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220화 (220/255)

# 220

5장, 스파이 닥터 (1)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에 도착한지 사흘이 지났다.

그 사흘 동안 한지호는 유명 관광지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원화 한의원을 성공시킨 이후 매번 5성급, 혹은 그 이상의 특급 호텔 스위트 룸에만 머물었던 한지호다.

하지만 라오스에서 그는 다 쓰러져가는 게스트하우스 벙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끊임없이 탈북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라오스에 이렇게 많은 탈북자들이 숨어 살고 있었는지 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더 없습니까?”

“오늘은 방금 나간 동무가 마지막이었지. 고생했수, 한 선생.”

남은 환자가 없냐는 물음에 미스터 케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30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한지호와 비슷한 또래 같았지만 말투 때문에 실제보다 나이가 더 많은 것처럼 느껴졌다.

라오스에 머무는 탈북자들의 리더라는 점도 무게감을 더했다.

사흘 동안 한지호는 미스터 케이의 신뢰를 얻었다.

아무 조건 없이 열악한 환경에서 탈북자들을 치료해줬다.

신뢰가 안 생길래야 안 생길 수 없는 일이다.

“배고프니까 저녁이나 먹읍시다.”

한지호도 미스터 케이와 심리적 거리가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라오스라는 낯선 나라에서 탈북자들을 보호하며 살아가는 그의 삶이 존경스러웠다.

뿐만 아니라 매사 신중한 태도로 묵직한 존재감을 발산하는 게 보통 사람 같지 않았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눌 틈은 없었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게 있다.

한지호는 미스터 케이가 군인 출신일 거라고 예상했다.

“오늘 밥은 내가 사겠수, 한 선생.”

“좋죠. 비싼 거 먹어도 됩니까?”

“마음껏 먹으라우. 3일 동안 치료비도 못 줬는데 내래 밥이라도 사야 사람 도리를 하는 거 아니갔어.”

“그럼 사양 않고 많이 먹겠습니다.”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한지호는 미스터 케이와 함께 벙커를 빠져나왔다.

벙커는 도대체 누가 올까 싶은 게스트 하우스지만 의외로 인기가 많았다.

비엔티안은 막 발전하는 도시인 만큼 외국에서 값싼 노동자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라오스보다 더 못 사는 나라에서 일을 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 벙커에 장기 투숙하는 편이었다.

한지호는 탈북자들뿐 아니라 벙커에 투숙하는 외국인 노동자도 성심성의껏 치료를 해줬다.

어렵게 가져온 약재가 얼마 되지 않고, 여건도 나쁘지만 진심으로 최선을 다했다.

탈북자와 외국인들은 그런 한지호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진심은 언제나 그 무엇보다 강력하게 전해지는 법이다.

그들은 완치가 되느냐보다 이렇게 정성스러운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의료 사각지대에서 아프면 무조건 참아야 했던 사람들이다.

한지호의 의료 봉사 덕택에 그들은 참으로 오랜만에 사람 대접을 받았다.

미스터 케이는 그 자체만으로도 한지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그는 이미 한지호를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벙커가 있는 골목 옆의 노점상에 자리를 잡은 미스터 케이가 입을 열었다.

“내래 라오스에 와서 이리 조건 없는 도움은 처음 받아 봤수다.”

“탈북자 구호 센터에서 도움을 주지 않습니까?”

한지호의 물음에 미스터 케이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뭔가 사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도움을 주는 곳도 있지. 그 대신 사진을 찍고, 카메라로 영상도 찍어서 방송도 만들려고 하고. 잘못했다간 여 있는 탈북자들 다 잡혀 갈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우, 한 선생?”

“아…….”

한지호는 그제야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구호 단체는 물품이나 의료 지원을 하는 대신 증거를 남기려 한다.

후원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구호 활동 사진이나 영상을 남길 필요가 있다.

그들만의 잘못은 아니다.

다만 언제 강제로 북송될지 모르는 탈북자들의 특수한 처지를 고려하지 못한 처사였다.

