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217화 (217/255)

# 217

3장, 삶의 의미 (2)

낮게 깔린 음성은 허스키하면서 위압감이 느껴졌다.

멕시칸 억양이 묻어나는 영어 발음도 인상적이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방금 전 핏덩이를 뱉어낸 모샤드 일라이었다.

불과 몇 초 전까지 흐리멍텅한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하던 그가 또박또박 말을 한 것이다.

휘청거리며 피를 토하는 모습에 경악하며 일어섰던 가족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바로 옆에서 모샤드 일라이를 부축하고 있던 간병인 두 명은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파… 파파?”

“아버지!”

맨디와 남동생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손자 손녀들도 입을 쩍 벌렸다.

아이들도 이게 말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파킨슨 병 증상을 보이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정상으로 돌아왔다.

현실성이 너무 없어 동화책에도 나오지 않을 일이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모샤드 일라이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다.

“왜들 이리 호들갑인 것이야? 그리고… 이 사람은 또 누구냐?”

모샤드 일라이가 한지호를 가리켰다.

낯선 동양인 남자가 자신의 허리춤을 붙들고 바로 앞에 앉아있으니 이상한 게 당연했다.

한지호는 모샤드 일라이의 눈동자와 안색, 호흡을 확인하며 미소를 지었다.

“돌아오셨군요. 축하합니다.”

“돌아오다니 뭘 돌아와? 내가 어딜 갔었다고. 아니, 근데 당신 누구냐고?”

알려진 것처럼 모샤드 일라이의 성격은 화끈한 것 같았다.

노인이 됐어도 왕년의 성격이 어디 가지 않았다.

한지호는 버럭 성질을 내는 모샤드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

파단법이 성공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것은 자신이 아닌 맨디의 몫이다.

아니나 다를까, 맨디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모샤드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한지호는 말없이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며 한숨을 쉬었다.

파단법을 펼치기 위해 단전의 기력을 다 쏟아부어 무척 피곤했다.

그래도 오늘 밤은 꿀맛 같은 단잠을 잘 수 있을 듯 싶었다.

+++

파단법을 통해 모샤드 일라이가 맑은 정신을 되찾았다.

그로부터 2시간 정도가 흘렀다.

한지호는 대저택에 마련된 별실에서 2시간 동안 깊은 잠을 잤다.

지난 밤 악진과의 과거를 떠올리느라 휴식을 취하지 못했었다.

게다가 순간적으로 엄청난 기력을 쏟아냈으니 지칠 수밖에 없었다.

2시간의 휴식은 그를 다시 쌩생하게 만들었다.

운기조식을 밥 먹듯이 하는 한지호의 몸은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다.

약간의 휴식만으로 10배, 20배의 효과를 볼 수 있다.

달콤한 낮잠을 자고 일어난 그는 침대 위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오금희의 기운을 대주천 시키자 다시 단전이 든든히 채워진 게 느껴졌다.

어느새 그의 단전 그릇은 어마어마하게 넓어져 있었다.

삼국의 시대로 돌아가도 역사에 이름을 남긴 장수들과 일기토를 벌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지금은 무(武)의 가치가 인정받지 못하는 시대다.

그러나 꾸준한 오금희 수련으로 한계를 깨서 나쁠 것은 없었다.

언제 어느 때 무공을 사용해야만 할 날이 올지 모르는 법이다.

똑똑-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한지호가 막 운기조식을 끝내자마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방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두 명이었다.

모샤드 일라이와 맨디.

부녀가 나란히 방 안으로 들어와서 한지호를 쳐다봤다.

한지호는 멀쩡한 걸음걸이로 들어오는 모샤드 일라이를 유심히 지켜봤다.

파킨슨 병과 노화가 앗아간 그의 육체적 능력도 파단법이 되돌려줬다.

간병인의 부축을 받으며 절뚝이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어깨를 활짝 펴고 당당하게 걷는 모샤드 일라이에게서 챔피언의 향기가 느껴졌다.

“휴식을 방해한 건 아니죠, 닥터 한?”

“충분히 쉬었습니다.”

맨디의 물음에 한지호가 고개를 저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이곳은 손님에게 내어주는 침실이지만 웬만한 집의 거실보다 더 넓었다.

한지호와 맨디, 그리고 모샤드 일라이는 침대 옆 테이블에 마주앉았다.

“고맙네.”

모샤드 일라이가 대뜸 고맙다는 말을 했다.

thank you.

