스러운 일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위기와 기회는 함께 오는 법.
한지호 덕분에 목숨을 구하고 하늘 위 권좌에 앉은 추위안차오가 어떤 씨앗을 물고 왔는지 두고 볼 일이었다.
“당연히 극비이네만, 주중 일본대사의 건강이 많이 좋지 않아서 걱정이네.”
“주중 일본대사라면… 작년에 새로 취임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연말에 왔으니 이제 몇 달 되지 않았네.”
한지호는 국제 뉴스에서 관련된 소식을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요시모 유타 대사가 취임한 이후 중일관계가 부드러워졌다는 뉴스는 한국 방송에서도 가끔 다루는 소재였다.
그런데 알려진 것과 달리 그의 건강 상태가 심각한 모양이었다.
“요시모 유타는 우리에게도 아주 중요한 인물이고, 향후 일본의 총리가 될 가능성도 농후해. 친중, 친한파로 유명하지. 만약 그가 건강 문제로 대사에서 물러나면 나도 골치가 아파진다네.”
“그렇군요.”
“한 선생이 한 번 봐줄 수는 없겠나?”
섣불리 대답하기 힘든 문제였다.
추위안차오의 부탁을 거절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하필이면 환자가 일본 공무원이자 정치인이다.
중국도 그렇지만, 한국에서도 일본을 향한 감정은 여전히 나쁜 편이다.
특히 상대가 일본 고위 공무원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한국인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한지호는 여러모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추위안차오도 그런 부분을 모르지 않았다.
“이제 무조건 일본이라면 덮어놓고 싫어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보네. 요시모 유타는 그동안 중국과 한국에 반성하는 멘트도 많이 해놓았지. 만약 한 선생이 그를 치료한 게 알려져도 화를 입진 않을 걸세.”
“환자를 가리는 것은 의사의 도리가 아니죠. 하지만 자칫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될 까 걱정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당연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내가 한국 정부에 먼저 양해를 구해주면 되겠는가?”
“주중 일본대사, 그러니까 요시모 유타라고 하셨죠. 이 사람이 건강을 회복해서 자리를 지키는 게 아시아 평화에 도움이 되는 일입니까?”
한지호는 추위안차오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단순히 그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도움이 되느냐는 다소 도발적인 질문을 했다.
그 누구도 감히 중국의 상무위원 앞에서 이런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11억 인구를 움직이는 8명의 지도자 중 한 명이다.
그러나 한지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상무위원이 아니라 상무 할아버지라고 해도 확인할 게 있다면 당당히 물어볼 수 있다.
그 옛날, 효웅 조조와 기라성 같은 장수들 앞에서 할 말을 다 쏟아냈던 규호의 기백 그대로였다.
현실의 한지호는 조조를 닮은 효웅 조준혁을 넘어서며 규호를 앞질렀다.
그렇기에 추위안차오를 마주하고도 위축되기는커녕 오히려 강렬한 기운을 뿜어냈다.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관계 개선에 큰 도움이 될 사람이네. 그것이 바로 아시아의 평화 아닌가?”
추위안차오도 한지호의 질문을 피하지 않았다.
확실한 대답을 들은 한지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잔 하시죠, 상무위원님.”
“그렇다면…….”
“외교적으로 오해를 사지 않도록 한국 정부와 사전 접촉을 해주십시오. 그럼 언제든 환자를 보겠습니다.”
“하오!”
추위안차오는 저도 모르게 중국어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는 이미 일이 다 해결됐다는 듯 달아오른 표정으로 술잔을 높이 들었다.
“천하의 명의 한 선생이 도와준다니 내 걱정거리가 사라졌네. 치료가 잘 끝나면 한중일 삼국이 한 선생을 은인으로 모시게 될 터야!”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일일 뿐입니다. 당연한 일을 하는 것인데 은인이라는 표현은 부담스럽습니다.”
“그래도 엄연한 사실 아닌가. 이제까지 한중일 삼국에서 모두 추앙 받는 의사가 있었나? 한국과 중국 인민들은 이미 한 선생을 무척 대단하게 여기니 마지막으로 일본 차례가 돌아왔다고 생각해주게.”
추위안차오는 벌써 요시모 유타가 완치라도 된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환자를 직접 보기 전까지는 제아무리 의성이라고 해도 장담을 할 수 없다.
한지호는 그저 부드럽게 웃으며 마오타이주로 바싹 마른 입안을 적셨다.
어쨌거나 이로서 일본의 대사, 차차기 총리 후보로 거론되는 고위 공무원을 치료하게 됐다.
