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219화 (219/255)

# 219

4장, 나누는 삶 (2)

비엔티안은 그리 발전하지 않은 도시다.

동남아의 다른 수도에 비교하면 낙후됐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싱가폴, 쿠알라룸프르, 자카르타, 방콕.

이제는 동남아 국가들의 수도가 아시아는 물론이고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됐다.

쿠알라룸프르와 자카르타에서 거래되는 주식은 홍콩 증시를 위협할 정도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서 수주 되는 물량이 없으면 아시아의 대형 건설사 여러 곳이 손가락을 빨아야 한다.

그에 비해 유독 동남아 개발 붐에서 비껴난 국가가 몇 있었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미얀마와 라오스다.

하지만 오래도록 잠들어있던 두 나라도 최근 들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미얀마는 군정의 독재가 끝난 것을 계기로 문호를 개방했다.

서서히 외국 자본을 받아들이며 한 걸음씩 내딛는 중이다.

라오스는 입소문으로 외국인들에게 명성이 알려진 케이스다.

아주 오래전부터 유럽의 젊은 배낭여행자들은 라오스를 성지로 손꼽았었다.

드디어 한국 TV 프로그램에서도 인기 연예인들을 라오스로 보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비엔티안, 방비엔, 루앙프라방으로 이어지는 배낭여행 코스는 한국와 일본, 중국의 청년들을 설레게 만들었다.

유럽에 이어 아시아 3국에서도 라오스 여행이 새로운 트렌드가 된 것이다.

관광이 열리고, 사람이 드나들기 시작하면 개발은 자연스럽게 뒤따라온다.

아직은 쿠알라룸프르나 자카르타에 비교할 수 없지만,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에서는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려는 힘찬 에너지가 느껴졌다.

그러나 은밀하게 비엔티안에 도착한 한지호는 여행자들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가 향한 곳은 배낭여행객이 몰리는 핫 스팟도 아니고, 건설 열풍이 일어나고 있는 신도시도 아니었다.

낙후된 비엔티안의 민낯이 그대로 남아있는 주거지역으로 스며들었다.

원래 평범한 서민들이 거주하는 곳은 가장 늦게 개발이 된다.

관광지도, 부자들이 터를 잡은 신도시도 아니기 때문이다.

잠시 잠깐 라오스를 방문한 사람들은 서민들의 주거지역에 발을 들일 일이 거의 없다.

무작정 헤매다가 길을 잃어도 금방 빠져나가기 마련이다.

볼 거리라곤 찾을 수 없는 허름한 뒷골목을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다.

게다가 으스스한 분위기 때문에 위협을 느끼기도 쉽다.

하지만 한지호는 달랐다.

그는 명확한 목적지가 있는 사람처럼 갈팡질팡 헤매지 않고 걸었다.

골목에 늘어져있는 라오스 사람들이 곁눈질로 그를 쳐다봐도 개의치 않았다.

구글 맵으로도 정확한 지리가 파악되지 않는 곳, 한지호의 왼손에는 한 장의 지도가 들려 있었다.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살짝 초조한 얼굴로 사방을 살펴보던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지도에 메모를 해놓은 글자가 보였다.

금방 떨어질 것 같은 간판에 분명 ‘BUNKER’라는 영어 단어가 휘갈기듯 써있었다.

‘찾았다, 벙커.’

한지호는 망설임 없이 간판이 붙어있는 건물로 다가갔다.

퀘퀘한 냄새가 날 것만 같은 2층 건물은 오래 된 게스트하우스 같았다.

건물 입구에는 조명도 없어서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우물쭈물할 여유가 없었다.

한지호는 현관문을 밀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헬로.”

낯선 이방인의 등장에 오히려 건물 안 사람들이 놀랐다.

데스크 책상에 흐리멍텅한 자세로 앉아있던 젊은 라오스 남자가 눈알을 굴렸다.

“헤, 헬로우.”

라오스 남자는 영어가 서툰 듯 어설픈 발음으로 인사를 받았다.

한지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경계를 풀기 위해 노력했다.

“마이 네임 이즈 지호 한.”

“오케이.”

그는 라오스 남자가 알아들을 수 있게 또박또박 영어 단어를 끊어서 말했다.

데스크에 홀로 앉아있던 젊은 남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소통이 된다는 느낌을 받은 한지호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아이 원트 투 밋 미스터 케이.”

