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222화 (222/255)

# 222

6장, 일단 뛰어! (1)

백무옥이 속옷만 입고 누워있었다.

그는 노크를 하는 손님에게 대뜸 총구를 겨누고, 다짜고짜 반말부터 날리는 기가 쎈 녀석이었다.

북한을 탈출해서 험하디 험한 육로 루트로 라오스에 왔고, 여기서도 목숨을 걸고 국경 도하를 시도하는 사람이니 기가 쎈 게 당연했다.

하지만 아무리 독해도 한지호 앞에서는 얌전해질 수밖에 없다.

그는 환자를 다루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단순히 치료를 한다고 해서 마스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의사지만 거친 환자 앞에서 쩔쩔 매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질병 이전에 인간을 알아야 한다.

눈앞의 환자는 어떤 타입인지, 무엇을 두려워하며 무엇에 예민한지.

짧은 시간 병과 함께 인간 타입을 파악하면 다스리지 못 할 환자가 없다.

한지호는 짐짓 거칠고 사나운 태도의 백무옥에게서 공포를 엿봤다.

이대로 영영 국경을 넘지 못하고 다른 가족들처럼 강제로 북송되면 어떨까 하는 공포.

다친 허벅지가 회복되지 않으면 어떨까 하는 공포.

또 지난 번 국경 탈출 과정에서 총에 맞았기 때문에 과연 다시 도전할 수 있을까 하는 공포까지.

상처입은 맹수 같은 겉모습은 내면의 공포를 숨기기 위한 장치였다.

한지호는 백무옥의 허벅지에 남겨진 총상뿐 아니라 심리적 공포까지 꿰뚫어 봤다.

지피지기를 해냈으니 20대 초반의 백무옥을 손바닥 위에서 다룰 수 있었다.

“내가 말했지? 아무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허벅지 상태가 좋아질 거라고. 우선 첫 침술로 몸이 얼마나 반응하는지 살펴보자.”

한지호가 긴장한 백무옥을 다독였다.

그의 왼쪽 허벅지에는 보기 싫은 흉터가 새겨져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총알이 허벅지를 관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피부 표면을 스치며 근육에 상처를 낸 정도였다.

정상적인 치료를 받았다면 총상이라고 해도 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곳이 라오스, 그것도 의료 시설이 전무한 외딴 시골 마을이라는 점이다.

설령 수도 비엔티안에 가도 총상 치료를 받기는 힘들었을 터였다.

신분이 불안정한 탈북자들은 병원에 갈 수 없다.

그렇기에 한지호가 게스트하우스 벙커에서 수많은 환자들을 음성적으로 돌봐줬던 것이다.

원래라면 큰 문제가 아니었을 가벼운 총상이 징그러운 흉터로 발전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백무옥이 탈북자이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새삼 같은 민족인 탈북자들이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음을 절절히 깨달았다.

그는 엉망으로 엉겨붙은 상처 부위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후우-.”

“왜 재수없게 한숨을 쉬고 그래?”

“넌 한참 형한테 말버릇이 참……. 근데 니 말이 맞다, 무옥아. 지금은 한숨이나 쉬고 있을 때가 아니지.”

한지호는 실제 친형님처럼 백무옥을 어르고 달랬다.

속옷만 입고 누워서도 한 손에서 절대로 총을 놓지 않는 20대 초반 청년의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다.

한지호의 눈에는 백무옥이 상처 입은 어린 짐승처럼 애달파 보였다.

“아플지도 모른다.”

“아픈 거 못 참을까봐?”

“그래, 꾹 참아라.”

말을 마친 한지호가 침을 들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흉터가 자리잡은 곳 바로 옆에 장침을 놓았다.

꾸우욱-

기다란 침이 절반 넘게 허벅지 살을 뚫고 파고들었다.

통증이 느껴지는 혈도를 건드렸기에 백무옥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백무옥은 강한 척 자신을 무장하지만 여느 20대와 다를 바 없는 청년이다.

무진장 아프면서도 뱉은 말이 있어서 억지로 참는 게 티가 나갔다.

한지호는 망설이지 않았다.

시간을 오래 끌면 환자에게 더 큰 고통을 주게 된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게 속전속결로 침을 놓는 편이 낫다.

꾸욱! 꾸욱!

흉터를 중심에 놓고 사방을 침으로 찔렀다.

단순히 고통을 주기 위해 장침을 놓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상처를 입은 환부 주변의 감각이 얼마나 살아있는지, 그리고 안으로 곪아들어간 총상의 여파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기 위함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백무옥은 척추까지 전해지는 고통을 느꼈다.

