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215화 (215/255)

# 215

2장, 최후의 숨결 (2)

삼국의 시대는 곧 전란의 시대다.

천하에 다시 없을 난세.

역사는 이 시대를 어떻게 기억할지 몰라도 민초들은 더 이상의 난세가 없을 거라고 여겼다.

그만큼 대륙 곳곳에서 끊임없이 피가 튀고 있었다.

조조의 대군이 적벽에서 흘린 피는 바다와 같은 장강을 붉게 적셨다.

그럼에도 조조는 여전히 중원을 지배하는 효웅이고, 범 같은 장수들과 세기 힘든 병졸을 거느리고 있다.

하지만 전세가 녹록치만은 않았다.

적벽에서의 대승을 계기로 오 나라의 호족들을 규합한 손권의 기세가 무시무시하다.

그는 더 이상 조조가 아들로 취급하던 애송이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한중 너머 촉한의 대지에서는 유비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한량이자 필부일 때도 조조의 심기를 거슬리게 만들었던 인물이 바로 유비다.

그가 자연이 만든 요새인 촉의 울타리에서 대망을 키우고 있다.

더구나 유비는 혼자가 아니다.

천하제일의 책사와 여포를 격퇴시킨 관장 형제, 단기필마로 조조군을 우롱한 자룡을 거느렸다.

그들이 힘을 합쳐 병사들을 키우고 군량을 확보하면 천하의 뇌관(雷管)이 될 것이다.

조조로서는 여러모로 신경 쓸 전장이 늘어난 셈이다.

유비와 손권.

촉과 오.

당장의 경중으로 따지면 당연히 손권의 오 나라가 훨씬 더 위협적이다.

오 나라와 맞닿은 전선에 병력을 집중시키는 게 맞다.

그러나 조조의 선택은 달랐다.

유비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이 작용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15만의 대군을 몰아 한중을 칠 준비를 마쳤다.

한중의 장로를 함락시켜면 촉에서 힘을 키우는 유비의 숨통을 틀어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조의 시선은 노골적으로 한중을 향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전력 배치에서 손해를 본 지역도 생길 수밖에 없다.

조조군의 병졸 숫자에도 한계는 존재한다.

오 나라의 맹수, 손권의 입김이 코 앞에서 느껴지는 합비성에는 언젠가부터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합비를 지키는 병력은 7천이다.

수성을 위한 병력치고 적은 수는 아니지만, 문제는 역시 손권의 군세다.

오 나라에서 활동하는 조조군의 세작들은 믿기 힘든 이야기를 전해오고 있었다.

손권이 직접 10만 대군을 이끌고 합비로 친정을 할 것이라는 소식이다.

합비의 민초들 사이에도 그와 같은 소문이 암암리에 퍼져 나갔다.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진 않지만, 합비성에 발을 붙이고 사는 모든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다.

또 한 번의 혈전을 예고하는 무거운 공기가 성을 짓누르는 가운데 비밀스런 회동이 이뤄졌다.

절충장군 악진과 의성 규호.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악진은 의원이 아닌 장군처럼 생긴 규호를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규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수많은 전쟁터를 거치며 별별 환자들을 치료했었다.

하지만 악진처럼 많은 흉터를 지닌 사람은 처음 봤다.

단언컨대 삼국의 장수들 중에서 흉터로는 악진이 최고일 것이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며 서로를 탐색한 두 사람이 눈을 마주쳤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악진이었다.

“부름에 응해줘서 고맙소, 의성.”

“다른 장수의 부름이었다면 거절하려 했으나… 절충장군 악문겸은 병졸들의 목숨을 중히 여긴다고 들었소.”

규호는 위명이 쟁쟁한 악진 앞에서고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그는 악진이 병사를 아낀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온 것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절충장군이 아니라 조조가 직접 불렀어도 무시했을 터였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조조를 앞두고도 할 말을 다 했던 규호다.

그는 어떤 장수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악진은 규호의 당당함을 문제삼지 않고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 역시 민초들의 목숨을 누구보다 아낀다고 들었소. 합비의 백성들을 위해서 의성의 힘이 필요하오.”

“한낱 의원에 불과한 이 몸이 무슨 힘이 있다는 말씀이시오.”

“손권이 호족들을 닦달하여 10만 대군을 모았소. 곧 강을 넘어 합비로 진군을 해올 것이오.”

악진은 말을 길게 끌지 않았다.

합비성을 지키는 절충장군이 직접 10만 대군의 출병을 언급했다.

규호의 눈빛도 달라졌다.

그 역시 아주 큰 전투가 벌어질 것을 예상하고 합비로 왔다.

애꿎게 피해를 볼 민초들을 치료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마음 한 켠에서는 전투가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악진의 말을 듣고 보니 결국 손권이 거병을 할 모양이었다.

“의성은 친분을 따지지 않는다고 들었소. 민초들을 살리는 일이라면 어디에든 간다고 말이오. 허니 이번에는 나를 도와주시오.”

악진이 간절하게 말했다.

선봉을 고집하는 철혈의 장수가 의원인 규호에게 부탁을 하는 모습은 무척 낯설었다.

그만큼 절박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규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천하를 어지럽히고 피로 물들이는 주범이 누구겠소? 악문겸, 당신이 모시는 맹덕의 탓 아니오?”

