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
5장, 스파이 닥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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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로 이동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낡은 버스로 비포장도로를 거슬러야 했지만 불평은 사치다.
한국에서는 진즉 폐차 시켰을 오래 된 버스도 라오스에서는 쓸만한 교통 수단이다.
특히 여러 사람들 틈에 낑겨서 가지 않아도 된다는 점만 해도 사치를 부리는 셈이었다.
미스터 케이는 한지호의 편안한 이동을 위해 작은 버스 한 대와 기사를 마련해줬다.
녹록치 않은 형편인데도 최선을 다해 배려를 해준 것이다.
한지호는 그의 상황과 마음을 알기에 울퉁불퉁한 길 위에서 거칠게 흔들리는 버스를 감사히 여겼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가는 내내 멀미를 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한지호의 균형 감각은 멀미를 딴 세계 이야기로 만들었다.
그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겼다.
비엔티안을 벗어나니 금방 시골이 펼쳐졌다.
개발 열풍이 몰아치고 있는 수도 비엔티안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아예 다른 나라에 온 것도 같았다.
게스트하우스 벙커가 있는 뒷골목이 우리나라의 70년 대, 그리고 신도시가 90년대를 연상시킨다면 라오스의 시골은 아예 50년대 이전을 닮아 있었다.
“아름답지만 사람들은 힘들겠어.”
한지호는 울창한 밀림을 연상시키는 풍경에 마냥 감탄하지 않았다.
개발되지 않고 보존된 자연은 물론 아름답다.
그러나 그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삶은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 것이다.
기술과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의료, 교육, 식수, 전기 등등 온갖 분야에서 시골의 사람들은 소외 당하게 된다.
한국의 시골도 지방격차에 시달리는데 라오스의 이름모를 마을은 오죽하겠는가.
생각해보면 이런 오지에 숨어들어 국경 탈출을 시도하는 환자가 새삼 대단하게 여겨졌다.
“20대 초반의 남자라고 했었지.”
한지호는 미스터 케이에게 들은 정보를 머릿속에서 다시 맞춰봤다.
탈북 후 육로 루트로 라오스까지 온 20대 초반의 청년, 백무옥.
듣기로 함께 탈북한 그의 가족들은 모두 중국 공안에게 체포되어 강제로 북송 됐다고 한다.
가족의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실질적으로는 소중한 사람들을 전부 잃은 청년이다.
그가 왜 총을 맞은 다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국경 탈출을 시도하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남한에 도착해야만 정당한 신분을 회복하고 북송당한 가족들의 소식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따지고 보면 탈북자들 중에서 가슴 아픈 사연이 없는 사람도 드물다.
미스터 케이도 누군가를 기다리며 이역만리 라오스 땅에서 탈북자들의 보호자로 살아가고 있는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였다.
“내가 반드시… 도움이 되고 말겠어.”
한지호는 각오를 다지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틈이 날 때마다 짧은 운기조식으로 컨디션을 조절해야 한다.
그래야만 예기치 못한 비상 사태가 터졌을 때 원활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진짜 변수는 비엔티안에서 100km 떨어진 작은 시골 마을에 도착한 다음부터 하나 둘 발생할 터였다.
한지호는 그 마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데 어떤 정보도 없이 적진으로 뛰어드는 셈이다.
재수없게 국경 수비대나 라오스 경찰에게 걸리면 체포 당할 수도 있다.
북한과 협약을 맺고 탈북자들을 북송시키고 있는 라오스 정부는 그 조력자들에게도 매우 엄격하게 법을 집행하는 추세다.
말로만 위험한 곳에 가는 게 아니었다.
한지호는 어마어마한 국제 분쟁에 휘말릴 것까지 염두에 두고 결단을 내렸다.
“곧… 도착하겠군.”
시계를 보니 예정된 도착 시간이 다 됐다.
아니나 다를까.
버스 앞쪽 창문 너머로 하나 둘 허름한 민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라오스 전통 가옥은 나무로 짓는다.
도시에서는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지만 시골에는 여전히 나무로 지은 전통 가옥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세상과 차단 된 오지는 아니다.