두 음절에 불과한 말이지만 진심이 담겨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한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걱정을 좀 했습니다. 파단법의 부작용을 듣고 나면 저를 원망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그 무슨 말인가. 하루를 살아도 제대로 살아야지, 흐리멍텅한 정신과 골골거리는 몸으로 백날을 살아봐야 무슨 의미가 있다고.”

모샤드가 화통하게 말했다.

맨디의 시원시원한 성격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게 확실했다.

모샤드 일라이에 이어 맨디도 다시 한 번 고마움을 표현했다.

“정말 정말 고마워요, 닥터 한. 이렇게 아버지와 오래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다른 가족들도 기대하지 않았던 기적에 감격하고 있어요.”

“도움이 되어서 다행입니다.”

한지호는 구구절절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냈는지 과시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오직 한지호밖에 할 수 없는 일을 성공시켰지만, 자기 입으로 자랑할 필요가 전혀 없다.

맨디는 물론이고, 모샤드 일라이가 맑은 정신을 되찾은 장면을 목격한 가족들은 모두 기적을 체험했다고 난리였다.

모샤드 일라이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하루 아침에 맑은 정신을 잃었던 게 아니다.

파킨슨 병이 진행되며 조금씩 몸이 쇠약해졌고, 하루 중에서 정신이 흐려지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었다.

그 과정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흐린 정신으로 24시간을 살아가게 됐던 것이다.

그랬던 자신이 멀쩡해졌으니 누구보다 놀라는 게 당연했다.

만약 그가 호들갑스러운 성격이었다면 펄펄 날뛰며 기뻐했을 터였다.

“우리 맨디가 약속했듯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겠네.”

모샤드 일라이는 인색한 사람이 아니었다.

움직이는 기업 수준의 부를 쌓은 그가 직접 어마어마한 대가를 약속했다.

맨디도 지당하다는 듯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한지호는 가타부타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일정 레벨을 넘긴 거부들에게는 구체적인 치료비를 제시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누구보다 자신의 건강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만큼의 가치를 지불한다.

그때 모샤드가 눈을 반짝이며 질문을 던졌다.

정신을 되찾은 그의 눈빛은 맹수처럼 무섭게 번들거렸다.

“내 몸과 정신을 회복시킨 이 치료에도 기한이 있다던데… 언제까지인가? 나도 알아야 마지막을 준비하지.”

“정확하게 예측하는 건 불가능합니다만, 대략적인 일자는 알 수 있습니다.”

한지호는 모샤드의 질문을 예상했다.

그는 치료를 하기 전부터 맨디에게 파단법의 부작용에 대해 단단히 일러두었다.

성공하면 일시적으로 맑은 정신과 왕성한 기운을 찾을 수 있지만, 기한이 다하면 반드시 몸에 무리가 간다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특히 모샤드 일라이처럼 노환과 중병으로 시달리고 있던 사람은 파단법의 후유증 때문에 목숨을 잃을 가능성도 높다.

그야말로 남은 삶을 불태워서 잠깐의 빛을 만들어내는 격이다.

“오른손을 내밀어 주시겠습니까.”

한지호는 보다 정확한 측정을 위해 진맥을 한 번 더 해보려 했다.

모샤드 일라이는 군말 없이 팔을 내밀었다.

그는 눈앞에 앉은 동양인 의사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깨달은 것 같았다.

‘맥이 예상보다 훨씬 더 강하게 뛰고있어. 역시 일반 사람과는 다른 체질이라서 그런가…….’

한지호는 다시금 진맥을 하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모샤드 일라이의 체질은 범상치 않았다.

타고난 무골(武骨)이었다.

한지호의 전생인 규호가 살았던 삼국지 시대에 태어났다면 능히 천하를 호령하는 장수가 됐을 것이다.

‘관우와 여포, 그 둘에게 비견할만 해.’

한지호는 삼국시대 최고의 명장이었던 관우와 여포를 떠올렸다.

관우 운장과 여포 봉선에 비교할 수 있을 만큼 맥의 힘이 강했다.

파단법으로 잠력을 폭발시켰다고 해도 70이 넘은 노인이 이만한 맥박을 보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지금 상태로 링 위에 올라도 20대 아마추어 권투선수는 가볍게 쓰러트릴 것 같았다.

“이건 원래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달라졌군요.”

의미심장한 한지호의 말에 모샤드 일라이가 눈을 크게 떴다.