그 순간, 순박한 인상의 라오스 남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부모의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한지호를 노려보며 책상 아래에서 뭔가를 꺼냈다.

후다닥-

라오스 남자가 집어든 것은 기다란 칼이었다.

문방구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커터칼이나 가정용 식칼이 아니다.

한창 때 조폭들이 전쟁에서 쓰던 사시미와 비슷한 모양이었다.

사람을 찌르기 위해 얇고 길게 다듬은 칼날이 흐릿한 조명 아래서 빛을 발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반전이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그대로 얼어붙었을 것이다.

라오스 뒷골목의 후미진 건물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칼에 찔려도 뉴스에 안 나올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한지호는 마치 이런 반응을 예상한 것처럼 웃고 있었다.

경계를 풀기 위한 미소를 지우지 않고 칼을 든 라오스 남자를 바라봤다.

“후 아 유?”

남자가 입을 열었다.

방금 전보다 훨씬 딱딱해진 발음으로 한지호의 정체를 물었다.

한지호는 유창한 영어로 구구절절 설명을 해줄 수 있지만, 그래봐야 라오스 남자는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아니면 오금희를 펼쳐서 칼을 뺏고 남자를 제압할 수도 있다.

라오스 남자는 꿈에도 모르고 있지만 주도권은 한지호가 잡고 있다.

곧이어 결단을 내린 한지호가 두 손을 높이 들었다.

싸울 의지가 없다는 뜻을 명백히 보여준 것이다.

“미스터 케이, 어포인트먼트. 마이 네임 이즈 지호 한. 체크 잇.”

그는 확실한 단어만 나열했다.

미스터 케이와 약속을 했다. 내 이름은 한지호다. 확인해봐라.

아무리 영어가 짧아도 100% 알아들을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한지호가 두 손을 들고 차분하게 대답하니 라오스 남자도 헷갈리는 듯 했다.

그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지만 한 손으로 데스크에 있는 전화기를 들었다.

한 손엔 칼, 한 손엔 전화기를 든 모습이 무섭다기보다는 우스꽝스러웠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워낙 구식 전화기라서 통화연결음이 밖에까지 다 들렸다.

이윽고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라오스 남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자기네 말로 흥분한 듯 이야기를 쏟아냈다.

상대편도 그에 맞춰 쉬지 않고 설명을 해주는 것 같았다.

한지호는 잠자코 서서 라오스 남자가 통화를 마치길 기다렸다.

딸칵!

제법 길었던 통화가 끝나고, 라오스 남자는 칼을 내려놓았다.

그가 고개를 까닥이며 한지호를 불렀다.

“팔로우 미.”

한지호는 환하게 웃으며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여전히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었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라오스로 날아온 한지호가 왜 특급 호텔 대신 낡은 게스트하우스에 온 것인지.

미스터 케이는 또 누구고, 그의 이름을 듣자마자 라오스 남자가 칼을 꺼낸 이유는 무엇인지.

한지호의 라오스 방문은 시작부터 미스테리하기 짝이 없었다.

정작 당사자인 그는 모든 것을 예견한 듯 담담해 보였지만 말이다.

“히어. 웨이트. 미스커 케이, 컴.”

침대조차 없는 좁은 방으로 안내를 받은 한지호는 벽에 기대어 앉아 휴식을 취했다.

라오스 남자의 말에 의하면 곧 미스터 케이가 올 것이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지금 당장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을 돌보기 위해 떠나온 여행이 궤도에 오르고 있었다.

+++

쿵쿵쿵!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1시간 가까이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에 무척 지루하던 차였다.

한지호는 벙커라는 이름의 게스트하우스 2층에서 미스터 케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누군가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에 눈을 빛냈다.

확실하진 않지만 드디어 미스터 케이를 만나게 될 것 같았다.

‘한 명이 아니다.’

한지호의 감각은 범인의 한계를 초월한지 오래다.

오금희 녹공은 그에게 레이더나 다름없는 예민한 감각을 안겨줬다.

녹공을 펼치면 일정 거리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감지할 수 있다.

지금은 딱히 녹공을 쓰지 않았지만, 몇 명이 다가오는지 정도는 손쉽게 알 수 있었다.

‘세 명.’