“욱! 우으읍……!”

그가 참지 못하고 꽉 깨문 입술 사이로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피가 맺히도록 입술을 세게 깨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쩌면 처음 총을 맞았을 때보다 더한 통증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원래 상처는 치료하지 않고 놔두면 놔둘수록 더 심각해지는 법이다.

한지호는 심각한 얼굴로 손 끝에 느껴지는 감각을 분석했다.

침으로 혈도를 자극할 때마다 백무옥의 몸이 보내는 사인이 전해진다.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면 한의사 자격이 없다.

대부분의 한의사들은 침만 놓을 뿐, 환자의 몸이 보내는 사인을 읽지 못한다.

그러나 고대의 의술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한지호는 환자 몸의 신호에 귀를 기울이는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팠지?”

“그렇게 당연한 걸 왜 물어!”

백무옥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이전처럼 목소리가 앙칼지지도 못했다.

흉터 주위에 연달아 침을 맞으며 식은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통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일정 레벨 이상의 고통은 사람의 진을 빼놓는다.

지금 백무옥도 진이 빠진 상태였다.

한지호는 금방 침을 뽑으며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다행인 건 니가 어떤 상태인지 내가 금방 파악했다는 사실이지. 보자마자 불안한 걸음걸이를 통해 왼쪽 허벅지 부상을 알아냈고, 방금 전 침을 놓으며 환부의 근육과 혈도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도 봤고.”

“그럼… 고칠 수 있는 거야?”

통증이 조금 가신 것일까.

백무옥이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질문을 던졌다.

한지호는 남한으로 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목숨을 건 막내 동생뻘의 백무옥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할지 난감했다.

괜히 빙빙 돌려 말하면 희망고문이 될 것이다.

역시 이럴 때는 있는 그대로 말하는 수밖에 없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고칠 수 있겠지. 제일 좋은 건 지금 당장 외과 수술을 받는 건데 여기선 불가능하고.”

“수술?”

“수술이라고 해서 심각한 건 아니고, 간단한 외과 처치 정도. 남한에 도착하는데 성공하면 무조건 흉터를 보여주고 수술부터 받아야 한다고 말해.”

“그건 국경을 넘어 태국에 간 다음에나 생각할 일이지…….”

백무옥이 말끝을 흐렸다.

그도 남한에 가는 게 쉽지 않은 일임을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포기하기는 이르다.

시간이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방법을 찾을 수 있다.

한지호는 한계 앞에서 무기력하게 고개를 돌리는 타입이 아니었다.

“일단 한 번 해보자. 제대로 된 치료는 불가능하지만, 잠깐이나마 왼쪽 허벅지와 다리로 전력질주를 할 수 있게끔 만들 수도 있으니까.”

“정말, 정말 그게 가능해?”

“이틀 동안 집중한다면… 다시 한 번 라오스 국경을 탈출하는 시도는 해볼 수 있겠지. 물론 너가 남한 생활을 대비해 서울말을 익힌 것처럼 죽어라 노력한다면 말이야.”

“할게! 나 정말 뭐든 할 수 있어! 한 번만 더 도전해볼 수 있다면. 저번에도 강을 절반 가까이 넘었는데 총알이 스치는 바람에…….”

“일시적으로 왼쪽 다리의 근력을 폭발시킬 수 있게 해줄 테니까, 저번에 아까웠다면 이번에는 국경을 넘을 거다. 자신감을 가져, 백무옥.”

한지호는 어느새 백무옥에게 희망을 불어넣고 있었다.

당장 왼쪽 허벅지의 상처를 완치할 수 있다는 희망은 주지 못해도 국경을 넘는다는 희망은 주고 싶었다.

그 희망이 사라지면 지금껏 독하게 달려온 백무옥의 짧은 인생이 의미를 잃기 때문이다.

“만약 남한으로 가게 되면…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

백무옥이 수줍은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얼굴보다 총구를 먼저 맞댄 채 처음 만난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한지호는 환자인 백무옥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기분이 좋다기보다는 막중한 책임감이 느껴졌다.

만약 이틀 동안 왼쪽 허벅지를 충분히 회복시키지 못한다면, 그래서 백무옥이 국경을 탈출하다 잡히거나 죽기라도 한다면 두고두고 죄책감에 시달릴 것 같았다.

그런 기분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기적을 만들어야 한다.

똑똑똑-

그때였다.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막 침술의 고통에서 벗어난 백무옥의 얼굴이 다시 창백해졌다.

“뭐, 뭐지?”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손에 잡은 총을 들고있는 모양새도 불안했다.

