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224화 (224/255)

# 224

7장, 최선 (1)

“무옥이는… 어케 됐더래요?”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에서 다시 만난 미스터 케이가 백무옥의 근황을 물어봤다.

공항으로 가기 직전, 게스트하우스 벙커 앞에서 그를 만난 한지호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반드시 국경을 넘어 태국에 무사히 도착할 겁니다. 그리고 서울에서 다시 보게 되겠죠.”

“총에 맞았다는 상처는…….”

“왼쪽 허벅지의 통증 일시적으로 무마시키고, 편법으로 근육을 강화시켰습니다. 태국에 도착해서 제대로 수술을 받아야겠지만, 한 번 더 국경 탈출을 시도하는데 무리는 없을 겁니다.”

“고생 많았수다. 정말 고생이 많았수, 한 선생.”

“비엔티안에서 더 많은 탈북자들을 돌보지 못해서 아쉬를 따름입니다.”

한지호의 솔직한 속내에 미스터 케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부리부리한 눈을 빛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말 마시라우. 비엔티안의 동무들이 한 선생에게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알면 깜짝 놀랄 거요. 거기다 위험한 시골 마을로 가서 무옥이까지 치료해줬으니 내래 한 선생을 평생 은인으로 모시갔어.”

“우리도 언젠가 한국에서 다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이 담긴 한지호의 말에 미스터 케이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속을 가늠하기 힘든 웃음이었다.

미스터 케이가 기다리는 사람이 언제 비엔티안에 올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기약 없는 기다림을 겪는 미스터 케이의 웃음은 산전수전 다 겪은 한지호의 마음도 아프게 만들었다.

“한 선생, 내 진짜 이름은 김갑수라우.”

“김갑수. 그 이름, 기억하겠습니다.”

“내가 설령 고향 땅을 밟지 못해도… 한 선생은 기억해주라우. 여기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한지호는 미스터 케이, 아니 김갑수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 낯선 도시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책임지며 살아가는 사내.

그의 이름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희생하는 이들이 있기에 세상에 돌아간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것이다.

“날래 가보라우. 비행기 놓치갔어.”

“또 봅시다. 어디서든.”

다음을 기약하는 말에 김갑수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한지호는 등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다.

더 있다가는 발을 떼기가 점점 힘들어질 것 같았다.

한참을 걸어서 벙커가 있는 뒷골목을 빠져나온 한지호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라오스에서 보낸 시간이 꿈만 같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의료 봉사를 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위해 온 것이었다.

하지만 각자의 현실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나니 마음이 새로워졌다.

어쩌면 삶의 의미를 운운하는 것도 사치일지 모른다.

주어진 자리에서 목숨을 걸고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결과를 이뤄내야 한다.

전생을 각성하고 부여 받은 기회는 그야말로 천재일우(千載一遇)였다.

감사함을 잃고, 매너리즘에 빠지면 천벌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공항으로 가는 택시를 잡은 한지호의 입매가 단단하게 자리잡혔다.

서울로 돌아가면 할 일이 많다.

한의학을 체계화 시키고 신약 개발을 추진하는 것,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현대 의학과 더불어 동양의 전통 의학으로 올바른 혜택을 보게 만드는 것.

이 모든 게 한지호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다.

최선을 다해 사명을 이루다보면 규호가 부르짖었던 것처럼 천하를 다스리는 자리에 자연스레 올라 있을 것 같았다.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은 아프리카나 아시아 극빈국에 봉사를 다녀온 후 오히려 얻은 게 더 많다고 말한다.

한지호도 라오스에 와보기 전에는 그런 말들이 이미지 관리용 가식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정말이었다.

험난했던 의료 봉사를 통해 그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값진 가치를 발견했다.

1주일의 진료비, 몇 억 혹은 수십 억이 될 수도 있는 돈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비안티안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나서도 한동안은 라오스가 그리울 것 같았다.

동시에 서울과 홍콩, 그리고 세계를 무대로 펼쳐질 새로운 삶이 한층 더 기대되는 바였다.

뜨거운 가슴을 안고 21세기 의성 한지호가 서울로 귀환하고 있었다.

+++

서울로 돌아온 한지호에게 휴식 시간은 없었다.

청담동 초호화 빌라의 거실에 놓아둔 리클라이너 소파는 당분간 무용지물이 될 것 같았다.

그가 소화하는 스케줄은 인기 정점을 찍은 아이돌 스타 못지않았다.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라운지에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한지호는 곧장 역삼동으로 향했다.

서울 원화 한의원은 어느덧 여러 명의 한의사들이 근무를 하는 대형 병원이 됐다.