후루룩- 후루룩-

금방 차려진 국수를 한 젓가락 말아먹은 미스터 케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처음엔 한 선생도 믿지 못했다우. 구호 단체를 통해 의사가 온다해서 또 사진이나 박으려 들면 냉큼 쫓아낼 생각이었수다.”

“지금은 믿을 수 있습니까?”

한지호는 독특한 향신료를 뿌린 라오스 국수를 먹으며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는 건 이미 신뢰를 주고받았기 때문이다.

미스터 케이는 처음 보여주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 은혜… 갚을 수 있을란지 모르겠지만 절대 잊지는 않갔어.”

“은혜는 무슨. 다 내가 좋자고 하는 일입니다.”

한지호는 칭찬을 받고 싶지 않았다.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해 라오스 행을 선택했을 뿐이다.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삶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다면 자신에게 이득이다.

남을 위해 자기 삶을 희생하는 대단한 사람들처럼 여겨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도움을 받은 미스터 케이로서는 한지호의 호의가 고맙고 또 고마운 게 당연했다.

턱-

젓가락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그가 한지호를 똑바로 쳐다봤다.

“한 선생, 일주일 동안 라오스에서 봉사를 하러 왔댔지?”

“맞습니다. 이제 나흘이 남았군요.”

“원래는 이런 걸 부탁 할 생각이 없었는데… 사흘 동안 환자들을 많이 봐줬고, 다행히 여기엔 정말 심각한 사람도 없고 해서 말이우.”

“다른 곳에 위중한 환자가 있습니까?”

“조금 위험한 지역이우. 해서 구호 팀이 와도 보내지도 않고. 하지만 한 선생이라믄…….”

미스터 케이는 나름대로 오래 고민하고 이야기를 꺼낸 것 같았다.

3일 동안 한지호를 곁에서 유심히 지켜본 결과 판단을 내린 것이다.

한지호 역시 미스터 케이를 깊이 살펴왔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어디에 누가 있는 겁니까? 남은 시간이 4일 뿐이고, 상황도 좋지 않지만 내가 필요하다면 기꺼이 가겠습니다. 그러려고 라오스까지 온 거니까.”

군더더기 없는 대답이었다.

화려한 수식어와 구구절절한 설명으로 자신의 봉사활동 취지를 말하는 이들과는 달랐다.

다시금 확신을 얻은 미스터 케이는 국수 옆에 놓인 라오 비어를 한 모금 마셨다.

맥주로 목을 축인 그가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혹시라도 누가 들을새라 목소리를 낮췄다.

“여기서 100km쯤 떨어진 작은 시골 마을이우. 태국으로 국경을 넘기 위해 새로 뚫은 지역이지.”

“요즘 경계가 삼엄해서 태국으로 넘어가는 시도는 거의 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만…….”

“거의 하지 않을뿐, 아예 사라진 건 아니우. 내래 다른 동지들에게 조심하라고 말을 해뒀지만 통제가 안 되는 놈이 있수다. 곧 죽어도 태국을 거쳐 남한으로 가겠다는 놈이우.”

“그 사람이 환자인 겁니까?”

“맞수다. 이미 한 번 국경을 넘으려다 실패해서 총을 맞았지 뭐요. 대충 치료는 했는데 계속 많이 아픈가보우. 한 선생이 한 번 봐준다면 아주 고맙겠수.”

아무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간단하게 브리핑 아닌 브리핑을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기울었다.

라오스의 경비가 철저해졌고, 발각되면 강제로 북송이 되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남한에 가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람.

총을 맞고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다시 국경 탈출을 준비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달려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한지호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비엔티엔의 탈북자들은 1차 진료를 했으니 그 사람에게 가보겠습니다. 어쩌면 내 도움을 가장 필요로 하는 환자인지도 모르겠네요.”

“한 선생, 절대로 들키면 안 되는 일이우. 국경 탈출을 시도하는 탈북자를 돕다가 잡히면 한 선생도 라오스 경찰에 체포 될 수 있수다.”

“이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는 지난 3일 동안 충분히 느꼈습니다.”

“국경 탈출이 일어나는 지역은 더 하다우. 사실 내래 부탁을 하면서도 한 선생을 위험한 곳으로 밀어넣는 것 같아 영 그렇수다.”