한지호는 기척을 죽이며 백무옥을 진정시켰다.

“놀라지 말고 총부터 숨겨. 얼른 옷 입고.”

“어떻게 하려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얼른 움직이기나 해!”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백무옥에게 지시를 내린 한지호는 후다닥 침을 정리했다.

쿵쿵쿵!

그 사이 노크 소리는 거세게 문을 때리는 소리로 변해갔다.

백무옥의 거처를 찾아온 사람들이 그리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진 않을 것 같았다.

한지호는 침 케이스를 배낭 가장 밑바닥에 밀어넣었다.

허접하지만 다른데 숨길 곳이 없었다.

방금 전 사용한 침도 한데 묶어 케이스와 함께 배낭 바닥에 깔았다.

그런 다음에야 현관으로 가서 목소리를 높였다.

“후 얼 유?”

“폴리스! 오픈 더 도어!”

예상대로, 혹은 예상보다 더 안좋은 일이 벌어졌다.

라오스 경찰들이 들이닥친 것이다.

옷을 챙겨입고 총을 숨긴 백무옥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동안 용케 국경과 가까운 시골 마을에 숨어 살았는데, 이대로 붙잡혀 강제 북송을 당하게 되는 것일까.

온갖 불안과 절망이 백무옥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한지호는 낙담하지 않았다.

호랑에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날 구석이 보인다고 했다.

그는 선조들의 옛말을 가슴 깊이 되뇌이며 현관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듣기 싫은 소음과 함께 오래 된 나무문이 활짝 열렸다.

머리를 짧게 깎고,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한 경찰 세 명이 문틈으로 들이닥쳤다.

한지호는 두 손을 들고 저항 할 뜻이 없음을 밝혔다.

오금희를 펼쳐 무력으로 경찰 셋을 제압해봐야 일만 더 커진다.

무공을 쓰는 건 정말 최후의 순간일 때 생각할 수 있는 카드다.

아직은 이르다.

한지호의 눈빛을 받은 백무옥도 두 손을 가슴께로 올렸다.

다행히 눈치는 제법 빠른 모양이었다.

리오스 경찰들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집 안 구석구석을 훑었다.

그렇지만 딱히 주목할 세간 자체가 없었다.

싸구려 침대와 부엌의 주방 기구, 거실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한지호의 배낭, 그리고 옷장에 걸린 백무옥의 몇 안 되는 옷가지들이 전부였다.

“후 아 유?”

백무옥이 그랬던 것처럼 라오스 경찰도 어설픈 발음으로 한지호를 몰아붙였다.

그러나 한지호는 당황하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 유창한 영어로 대답했다.

“트래블러. 배낭 여행자입니다. 이 친구는 비엔티안에서 휴가를 왔고, 나는 여행을 와서 잠시 신세를 지는 겁니다.”

“여권은?”

“여기 있습니다. 내 친구는 비엔티안에 있는 집에 여권을 놔두고 왔습니다.”

한지호는 품에서 여권을 꺼내 경찰에게 건네주며 변명을 했다.

신분증이 없는 백무옥을 지키기 위해 머리를 굴린 것이다.

라오스 경찰은 뭔가 꼬투리를 잡겠다는 눈초리로 한지호와 백무옥을 번갈아 쳐다봤다.

아마 마을 주민이 낯선 외지인의 방문을 경찰에 알린 모양이었다.

백무옥은 깜짝 놀라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한지호가 나서서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

말로 구슬려 경찰들을 보내거나 아니면 무력을 쓰거나, 선택지는 둘 밖에 없었다.

한지호의 여권을 확인한 경찰들이 이번에는 배낭으로 다가갔다.

집 안에서 체크를 할 만한 것은 두둑한 배낭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라오스 경찰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배낭 맨 밑에 깔아둔 침만 들키지 않으면 된다.

뾰족한 침을 발견하면 반드시 용도를 물어볼 것이다.

그래서 한의사라는 게 들키면 일이 복잡해지고, 결국 무력을 쓸 수밖에 없다.

한지호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배낭을 뒤지기 시작한 라오스 경찰을 쳐다봤다.

다른 경찰은 백무옥의 옷장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짧지만 지옥 같은 이 시간이 무사히 끝나야 남은 이틀 동안 백무옥의 다리를 치료할 수 있다.

한지호는 마른 침을 삼키며 라오스 경찰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부스럭-

경찰의 팔이 배낭 안으로 쑥 들어갔다.

‘걸렸나?’

순간 한지호와 라오스 경찰의 눈이 딱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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