한지호는 세 사람의 인기척을 느꼈다.

그 직후 노크도 없이 방문이 열렸다.

끼이익-

낡은 건물이 아니랄까봐 문이 열리는 소리도 요란하기 그지없었다.

한지호는 몸을 일으켜 좁은 방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맞이했다.

다짜고짜 칼을 들었던 라오스 남자과 검은 머리를 짧게 자른 청년이 누군가를 부축하고 있었다.

“미스터 케이.”

한지호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처음 봤지만 정체를 파악하기 어렵지 않았다.

라오스 남자와 함께 누군가를 부축하고 들어온 사내, 군인처럼 바싹 깎은 머리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그가 바로 미스터 케이였다.

부름을 받은 미스터 케이가 날카롭게 눈을 번뜩였다.

허공에서 그와 한지호의 시선이 얽혔다.

둘은 부정할 수 없는 한민족이다.

미스터 케이의 얼굴은 한국 사람의 것이었다.

“한지호 선생?”

“내가 한지호입니다. 박문원 부원장님을 통해 소개 받은.”

“인사는 됐고, 날래 이 환자부터 좀 보라우.”

미스터 케이와 한지호는 한국말로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미스터 케이의 억양은 무척 독특했다.

영화에서나 접하던 북한 발음이었다.

한지호는 놀라지 않고 그가 부축해온 사람을 확인했다.

숨을 쌕쌕 거리고 있는 게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라오스 남자와 미스터 케이가 조심스럽게 환자를 방 안에 눕혔다.

“언제부터 이랬습니까?”

한지호는 배낭에서 침 케이스를 꺼내며 질문을 던졌다.

다부진 인상의 미스터 케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을 했다.

“2주일 전부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토하고, 그러다 열까지 심해져서 이 지경이 됐수다.”

“병원은 왜 안 가고, 아… 하긴.”

“병원을 갈 수 있는 형편이면 이 지경까지 냅둘 리가 없지 않수!”

한지호의 괜한 물음에 미스터 케이가 목소리를 높였다.

말을 뱉을 때부터 실수였다는 걸 자각한 한지호는 곧바로 다른 질문을 했다.

“약은 복용했습니까?”

“비상약을 구해서 먹였는데 나아지는 게 없어서 말이우.”

“알겠습니다. 일단 진맥부터 해보죠.”

한지호는 정신을 집중하며 환자의 손목을 잡았다.

50대로 보이는 남자는 역시 한국인의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었다.

라오스 땅에서 한국 사람들이 병원에도 못 가고 방치되어 있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이들이 탈북자이기 때문이다.

미스터 케이는 라오스 지역에서 탈북자들을 보호하는 리더다.

중요한 육로 루트였던 라오스 정부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면서 수많은 탈북자들이 고립무원 신세가 됐다.

자칫 정체가 발각되거나 무리하게 태국으로 넘어가다 잡히면 무조건 북으로 송환된다.

북한으로 송환되면 탄광에서 평생 노역을 하거나 끔찍하게 사형을 당한다.

탈북 과정에서 가족을 잃은 트라우마를 지닌 사람들은 자연히 겁을 먹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어렵사리 라오스까지 왔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숨어 살게 된 것이다.

한지호는 의료 봉사가 절실한 곳을 알아봤고, 그러던 중 S대 병원의 박문원 부원장에게서 라오스 이야기를 듣게 됐다.

고해진을 치료하며 인연을 맺은 박문원 부원장은 평소 탈북자 문제에 관심이 깊었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니 라오스의 탈북자들이야말로 지구에서 가장 낮은 곳에 처한 사람들이었다.

더구나 한민족이라는 핏줄의 땡김까지 있다.

한지호는 모샤드 일라이의 장례식을 치르고 라오스로 날아올 수밖에 없었다.

‘반드시 살린다, 내가!’

첫 번째 탈북 환자의 맥을 짚은 한지호의 눈에서 열정이 이글거렸다.

거액의 치료비를 주는 VIP도, 명성을 안겨줄 유명인도 아니지만 어느 때보다 간절한 의지가 발동하고 있었다.

미스터 케이와 라오스 남자도 진지하게 진맥을 하는 한지호를 유심히 지켜봤다.

비엔티안의 게스트하우스 벙커에서 세상이 알 수 없는 역사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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