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
3장, 삶의 의미 (1)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모샤드 일라이는 평소처럼 멍하게 넋을 놓고 앉아있었다.
하지만 침을 놓기 시작하면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 모른다.
만약 침술을 거부하거나 분노를 표출하며 날뛰기라도 하면 무척 곤란해진다.
아무리 늙고 병들었어도 그는 주먹 하나로 세계를 제패한 모샤드 일라이다.
평범한 노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기력으로 저항할 게 분명했다.
그를 억지로 제압하면 파단법을 제대로 펼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첫 번째 침을 놓는 게 가장 중요하다.
모샤드 일라이가 순순히 침을 맞을지 아닐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후-.”
짧게 굵게 심호흡을 한 한지호가 손을 움직였다.
첫 번째 침을 놓을 혈도는 정수리의 백회혈이다.
인체의 기혈을 관장하는 위험한 침술은 대부분 백회에서 시작한다.
우리 몸의 기운이 외부와 맞닿는 지점, 혈도의 시작과 끝이 바로 백회혈이기 때문이다.
꾸욱!
긴 장침이 꽂혔다.
제법 깊이 들어간 침은 정수리의 피부를 뚫고 혈도를 자극했다.
침을 맞지 않아본 사람에게는 낯선 감각일 것이다.
수십 명의 가족들이 숨을 죽이고 모샤드 일라이를 지켜봤다.
한지호도 백회혈에 놓은 침에서 손을 뗀 다음 떨리는 마음으로 그를 쳐다봤다.
“크흠….”
모샤드 일라이가 불편한 듯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정말 다행스럽게도 몸을 크게 움직이거나 저항하진 않았다.
침을 맞을 때 느낌이 익숙하지 않아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동안 숱하게 링겔과 주사를 맞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한지호는 한 숨을 돌렸다.
그것은 지켜보는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맨디는 커다란 눈으로 아버지를 지켜보다 두 손을 기도하듯 모았다.
모샤드 일라이가 백회혈에 침을 맞고도 거부하지 않자 감사 기도를 하는 것 같았다.
‘일단 계속 가보자.’
한지호는 막힘 없이 다음 침을 들었다.
이번에는 손가락 절반 길이의 단침이다.
그는 보통 장침을 주로 사용해왔다.
그러나 파단법을 펼치기 위해서는 장침과 단침을 골고루 섞어서 써야 한다.
혈도마다 정확한 깊이로 자극을 줘야하고, 한 치의 오차라도 발생하면 단전이 아예 망가져버린다.
따지고보면 이제껏 한지호가 해온 치료 중 위험하지 않은 것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단전의 경계를 허물어 몸의 귀문을 여는 파단법은 여러 치료 중에서 위험하기로 세 손가락 안에 들었다.
푹!
두 번째로 선택한 단침이 뒷목에 꽂혔다.
짧은 침이어서 그런지 끝이 안보이기 직전까지 침을 다 밀어넣었다.
모샤드 일라이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백회혈에 침을 맞을 때보다 더한 통증이 느껴진 모양이다.
“괜찮아요, 괜찮아.”
스르르륵-
모샤드의 양 옆에 앉아있는 여자 간병인 두 명이 그의 팔을 붙잡고 손을 쓰다듬었다.
능숙한 간병인들 덕분에 모샤드도 금방 표정을 풀었다.
다시 멍한 얼굴로 돌아간 게 좋은 일인지 모르겠지만, 세 번째 침을 놓아도 될 것 같았다.
장침, 단침, 그리고 다시 장침이었다.
한지호는 길고 짧은 침을 번갈아 손에 쥐며 모샤드 일라이의 혈도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극했다.
백회혈에 하나, 목 뒤에 세 개. 양쪽 어깨 위에 두 개의 침이 꽂혔다.
모두 여덟 개의 침이 꽂히는 동안 모샤드 일라이는 평정을 잃지 않았다.
가장 걱정했던 게 환자의 거부 반응이다.
그게 없다는 것만으로도 일단은 성공적이었다.
스윽-
한지호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았다.
기껏해서 5분 넘는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하지만 침을 하나 놓을 때마다 억겁의 시간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모샤드 일라이의 가족들도 시간이 느리게 가는 현상을 체험하고 있었다.