추위안차오의 말이 과장이 아니라면 아시아의 평화에 기여하는 일이다.
치료의 대가로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는 묻지도 않았다.
한지호는 더 이상 치료비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이름만으로 보증 수표가 되는 한의사가 됐기에 자잘한 부분은 신경쓸 필요가 없어졌다.
클래스가 다르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한 잔 더 하면서 편하게 들지. 한 선생 덕분에 내가 여러번 사네.”
추위안차오가 호탕하게 웃었다.
만약 주중 일본대사를 치료하면 한지호는 두 번에 걸쳐 중국 상무위원의 은인이 되는 셈이다.
돈으로도 안 되는 일을 부탁할 수도 있다.
한지호는 미소를 머금은 채 빈 잔을 채웠다.
사실 한중일 삼국의 은인이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살짝 뛰었었다.
역사상 그런 업적을 이룬 한의사나 의사는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전무후무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탐내는 일이다.
한지호는 단지 유명해지는 게 아니라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불빛이 꺼지지 않는 홍콩의 밤처럼 그의 앞길도 계속해서 반짝일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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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과 서울.
국제적인 두 도시에서의 순간 순간이 쏜살같이 한지호를 스치고 지나갔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매너리즘에 빠지기 십상이다.
서울 홍콩, 홍콩 서울.
이렇게 반복을 하다보면 나는 누구이고 여긴 어디지, 라는 상념에 빠기 쉽다.
환자 한 명 한 명에게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야만 바쁜 스케줄 안에서 자기자신을 지킬 수 있다.
중국 각지에서 몰려든 환자들을 치료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온 한지호는 두 가지 소식을 접했다.
먼저 원화 아카데미 신약 개발실에서 추가 예산 집행을 위한 보고서가 올라와 있었다.
개발실장은 스스로 말한 기한을 한 시간도 어기지 않았다.
철두철미한 미한약품 신영준 회장이 총애하는 엘리트답게 빈틈 없는 모습이었다.
보고서를 검토한 한지호는 망설이지 않고 도장을 찍어줬다.
부작용 제어 2차 실험과 동물 실험에 소요될 비용까지 미리 당겨서 집행한 것이다.
서류 결재 한 번으로 수십억 원의 예산이 투입되게 생겼다.
수십 억 원이면 정말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한 평생 편하게 살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돈이다.
그런 돈을 수시로 집행해야 한다.
사람들이 괜히 연구개발비를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과 비교하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연구개발비를 쓰지 않는 회사는 절대 오래 생존할 수 없다.
제약회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분야를 막론하고 R&D에 얼마나 투자하느냐에 따라 그 회사의 미래를 짐작할 수 있다.
시원하게 예산 집행을 마친 한지호는 또 다른 소식에 마음을 가다듬었다.
추위안차오가 비공식적인 루트로 한국 정부와 접촉했고, 최선의 배려를 얻어냈다.
외교적 문제를 염려 할 필요 없이 주중 일본대사 요시모 유타를 치료하게 된 것이다.
그 문제와 관련해서 한지호는 보건복지부 장관 양성문의 전화를 받았다.
한지호를 각별히 아끼는 양성문은 단기간에 자신의 외교 역량 총동원한 것 같았다.
“한 원장, 이번 일… 정부에서도 주시하고 있지만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되어요.”
“네, 장관님. 막중한 책임을 졌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도 중국 상무위원의 간청을 외면할 수는 없었겠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걱정되는 게 이만저만이 아니랍니다.”
“귀 기울여 듣겠습니다.”
“급하게 알아본 바에 의하면 주중 일본대사의 병세가 평범한 수준이 아니라고 해요. 숨기고는 있지만 벌써 외교가에는 소문이 쫙 난 모양이라서, 쯧쯧.”
“혹시 어떤 병인지 알려진 바는 없었습니까?”
“100% 확인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민망한 병이라는 말이 돌고 있어요.”
“민망한 병이요?”
한지호가 폰을 귀에 댄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민망한 병.
수많은 질병을 접했지만 쉽게 연상되는 게 없었다.
그때 양성문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큼큼, 약물로 치료가 불가능한 중증의 성병이라고…….”
“아, 이런.”
한지호는 반사적으로 탄식을 흘렸다.
장관과 통화를 하는 중인에도 어쩔 수 없었다.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부담을 떠안았는데 하필 성병이라니, 뭔가 사리에 안 맞는 것 같았다.
한지호와 양성문 모두 전화기를 붙잡고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난감한 상황에 둘 다 말을 잃었다.
그렇게 무거운 침묵이 이어져 한지호의 부담을 배가 시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