대학 병원이나 종합 의료기관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한의원 업계는 대부분 1인 원장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런 현실에서 볼 때, 문재영 부원장을 비롯해 5명이나 되는 스텝 한의사를 고용한 서울 원화 한의원의 규모는 절대 작은 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3층의 명징 약초도 원화 한의원 소속이다.

전용 약재상을 따로 가진 한의원 역시 손에 꼽을 정도다.

한 때나마 국내 한의학계를 장악했던 위천 한방병원은 브랜드 가치가 급락하며 무너졌다.

전통의 강자인 영동 한의원이 남아있지만 명성이 예전만 못하다.

결국 원화 정의 네트워크 소속 한의원들이 국내를 주름잡는 형국이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역삼동 M 타워에 자리잡은 서울 원화 한의원을 포함해서 네트워크 소속 한의원은 전부 수도권에 위치했다는 점이다.

지방에 거주하는 한자들은 원화 정의 네트워크에서 진료를 받고 싶어도 방법이 없다.

현재로서는 환자가 직접 수도권으로 와서 진료를 받는 게 유일한 방법이다.

한지호는 위천의 사례 때문에 무분별한 프랜차이즈 확장에 거부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지방 환자들의 권리를 위해서라도 원화 정의 네트워크를 확대시켜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하게 됐다.

“원장님! 얼굴이 새까맣게 타셨어요!”

역삼동에 도착하자 직원들이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라오스의 뜨거운 태양을 맞았기에 얼굴이 탈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굵직한 이목구비가 피부색이 검어지자 더욱 시원하게 부각 됐다.

한지호는 1주일 넘게 못 본 직원들과 인사를 나눈 다음 원장실로 들어갔다.

원장실에서 하얀 가운을 챙겨입자 기다렸다는 듯 노크 소리가 울렸다.

똑똑-

“원장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밤 비행기를 타고 아침 일찍 인천에 도착했기에 아직 환자들이 몰려오기 전이다.

사무장 박우식과 부원장 문재영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밀린 보고를 올리려 했다.

공항에 도착한 게 불과 2시간 전이니 정말 쉴 틈 없이 스케줄이 진행되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의 탓도 할 수 없었다.

1주일 넘게 스케줄을 빼서 LA와 라오스에 다녀온 한지호가 스스로 감당해야 할 부분이다.

그의 갑작스러운 일정 이탈에도 묵묵히 서울과 홍콩, 그리고 K-메디컬타운의 한의원을 지켜준 사람들에게 고마워 할 따름이었다.

“자, 시작해볼까요? 비행기에서도 이 순간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한지호는 활짝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복잡한 보고를 받는 건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지호는 무슨 일을 하든 울상이 아닌 웃는 얼굴로 하겠다고 다짐했다.

피부가 검게 탄 것 말고도 약간 달라진 모습을 느낀 것일까.

살짝 고개를 갸웃거린 박우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전에 보고드렸던 지방 사업 검토 계획서입니다. 네트워크의 다른 원장님들이 분석한 코멘트도 추가로 첨부했습니다. 참고로 최 원장님께서 가장 열성적으로 지방 한의원 확대에 찬성하고 있습니다.”

“음… 괜찮은 후보군은 있나요?”

“지역으로는 광주와 부산 중 한 곳에 우선적으로 시범 운영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두 지역에서 이미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규모 면에서 밀리는 원장 1인 한의원 몇 곳을 추려냈습니다. 그 중에 최 원장님과 박 원장님의 지인이 운영하는 곳도 있지만, 별도 표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평판이 괜찮은데 운영 상 한계를 느끼는 곳이라면 우리 네트워크와 시너지를 낼 수 있겠죠. 사실 지방에서 버스와 기차를 타고 올라와 진료를 받는 환자들을 보면 마음이 편치 않았었습니다. 나도 전향적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네, 원장님.”

박우식이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한지호는 프랜차이즈 사업으로 돈을 벌 생각이 없었다.

그런 의도로 원화 정의 네트워크를 만든 게 아니었다.

다만 실제 현장에서 지방 환자들의 고충을 느끼다보니 생각이 조금씩 달라지게 됐다.

위천 한방병원과 달리 확실하게 중앙의 통제와 관리를 받는 시스템을 구축한다면 지방 거점 한의원을 만드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을 듯 싶었다.

만약 한지호가 결단을 내리면 원화 정의 네트워크는 또 한 번 크나큰 도약을 하게 된다.

매우 중요한 내용이 담긴 보고서를 전달 받은 한지호는 문재영을 쳐다봤다.

박우식의 보고가 끝났으니 이제 부원장 문재영의 차례였다.

