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223화 (223/255)

# 223

6장, 일단 뛰어! (2)

처억.

라오스 경찰이 배낭 안에서 뭔가를 잡았다.

한지호는 더 이상 빼도박도 못 하게 됐다고 직감했다.

스으으윽-

팔을 꺼낸 경찰의 손에는 침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급한대로 배낭 밑에 깔아놓은 케이스를 용케 잡은 것이다.

백무옥은 침 케이스를 보자마자 움직임을 취하려 했다.

아마 총을 찾아서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지호는 달랐다.

그는 강렬한 눈빛으로 백무옥의 경거망동을 제지시켰다.

“이거… 뭐야?”

라오스 경찰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한층 더 깊이 한지호와 백무옥을 의심하는 티가 났다.

절체절명의 순간, 한지호는 두 가지 선택지 앞에서 고심했다.

이대로 오금희를 펼쳐 경찰들을 때려 눕히느냐, 아니면 한 번 더 기지에 몸을 맡겨 보느냐.

고민은 길지 않았다.

경찰에게 폭력을 행사하면 한지호와 백무옥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

하지만 라오스에 있는 탈북자들은 더더욱 삼엄해진 경계 태세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최대한 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두 번째 답안지를 선택한 한지호는 침착한 얼굴로 입술을 뗐다.

“한국에서 컨디션 조절을 위해 가져온 겁니다.”

“컨디션 조절? 이걸로?”

라오스 경찰은 의심의 기미를 거두지 않았다.

그러나 한지호의 설명을 들어볼 작정인 것 같았다.

이것만으로도 가능성이 있다.

다행히 한의학에 대한 지식이 없기에 다짜고짜 한지호를 의사로 확신하진 않았다.

한지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계속했다.

“그 안에 든 걸로 손바닥을 누르면 속도 편해지고 기운도 납니다.”

최대한 알아듣기 쉽게 영어 단어도 잘 골라서 썼다.

괜히 어려운 의학 용어를 썼다간 의심이 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철컥-

라오스 경찰이 케이스를 열었다.

케이스 안에 가지런히 정리 돼 있는 침을 본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저 길고 짧은 바늘에 불과하다.

무기로 쓸 수도 없고, 의료 기구로 보기도 애매하다.

정말 한지호가 설명한 것처럼 컨디션 조절을 위한 민간요법 도구 정도로 보였다.

한지호는 라오스 경찰의 리더로 보이는 사람이 망설이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괜찮다면 시범을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시범?”

“체하거나 속이 더부룩했다면 바로 효과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래? 정말이지? 안 그래도 어제부터 배탈이 났었는데.”

라오스 경찰이 눈을 가늘게 뜨고 한지호를 쳐다봤다.

리더가 관심을 보이니 다른 곳을 수색하던 경찰 두 명도 몰려들었다.

한지호는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경찰이 잡고 있던 침 케이스를 돌려받았다.

다행히 라오스 경찰은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케이스에서 장침 두 개를 꺼낸 한지호는 라오스 경찰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양 손바닥을 활짝 펼쳐 봐요.”

“이렇게?”

경찰이 양 손을 내밀었다.

한지호는 아주 간단한 침을 놓을 생각이었다.

대신 침에 오행의 기운, 오금희의 정수를 담아 즉각적인 효과를 끌어낼 것이다.

배탈을 진정시키고 속을 편하게 하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로 해낼 수 있다.

라오스 경찰 세 명은 짐작도 못 하지만, 오지의 허름한 집에서 만난 한지호는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의성이다.

꾸욱-

먼저 오른손바닥 정중앙에 침을 놓았다.

오금희의 기운이 실린 침이기에 통증이 느껴졌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오스 경찰은 미간만 찌푸릴 뿐 제법 잘 참았다.

한지호는 왼손바닥 정중앙에도 똑같은 침을 놓았다.

양 손에 놓자마자 효력을 체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한지호가 누군가.

청우단이라는 환단으로 강남과 여의도의 직장인들을 평정했던 장본인이다.

즉각적인 체감 효과를 만들어내는데 그보다 더 뛰어난 한의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10초만 같이 세어 봅시다.”

느긋하게 말을 한 한지호가 손가락을 꼽기 시작했다.

10, 9, 8, 7…….

손가락이 하나씩 줄어들 때마다 라오스 경찰의 표정이 변하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동료 경찰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3, 2, 1.

한지호의 마지막 손가락이 접힐 때, 침을 맞은 라오스 경찰의 얼굴은 놀라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가스가 차있었는데 수욱 내려가는데? 이거… 대체 뭐야?”