“아닙니다. 그곳에 가서 자유를 찾기 원하는 환자에게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나를 믿고 어려운 이야기를 해줘서 고맙습니다, 미스터 케이.”

“그렇게 생각해준다면야 더 없이 은혜로울 따름이고…….”

“시간이 얼마 없으니 내일 바로 이동하죠. 그런데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뭐든 물어보라우, 뭐든.”

미스터 케이가 눈을 크게 뜨며 라오 비어를 들었다.

한지호도 라오스에서만 마실 수 있는 캔 맥주를 들고 그와 건배를 했다.

시원하게 맥주로 입가심을 한 한지호는 내심 궁금하던 것을 털어 놓았다.

“미스터 케이, 당신이라면 충분히 국경을 넘어 태국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비엔티안에 머무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벙커를 통해서 버는 돈도 다른 탈북자들을 위해 쓰는 것 같던데 말입니다.”

“…….”

미스터 케이는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래도 한지호의 질문이 정곡을 찌른 것 같았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는 얼마 안 남은 맥주를 끝까지 비웠다.

그리고 나서야 천천히 속내를 꺼내기 시작했다.

“내래 마음만 먹음 당장 태국으로 넘어갈 수 있갔지. 하지만 여서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다우. 그리고 내가 사라지믄 비엔티안에 있는 탈북자들 누가 챙기갔어.”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이군요.”

“비엔티안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반드시 올 거라우, 여기로.”

미스터 케이의 음성에서 깊은 그리움과 쓸쓸함이 묻어나왔다.

한지호는 그제야 비엔티안에서 탈북자들을 돌보며 살아가는 미스터 케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헤어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먼저 탈북을 한 사람일 수도 있고, 육로 루트를 따라오는 과정에서 헤어졌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미스터 케이에게는 자유와도 바꿀 만큼 소중한 사람인 게 분명하다.

“기다리는 그 사람, 꼭 만나기를 바랍니다.”

“한 선생이 그래 말해주니 좋은 예감이 들고 있다우.”

미스터 케이가 쑥스러운 듯 살짝 웃었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얼굴, 얼마든지 새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스터 케이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탈북자들을 보호하느라 하루 하루 살얼음판 위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짜 영웅이 아닐까.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가장 낮고 위험한 곳에서 험한 일을 하는 사람.

한지호는 온세계의 스포트 라이트를 받으며 영웅 대접을 받아왔다.

물론 자기자신의 삶이 부끄럽지는 않았다.

최선을 다해 의술을 펼쳤고, 그로인해 당당하고 떳떳하게 얻은 성취일 따름이다.

하지만 세상의 그늘에서 묵묵히 영웅처럼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이제부터는 기억하고 살아갈 것 같았다.

그래야만 교만해지지 않고 힘든 사람들을 돌아보며 인생의 의미를 탐구할 수 있을 터.

무작정 떠나온 라오스에서 한지호는 돈 주고 배울 수 없는 값진 경험을 하고 있었다.

“아무튼 총 맞고 앓는다는 놈, 아주 고약한 꼴통이지만 심성은 고운 놈이라우. 잘 부탁하겠수다, 한 선생.”

“여러 방면으로 최선을 다해 돕고 오겠습니다.”

“한 선생이 이처럼 든든하니 내래 참으로 오랜만에 즐겁지 않갔어.”

“한 잔 더 하죠.”

“당연한 말을!”

흥이 올랐는지 평소보다 목소리가 커진 미스터 케이가 라오 비어를 더 시켰다.

비엔티안의 후미진 뒷골목에 앉아 한국 돈으로 천 원짜리 국수를 먹고, 미지근한 맥주를 마신다.

그런데 럭셔리 라운지에서 샴페인을 마실 때보다 즐거웠다.

한지호는 삶의 또 다른 기쁨을 체험하며 라오스 풍경에 녹아들고 있었다.

내일이면 꽤나 위험한 곳으로 떠나야 하지만 걱정되지 않았다.

환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간다.

전생의 규호가 위험한 전쟁터를 누볐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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