마을에는 작지만 상점이 있고, 학교도 있다.
가끔 정전이 일어나기는 해도 전기와 수도 시설 역시 구비 되어 있다.
아프리카나 아마존, 인도의 오지를 생각하면 안 된다.
하지만 동남아 안에서도 상당히 낙후되고 소외된 지역임은 분명하다.
끼이이이이익-
요란한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버스가 멈춰섰다.
영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운전기사는 고개를 돌려 도착을 알렸다.
한지호는 라오스에 입국할 때 가져왔던 배낭 하나를 들고 버스에서 내렸다.
“땡큐.”
말은 안 통해도 마음은 통하는 법이다.
한지호의 인사에 버스 기사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정확히 사흘 뒤 정오에 다시 올 것이다.
부르르릉!
한지호를 내려준 버스는 잠시도 쉬지 않고 다시 시동을 걸었다.
한국 고속도로에서 100km는 1시간 안에 주파하는 거리다.
그러나 비포장도로와 우회도로가 즐비한 라오스에서는 무려 2시간 30분이 걸렸다.
휴식 없이 달려와 지칠만도 한데 버스 기사는 곧장 차를 몰고 비엔티안으로 돌아갔다.
한지호는 멀어지는 버스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매캐한 매연이 시야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이제 정말 이름도 모르는 라오스의 낯선 시골 마을에 혼자 떨어졌다.
여기서부터 모든 것을 알아서 해내야 한다.
행여 주민들의 의심을 사면 라오스 경찰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른다.
깨지기 직전의 얼음 위를 걷는 심정으로 조심 또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저벅저벅-
잠시 숨을 고른 한지호가 걸음을 내딛었다.
신발 밑창 아래로 흙과 풀의 감촉이 확연히 느껴진다.
아스팔트 숲을 떠나 진짜 숲과 가까운 마을에 들어선 게 체감됐다.
미스터 케이가 알려준 대로라면 여기서부터 20분은 걸어들어가야 백무옥의 은신처가 나온다.
한지호는 오지 탐험을 하는 배낭여행자처럼 보이길 기도하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의사인 걸 절대 들켜선 안 되는 위험한 의료 봉사의 서막이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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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칵- 찰칵-
한지호는 의식적으로 스마트 폰 카메라를 이용해 사진을 찍었다.
딱히 라오스 시골의 풍경을 남기고 싶어서만은 아니다.
이따금 마주칠 때마다 노골적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주민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어쩌다 시골 마을까지 흘러들어온 여행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
겉모습은 더 할 나위 없는 배낭여행자였다.
지난 며칠 동안 면도를 하지 않아 수염이 까글거리게 자랐고, 청바지에 티셔츠와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모습도 딱이었다.
“후- 저기다, 드디어.”
한지호는 우여곡절 끝에 백무옥의 거처를 찾았다.
그가 머무는 집도 다른 주민들의 집처럼 나무로 지은 전통 가옥이었다.
똑똑!
문 앞에 선 한지호가 노크를 했다.
하지만 집 안에서는 어떠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똑똑똑!
이번에는 조금 더 강하게 문을 두드렸다.
사람이 있다면 절대 못 들을 수 없는 소리가 울렸다.
자고 있었더라도 깨어날 정도로 제법 큰 소리가 났다.
스윽-
한지호의 감각에 뭔가 잡혔다.
나무 문 너머로 한 사람이 움직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한지호의 감각을 완전히 속일 수는 없다.
한지호는 백무옥이 집 안에서 경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경계심을 풀기 위해서는 먼저 이쪽의 신분과 목적을 알리는 게 순서다.
그는 먼저 자신의 이름을 말하려 했다.
그때였다.
쉭- 철커덕!
갑자기 현관문에 구멍이 생기더니 총구가 한지호의 머리를 겨눴다.
낯선 사람이 찾아오면 언제든 대응할 수 있게 준비를 해둔 모양이다.
“후 아 유?”
문 안에서 작은 구멍 틈으로 총을 겨눈 백무옥이 한지호의 정체를 물었다.