“원장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동안 제가 특진 환자들을 담당했고, 새로 합류한 스텝들이 일반 예약 환자들을 맡았습니다. 다행히 특별한 컴플레인은 없었고, 원장님 특진을 기다리겠다는 환자분들은 우선 예약으로 순서를 빼놓았습니다.”

“컴플레인이 없었다니 대단한데, 다들. 약 처방은 어떻게 했어요?”

“스텝들 처방전까지 제가 직접 검토했고, 조금 난해한 경우는 최 사장님의 자문을 구했습니다.”

“역시 최고. 약재 처방에 대해서는 최 사장님만큼 노하우를 가진 분이 드무니까 많이 배워두면 좋을 겁니다.”

한지호는 엄지를 치켜 올리며 문재영 부원장을 칭찬해줬다.

자신이 없는 동안 스텝 한의사들과 직원들을 잘 이끌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진료를 하다보면 언제든 컴플레인이 발생할 수 있다.

그보다 3층 명징 약초의 최치우 사장에게 자문을 구한 게 더 마음에 들었다.

한의사라는 자존심을 내세우면 약재상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약초와 약재에 대해서라면 최치우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전문가다.

쓸데없는 자존심을 버리고 그에게 도움을 구한 태도가 만족스러웠다.

조용하고 내성적이지만 머리는 누구보다 좋은 문재영은 한지호가 어느 포인트에서 칭찬을 한 것인지 이해하고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박 사무장님과 문 부원장이 최선을 다해줘서 너무 너무 고맙습니다. 여러분 덕분에 나도 미국에서, 또 라오스에서 최선을 다하고 마음 편히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런 말 쑥스럽지만, 여러분들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겁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물론 너무 잦은 칭찬은 진심 없는 사탕발림으로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진정성 가득한 칭찬은 듣는 사람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넣는다.

한지호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나름대로 고생하며 서울 원화 한의원을 지킨 박우식과 문재영은 뿌듯함을 넘어 감동을 느꼈다.

장수는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을 위해 목숨을 건다.

한지호는 스스로 군주의 그릇임을 증명하며 함께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원장님!”

그때였다.

오랜만의 보고가 훈훈하게 마무리 되어가는 찰나, 원장실 바깥에서 조민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울 원화 한의원의 수 간호사인 조민주도 한지호에게 용건이 있는 것 같았다.

어차피 보고를 다 받았기에 그녀가 들어와도 상관없었다.

“들어와요.”

“원화 아카데미에서 전화가 왔어요. 원장님 폰으로 연락을 했는데 확인이 없으시다고 해서요.”

“아, 보고를 받는 중이라 무음으로 해놓았습니다.”

“그럼 제가 한의원으로 온 전화 원장실로 연결해드릴게요.”

“고마워요.”

한의학의 체계화와 신약 개발을 담당하는 원화 아카데미에서 먼저 한지호를 찾는 경우는 흔치 않다.

한지호는 묘한 기대감을 안고 박우식과 문재영을 내보냈다.

곧이어 서울 원화 한의원으로 걸려왔던 전화가 원장실로 연결됐다.

“한지호입니다.”

“대표 원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전화를 한 사람은 4층 신약 개발실의 실장이었다.

그의 목소리를 확인한 한지호의 기대감은 더욱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2층 기록실의 실장이나 3층 약재 연구실의 실장이었다면 이처럼 가슴이 뛰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신약 개발을 주도하는 4층 실장이 아침부터 한지호를 찾은 것이기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무슨 일… 입니까?”

“에페드린과 슈도에페드린의 부작용 제어 반응 실험 결과가 나왔습니다.”

한지호의 눈이 커졌다.

비행을 마치고 즉시 한의원으로 달려오느라 쌓인 피로가 일시에 풀리는 기분이었다.

에페드린과 슈도에페드린은 마황의 주 성분이다.

실험 결과에 따라 마황을 이용한 신약 개발이 탄력을 받을 수 있다.

“결과가 어떻던가요?”

“동물 실험을 거쳐야하지만 1차 부작용 제어에 성공했습니다.”

한의원만 아니었다면 한지호는 하늘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이제 겨우 첫 번째 스텝을 내딛은 것이지만 위대한 발전이었다.

라오스에서 좋은 일을 하고 왔기에 하늘이 선물을 준 것일까.

한지호는 터져나오는 환호성을 참으며 대답했다.

“진료를 마치는대로 아카데미에 가겠습니다. 만나서 자세한 보고를 받도록 하죠.”

“네, 대표 원장님. 신영준 회장님께도 연락을 드린 다음 보고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신약 개발실장의 음성이 이렇게 듣기 좋은 줄 미처 몰랐었다.

한지호는 원화 정의 네트워크와 자신의 앞날에 새로운 장이 열리는 느낌을 받았다.

늘 똑같지만 매번 다른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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