“한국에서 흔히 쓰는 건강요법입니다. 그렇게 특별할 건 없어요.”

한지호는 의식적으로 자신의 침술을 격하시켰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여야 괜한 의심을 피하는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뭔데? 왜 그래?”

“이거 맞으니 더부룩하던 속이 편해졌어. 거짓말처럼.”

“진짜? 진짜 그 잠깐 사이에?”

라오스 경찰들이 서로 웅성거렸다.

한지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조마조마했지만 두 번째 선택이 맞아떨어졌다.

침을 맞은 경찰은 의심 대신 신기한 감정에 흠뻑 빠진 것 같았다.

그를 바라보는 나머지 경찰 두 명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이곳에선 이틀만 더 버티면 된다.

백무옥은 거처를 옮기거나 곧바로 국경 탈출을 시도할 것이다.

큰 문제 없이 지금 한 순간만 넘어가면 되는 셈이다.

“나는 머리가 계속 아픈데, 한 번씩 엄청 쑤시고. 이런 것도 해결이 되나?”

다른 경찰이 한지호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한지호는 짐짓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제가 의사도 아니고……. 근본적인 해결이야 어렵지만 약간 개선은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부러 엄살을 떨었다.

라오스 경찰 세 명은 한지호의 의도대로 완벽히 넘어왔다.

집 구석에서 언제 총을 꺼내야하나 얼굴이 질려있던 백무옥은 그저 멍하니 한지호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지호는 경찰들 몰래 백무옥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이게 전세계의 VIP들을 상대하며 익힌 노하우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라오스의 이름모를 시골 마을에 있는 안전가옥에서 맞닥뜨린 위기가 넘어가는 듯 했다.

한지호의 기지가 아니었다면 심각한 상황이 펼쳐졌을 것이다.

이렇듯 천신만고 끝에 한지호와 백무옥에게 이틀이라는 귀중한 시간이 주어지고 있었다.

+++

“하나, 둘! 하나, 둘!”

한지호는 마치 트레이너가 된 것처럼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그가 절도있게 부르는 숫자에 맞춰 백무옥은 땀을 뻘뻘 흘렸다.

벌써 천금 같은 하루가 지났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백무옥은 좁은 집 안에서 제자리 뛰기를 하는 중이었다.

걷는데는 무리가 없지만 뛰는데 장애가 되던 왼쪽 허벅지의 통증이 가신 것일까.

이를 악물로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을 보면 꽤나 고통스러운 것 같았다.

그래도 이만큼 통증을 참아내며 뛰는 연습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장족의 발전이다.

“잠깐, 잠깐만 쉬고. 진짜 죽을 것 같아서 그래.”

“그러다 진짜 강에서 총 맞고 죽으려면 어쩌려고?”

한지호는 일부러 독한 말을 내뱉었다.

고작 하루지만 백무옥과 정이 들었다.

20대 초반의 창창한 청년이 국경을 탈출하다 허무하게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한지호의 냉정한 말에 백무옥이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한다, 해!”

“한 번만 더 하고 좀 쉬자, 무옥아.”

“알겠어.”

“자- 하나, 둘! 하나, 둘!”

또 다시 구령에 맞춰서 제자리 뛰기를 시작한 백무옥의 얼굴이 결연해 보였다.

말은 안하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한지호는 이틀 안에 근본적인 치료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었다.

백무옥의 왼쪽 허벅지는 제대로 외과 수술을 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지금은 시간도, 환경도 따라주지 않는다.

결국 한지호와 백무옥은 함께 도박을 하기로 했다.

침술을 이용해 일시적으로 감각을 마비시키고, 허벅지 근육을 자극시켜 쌩쌩하게 만드는 것이다.

일시적인 방법이지만 어쩔 수 없다.

당장 라오스 국경을 넘어 태국에 발을 디디고 난민 지위를 인정받으면 다시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물론 한지호는 충분히 경고를 했다.

흉터를 치료하지 않은 상태에서 왼쪽 허벅지에 무리를 주는 것이기에 심각한 부작용이 따를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무엇으로도 백무옥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이미 온가족을 잃은 백무옥은 더 이상 잃을 게 없다고 믿었다.

목숨을 걸고 남한에 도착해야만 가족들의 생사를 알아낼 수 있다.

사실 북송된 가족들을 영영 다시 보지 못할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도 남한에 가야 한다.