차갑고 건조한 목소리지만 살짝 떨리고 있었다.
한지호는 예상 밖의 상황에도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
총이 자기 머리를 겨누고 있지만 그리 놀라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방아쇠를 당기려는 낌새가 느껴지면 재빨리 피할 자신이 있었다.
오금희를 꾸준히 수련해온 한지호의 신체 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렇기에 한지호는 총구 너머 백무옥의 불안한 감정을 직시하며 천천히 대답을 했다.
“미스터 케이가 보내서 왔습니다. 당신을 치료하러 온 한지호입니다.”
“…….”
한국말로 또박또박 대답을 해줬는데도 무반응이었다.
다만 현관문 위쪽 구멍을 뚫고 튀어나온 총구는 그대로였다.
최신형 총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쇳덩어리로 만들어진 총구가 백무옥의 심경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다시 말하지만, 미스터 케이의 소개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스으으윽-
그제야 한지호의 머리를 겨누고 있던 총구가 사라졌다.
그리고 나서 나무 문이 반쯤 열렸다.
집 안에 있는 백무옥은 문을 활짝 열지도 않았다.
한지호의 몸통이 들어갈 만큼만 공간을 확보해줬다.
사소한 행동에서부터 경계심이 몸에 깊이 묻어있는 것 같았다.
“얼른 들어와.”
백무옥의 목소리는 20대 초반 청년들과 다를 바 없었다.
대뜸 반말을 사용했지만 발음도 정확했다.
사전 정보가 없었다면 탈북자라고 생각하지 못 했을 것이다.
미스터 케이나 비엔티안의 탈북자들과 달리 백무옥은 완벽에 가까운 표준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터억.
한지호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 문이 닫혔다.
어두컴컴한 집 안에는 가구라고 부를만한 것도 거의 없었다.
한지호는 배낭을 바닥에 내려두고 백무옥을 쳐다봤다.
백무옥도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한지호를 바라보고 서있었다.
‘고생을 많이 했지만 갓 대학에 들어갔을 나이, 앳된 얼굴이야. 관리를 잘 하면 빛이 날 곱상한 얼굴이네.’
한지호가 백무옥의 첫인상을 파악하는 사이, 한 손에 권총을 백무옥이 먼저 질문을 했다.
“당신, 진짜 의사 맞아?”
총을 들고 있지만 무서워하는 쪽은 오히려 백무옥이다.
한지호는 동생 뻘인 이 청년의 긴장을 풀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만 짧은 시간 안에 제대로 치료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며칠 내내 비엔티안의 탈북자들을 치료했고, 미스터 케이도 나를 신뢰하기 때문에 여기로 보낸 거겠지. 걱정되는 건 알지만 의심을 그만 해도 좋을 것 같은데.”
“갑자기 왜 반말이야?”
“너가 먼저 말을 놓았으니까.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 알지?”
“읍!”
백무옥이 욱하는 것 같았다.
한지호는 그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잘 해주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몰아칠 때는 확실하게 몰아쳐서 주도권을 잡고 믿음을 다지는 방법도 있다.
“난 너를 도와주러 왔지 기분을 맞춰주러 온 게 아냐. 서로 시간이 많지 않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어때?”
한지호의 말에 백무옥이 솔직한 티를 냈다.
금방 금방 감정의 변화가 얼굴에 나타나는 걸 보며 아직 어리긴 한 것 같았다.
“본론이라면?”
“국경을 넘기 위해서는 총에 맞은 상처를 치료해야 하니까. 그 이야기부터 하자는 거지.”
“내 상처는…….”
“왼쪽 허벅지. 맞지?”
한지호가 정확하게 상처 부위를 지목했다.
백무옥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한지호를 다시 쳐다봤다.
미스터 케이도 총상을 입은 위치는 알지 못한다.
한지호는 백무옥을 본 지 채 1분도 지나지 않아서 총상을 입었던 부위를 짚어낸 것이다.
라오스의 외딴 마을에서 또 하나의 역사가 쓰여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