나이가 어린 손자, 손녀들도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
웬 동양인이 침을 놓는 것 자체가 아이들이 보기엔 신기한 광경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지호에게서 풍겨나오는 아우라는 수십이 아니라 수백 명의 사람도 집중하게 만들만 했다.
그가 눈을 부릅뜨고 침을 놓는 장면은 한 편의 영화 같았다.
결코 빠르지 않은 동작이지만 영화의 클라이막스처럼 긴장감이 전해졌다.
잠시 숨을 돌린 그는 고개를 들어 가족들을 쳐다봤다.
모샤드 일라이의 아들딸들, 그 배우자인 사위와 며느리들, 그들이 낳은 손자와 손녀들은 한지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단전, 즉 아랫배에 강한 충격을 줘서 몸을 뒤흔들 겁니다.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놀라지 말고 저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한지호의 말이 끝나자 가족들이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특히 뉴욕에서 날아온 모샤드 일라이의 셋 째 아들은 살짝 상기된 얼굴이었다.
“정말 이렇게 해서 아버지가 정신을 찾는 거 맞습니까?”
화를 내지는 않지만 따지는 듯한 말투다.
한지호는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버지에게 서양에서는 생소한 한의학 치료를 하고 있으니 아들 입장에서 편할 수 없을 것이다.
다행히 한지호 대신 맨디가 입을 열었다.
“닥터 한을 모셔오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모른다. 우리가 할 일은 믿고 지켜보는 것뿐이야.”
맨디의 말투는 단호했다.
한지호에게는 친절하고 서글서글한 이미지의 중년 여성이었지만, 일라이 패밀리에서는 확고부동한 발언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다른 가족들도 감히 더 이상 토를 달지 못했다.
한지호는 눈빛으로 맨디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그 사이 모샤드 일라이의 백회혈과 뒷목, 양 어깨에 놓은 침이 효력을 내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체크한 한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신의 혈도를 풀어서 기운이 퍼져 나가기 좋게 만들어뒀다.
이제 단전의 경계를 무너트려 잠력을 발산시키는 일만 남았다.
진원지기, 또는 생명의 근원이라 불리는 잠력이 미리 놓아둔 침의 영향을 받아 순식간에 전신을 휩쓸 것이다.
그때의 강렬한 충격을 늙고 병든 모샤드 일라이의 몸이 버텨낼 수 있을까.
한 때 세계 최강의 남자였던 사람이니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침을 놓는 내내 모샤드 일라이의 등 뒤에 서있었던 한지호가 위치를 바꿨다.
모샤드의 정면으로 간 그는 쪼그려 앉아서 눈높이를 맞췄다.
간병인 두 명의 부축을 받은 채 앉아있는 모샤드 일라이는 한지호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초점 없이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눈동자에 다시 생기를 돌게 만들어야 한다.
한지호는 입술을 굳게 닫고 오른손바닥을 쫙 펼쳤다.
처억.
먼저 왼손으로 모샤드 일라이의 허리를 잡았다.
간병인들이 부축을 하고 있지만, 혹시라고 모샤드가 뒤로 쓰러지지 않게 막으려는 것이다.
잘못해서 그가 뒤로 쓰러지면 뒷목과 어깨, 백회혈에 놓은 침이 바닥과 부딪쳐 큰 사고가 날 수 있다.
모샤드 일라이의 허리춤을 잡은 한지호는 쫙 펼친 오른손을 그의 아랫배로 가져갔다.
‘어쩌면 이 손에 내 운명이 걸렸는지 모르겠네.’
한지호는 손바닥으로 모샤드 일라이의 체온을 느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파단법이 실패하면 소문이 날 것이다.
여기 모인 일라이 패밀리 모두의 입단속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헨리오 무크와 영국 왕실로부터 인정을 받으며 쌓은 명성은 하루 아침에 와르르 무너질 것이다.
동양권에서는 계속 이름을 날리겠지만, 가뜩이나 한의학에 대한 신뢰가 낮은 서양권에서 다시 활동하긴 힘들 가능성이 높다.
어쩌자고 이렇게 위험 부담이 큰 치료를 덜컥 받아들였는지.
이제와 후회해봐야 늦었고, 사실 후회를 하지도 않았다.
호승심 하나로 적장(敵將)과 같은 질병에 맞서 싸우는 것, 그게 전생을 각성한 한지호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고오오오오-
마음을 굳힌 한지호의 단전에서 오금희 내공이 꿈틀거렸다.