온가족의 꿈을 자신이라도 이뤄야 하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알기에 한지호도 더욱 악착같이 백무옥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1초, 1초 흘러가는 시간이 너무나 아쉬웠다.

“오케이, 이제 좀 쉬자.”

한지호의 사인이 떨어지자 백무옥은 기다렸다는 듯 주저앉았다.

가뜩이나 더운 라오스의 날씨, 에어컨 없이 고장나기 직전의 선풍기만 돌아가는 집 안.

땀범벅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휴식을 취할 때도 마냥 쉴수만은 없다.

한지호는 앉아있는 백무옥을 쳐다보며 침을 들었다.

“알지? 누워.”

“또?”

“또가 어딨어. 내가 떠나기 전까지는 잠자고 밥 먹을 때만 빼고 무조건이야.”

한지호의 말에 백무옥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대자로 뻗었다.

짧은 반바지만 입고 있어서 왼쪽 허벅지의 징그러운 흉터가 훤히 드러났다.

한지호는 누워있는 백무옥에게 다가가 침을 놓았다.

“으으윽!”

“참아. 익숙해질 때도 됐잖아.”

한지호의 표정은 포커페이스였다.

하지만 백무옥을 다독이는 목소리에는 따뜻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짧고 굵은 운동으로 근육을 뜨겁게 만든 다음 환부 주위의 민감한 혈도에 침을 놓기 때문에 아픈 게 당연하다.

이런 식으로 담금질을 계속 하면 적어도 며칠 동안은 원래보다 더 강력한 힘을 낼 수 있다.

더불어 흉터에서 느껴지는 고통도 상당 부분 마비시키는 게 가능하다.

당연히 장기적으로 몸에 좋을 리 없는 치료다.

치료라고 불러야 할지도 애매하다.

그러나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방법에 하나밖에 없을 때는 일단 우직하게 돌파하고 나서 다음을 생각해야 한다.

한지호와 백무옥은 그런 점에서는 통하는 게 있었다.

만약 환자인 백무옥이 버텨내지 못한다면 절대 시도할 수 없는 치료 방식이다.

한지호는 또 하나의 장침을 허벅지 깊숙이 찔러 넣으며 속으로 기도를 했다.

‘제발… 제발 이 놈을 한국에서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세요.’

티는 내지 않아도 백무옥이 살아서 대한민국으로 돌아오길 그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하늘에 기도를 하며 침을 다 놓은 한지호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15분 동안 꿀 같은 휴식 취해라, 무옥아.”

“알었어, 형.”

백무옥은 어느새 저도 모르게 한지호를 형이라고 불렀다.

한지호는 조금 놀랐지만 굳이 기쁜 모습을 보이지 않고 혼자 씨익 웃었다.

그는 허벅지에 침을 꽂고 누워서 가쁜 호흡을 몰아쉬는 백무옥에게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백무옥.”

“왜?”

“국경 넘어 태국에서 난민 신청하면 한국까지 오는데 몇 달 걸리지? 와서도 탈북자들은 따로 교육 오래 받아야 되고.”

“그렇다고들 하더라. 근데 왜?”

“교육 다 끝나면 서울에 원화 한의원이라고 있으니까 찾아와라. 내가 말해둘 테니까, 찾아와서 니 이름만 말해.”

“원화 한의원?”

“그래, 절대 잊지 말고 기억해. 알겠지?”

“뭐 대단한 한의원이라도 되나보네. 잘난 척은.”

백무옥은 또 다시 싸가지 없게 말했지만 소리를 내지 않고 원화 한의원의 이름을 되뇌고 있었다.

한지호는 백무옥이 원화 한의원의 휘황찬란한 전경을 보고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치열하게 백무옥을 몰아붙여야 한다.

치료인지 수련인지 모를 시간은 라오스에서 태국까지 백무옥을 죽어라 뛰게 만들 것이다.

한지호는 모든 게 열악한 이곳에서 백무옥과 함께 보내는 순간이 행복하게 느껴졌다.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느낌.

너무 빨리 성공의 열매를 따먹으며 잠시 잊었던 그 느낌을 회복하는 중이었다.

당연히 치료비는 받을 수 없지만, 백무옥을 한국에서 만나게 되면 100억이 입금된 것보다 더 뿌듯할 것 같았다.

“15분 다 됐다. 침 뽑을 테니까 바로 일어서서 또 뛰어야지.”

이윽고 한지호가 허벅지에 놓아둔 침을 뽑으며 엄포를 놓았다.

단 한 번의 질주를 위한 준비.

그 뜨거운 시간이 무르익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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