부리부리한 눈을 크게 뜨니 금방이라도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맨디도 걱정스런 얼굴로 한지호의 입술만 쳐다봤다.

한지호는 오해를 풀기 위해 재빨리 다음 말을 이었다.

“파단법의 효과가 제법 오래 지속될 것 같습니다. 보통은 하루나 이틀, 길어야 일주일을 넘기지 못합니다. 건강한 사람에게 파단법을 펼친다고 해도 말이죠. 그러나 모샤드 일라이 시는 최소 2주, 길면 한 달까지 파단법의 효과를 누릴 걸로 보여집니다.”

처음에는 모샤드와 맨디 둘 다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지호의 말을 알아듣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맨디는 두 팔을 번쩍 들고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모샤드도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짧지만은 않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2주에서 한 달이면 충분히 남은 생을 정리할 수 있다.

병상에 누워 기약 없이 죽어가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사실 맨디가 원했던 것은 단 하루, 아니 몇 시간이라도 모샤드 일라이가 맑은 정신으로 삶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2주에서 한 달이라는 시간을 얻게 됐으니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지경이었다.

꽈악-

모샤드 일라이가 손을 뻗었다.

그는 두툼하고 거친 손으로 한지호의 손을 맞잡았다.

이만하면 최대한의 성의로 고마움을 표시한 것이다.

“닥터 한이라고 했지. 자네는 내 인생에서 가장 값진 선물을 준 사람이야. 천국에 가서도 자네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지.”

“영광입니다.”

한지호는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뭔가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맨주먹으로 세계를 감동시킨 불세출의 영웅 모샤드 일라이로부터 극찬을 넘어선 경의를 받았다.

의술의 힘이 이토록 엄청날 수 있다는 걸 또 한 번 실감하게 됐다.

한지호의 손을 놓은 모샤드가 옆에 앉은 맨디와 어깨동무를 했다.

아버지와 딸이지만 마치 친한 친구처럼 스스럼이 없었다.

“닥터 한, 아까 걱정을 했었다고 말했지? 내가 부작용 때문에 화를 내면 어쩔까 하고.”

“그랬었죠.”

“주치의에게 시한부 판정을 받지 않았었어도 나는 화를 내지 않았을 것이 확실해. 그 이유를 아는가?”

“맑은 정신이 아닌 채로 사는 삶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까?”

한지호의 물음에 모샤드 일라이는 고개를 저으며 큰딸 맨디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정신이 맑고 흐리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이 친구야. 사랑하는 사람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가, 그리고 이 세상에 내가 태어난 의미를 남길 수 있는가. 그것이 중요할 뿐. 의미를 잃은 인생이라면 정신이 맑아도 아무 소용이 없는 법이지.”

세계를 제패했던 인물이 죽음의 문턱에서 잠시 돌아와 해주는 이야기다.

무척 심오한 말이지만, 모샤드 일라이의 목소리가 한지호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의미를 잃은 인생은 무엇일까.

어쩌면 지금의 한지호에게 가장 필요한 조언일 수도 있다.

그는 성공가도를 달리며 유명인들을 치료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해 원화 아카데미에서 원대한 비전을 세웠다.

하지만 너무 거창한 것들에 집중하느라 작고 소중한 삶의 의미를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샤드 일라이가 긴 팔을 뻗어 한지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나도 자네 나이 때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네. 그저 링 위에 올라서 싸우고, 무조건 이기는 게 전부였지. 조급해 하지 말게. 싸우면서 깨닫게 되는 거라고, 인생의 의미라는 것은.”

“고맙습니다. 지금의 저를 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 같군요.”

“그랬다면 다행이야. 나는 이제 남은 시간을 의미있게 보내도록 노력해야겠지. 쓸데없이 넘치는 재산을 사회에도 좀 보태고, 우리 딸과 아들들과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또 손자 녀석들 재롱도 좀 보고. 생각만 해도 즐겁구만, 크하하하!”

모샤드 일라이가 마치 사자후를 터트리는 것처럼 화통하게 웃었다.

맨디는 계속 감격어린 눈길로 왕년의 젊음을 회복한 듯한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지호도 종전과는 다른 눈빛으로 모샤드 일라이를 쳐다봤다.

세상의 정점에 올랐던 사람은 확실히 뭔가 달라도 다르다.

급작스러운 요청을 받고 LA로 날아와 그를 치료한 것이 한지호에게 커다란 변환점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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