웅공, 호공, 조공, 원공, 녹공.
다섯가지 기운이 하나로 섞여서 거대한 해일을 일으켰다.
하나만 펼쳐도 인간 세상의 한계를 초월한 힘이다.
오금희를 전부 끌어올려 손바닥에 집중시킬 일은 많지 않다.
한지호는 오른손에 감돌고 있는 어마어마한 기운을 체감했다.
자신이 일으킨 내공이지만 무서울 정도였다.
이만큼 거센 기운이 옷자락 하나 너머 모샤드 일라이의 단전으로 파고들 것이다.
하단전의 경계를 완전히 녹여버리는데 성공한다고 해도 모샤드의 몸이 버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 순간, 초점 없이 흔들리던 모샤드 일라이가 고개를 살짝 내렸다.
동시에 그를 올려보고 있던 한지호와 눈이 마주쳤다.
주먹으로 세계를 제패한 거인 모샤드 일라이의 눈동자와 의술로 천하를 활보하고 있는 한지호의 눈동자가 확실하게 얽혔다.
아주 잠깐이지만 모샤드 일라이의 눈에 초점이 돌아온 것 같았다.
마치 그가 걱정하지 말고 파단법을 펼치라고 말하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간다.’
숨을 들이마신 한지호가 손바닥에 응축된 기운을 뿜어냈다.
우우우웅!
얼마나 강대한 기운이 발산되는지 거실에 둘러앉은 가족들에게도 진동음이 들렸다.
슈우우우욱-!
오래 걸리는 일은 아니었다.
한지호의 손바닥에서 뿜어진 기운이 얇은 옷자락을 뚫고 모샤드 일라이의 단전을 때렸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집채만한 파도와 비교할 수 있는 미증유의 내공이 쏟아졌다.
저항없이 단전으로 파고든 기운은 성난 태풍처럼 사방을 휘젓고 다녔다.
하단전에 모인 인체의 진원지기, 잠력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지탱하는 경계를 모조리 부수기 시작한 것이다.
“으으으…….”
모샤드 일라이의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그의 단전에서는 화산이 폭발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건강한 장정도 견디기 힘든 열기가 아랫배를 휩쓰는데 멀쩡할 리 없었다.
그러나 아직은 약과에 불과하다.
진짜 시험은 시작되지도 않았다.
‘파단(破丹)-!’
한지호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세게 깨물며 속으로 외침을 토해냈다.
인체의 근본에 해당하는 단전의 경계를 부순다.
한지호는 고대의 날고 기는 의원들도 감히 도전하지 못했던 일을 21세기 LA에서 시도하고 있었다.
파바바바박!
다시금 쏟아져나간 기운이 모샤드 일라이의 단전을 뒤흔들었다.
쿠웅!
손맛이라고 불러야 할까.
한지호는 모샤드 일라이의 아랫배에 딱 붙인 손바닥에서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단전의 경계가 허물어졌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때였다.
“쿨럭! 커허헉!”
모샤드 일라이가 허리를 활처럼 꺾으며 검은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두 번에 걸쳐 핏덩이를 쏟아낸 모샤드 일라이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한지호가 왼손으로 허리를 잡고 있지 않았다면 쓰러졌을 것이다.
“파파-!”
부지불식간에 생긴 일이지만 가족들도 난리가 났다.
파단법을 펼치는 광경을 모든 가족들이 모여서 지켜보고 있다.
맨디가 절규하듯 모샤드를 불렀고, 나머지 가족도 벌떡 일어섰다.
오직 한 사람, 한지호만이 당황하지 않고 있었다.
투두두두둑!
그는 생생하게 듣고 있었다.
단전에 갇혀있던 잠력이 모샤드 일라이의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소리가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백회혈과 뒷목, 양 어깨에 꽂은 여덟 개의 침은 혈도를 막힘없이 뚫어 놓았다.
단전에서 뛰쳐나온 폭발적인 진원지기가 모샤드 일라이의 전신을 휘감는 중이었다.
찌릿-
손바닥에서 전류가 느껴졌다.
한지호는 모샤드 일라이의 아랫배에 붙이고 있던 오른손을 뗐다.
이제 파단법의 성과를 확인하는 일만 남았다.
그 순간, 한지호의 귓가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뭣들 하는 짓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