그는 조조의 자를 거침없이 불렀다.

조조에 대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하후 가문의 장수였다면 당장 칼을 뽑았을 것이다.

그러나 악진은 화를 내지 않았다.

충성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럽지만, 그는 맹목적인 광신도가 아니었다.

“그리 볼 수도 있다는 것, 인정하오. 허나 사사로운 감정을 걷어내고 오직 합비의 백성들만 바라본다면……. 10만 대군의 합비 공략은 시작에 불과하오. 합비를 차지한 손권은 반드시 중원으로 진군할 것이오. 본보기를 삼기 위해 합비의 백성들을 모조리 도륙하고, 이 땅의 여자와 곡식을 전리품으로 약탈해 동오의 호족들에 나눠주지 않겠소?”

“…….”

규호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마음이 무거워진 탓이다.

조조는 규호의 사부인 화타의 목숨을 앗아갔다.

사적인 원한을 기억에서 지워도 전쟁을 좋아하는 효웅이 곱게 보일 리 없다.

그러나 악진의 말대로 합비의 백성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손권의 성정, 그리고 호족들을 달래야 하는 오 나라의 사정을 보면 합비는 그야말로 폐허가 될 것이다.

민초들을 지키기 위해 힘을 빌려달라는 악진의 호소를 외면할 수 없었다.

“내가 무엇을… 하면 되겠소?”

규호가 낮게 깔린 음성으로 질문을 던졌다.

악진은 눈을 빛내며 급히 대답했다.

“위공께서는 수성에 전념하라는 명을 내시렸지만, 문원의 생각은 다르오. 손권이 도하를 마치는 즉시 기습하여 적의 예봉을 꺽어야만 7천으로 10만 대군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오. 나 역시 문원과 뜻을 맞추었소.”

“7천 병력으로 수성을 해도 모자랄 판국에 10만 대군에게 뛰어든다? 봉선의 휘하에 있던 장수들은 어찌 이리 한결 같은지.”

규호가 혀를 찼다.

하지만 마냥 비웃을 수만은 없었다.

다른 장수라면 몰라도 장료 문원은 기라성 같은 조조의 군단에서도 최강을 자부한다.

여포 봉선이 죽은 이후 더욱 강해진 장문원의 언월도를 감당할 수 있는 장수는 천하에 다섯도 안 될 것이다.

악직은 장료의 계획대로 10만 대군을 먼저 칠 작정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병졸들 틈에서 선봉장을 자처할 게 분명했다.

수많은 전투를 겪었지만 합비에서의 싸움이 악진의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날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나는 문원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소. 7천으로 10만 대군을 격퇴하고 합비의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하오. 의성, 그대의 의술로 내 잠력을 폭발시켜 주시오.”

“잠력을 폭발시키면 일시적으로 괴력난신의 경지에 오를 수 있소만, 차후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오.”

“개의치 않소.”

악진은 단단히 결심을 굳혔다.

잠력을 폭발시켜 불굴의 무력을 얻어 손권의 10만 대군과 맞서려는 것이다.

합비성과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시무시한 후유증도 감당할 준비가 돼 있었다.

규호는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악진은 맹장이지만 장료나 관우처럼 하늘이 내린 무장은 아니다.

키도 무척 작았고, 원래 출신도 무관이 아닌 문관이었다.

기록을 담당하는 서기가 돌격대의 선봉에서 이름을 날려 절충장군이 됐으니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러나 태생적 한계를 무시하긴 어려운 법이다.

악진은 인생 최고이자 최악의 전투가 될 합비대전을 앞두고 모든 것을 걸었다.

한지호는 그의 눈을 마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부와 명예 대신 백성을 지키려고 목숨을 건 장수다.

조조의 휘하이건 무엇이건 부탁을 들어주는 수밖에 없다.

“바로 합시다. 파단법으로 귀문을 열면 10만 대군도 두렵지 않을 것이오.”

파단법(破丹法)은 이름 그대로 단전을 깨트리는 시술이다.

진원지기가 모여있는 단전의 벽을 허물면 인체의 잠력이 전신으로 퍼지고, 일시적으로 기와 영을 관장하는 귀문이 열린다.

그 순간은 한계를 초월하게 되지만 시간이 지나면 심각한 타격을 감내해야 한다.

악진은 주저 없이 손을 내밀었다.

규호도 그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흉터로 뒤덮인 까칠까칠한 악진의 손은 예상외로 따뜻했다.

7천 병력으로 10만 대군을 물리친 합비의 전설에서 가장 빛났던 장수는 단연 장료지만, 악진이 보병들 사이에서 묵직하게 중심을 잡고 버텨주지 않았다면 조조군은 진즉 무너졌을 것이다.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된 전설, 그 이면에 의성 규호가 존재하고 있었다.

+++

하룻밤은 금방 지나갔다.

과일 몇 조각으로 아침 겸 점심을 대신한 한지호는 비버리 힐스의 대저택에 당도했다.

모샤드 일라이와 가족들은 대궐처럼 넓은 거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지호는 거실 근처의 방 안에서 장침과 단침을 정리하며 자신에게 주문을 외웠다.

“악진에게 했던 것처럼… 모샤드 일라이에게도 똑같이 할 수 있어. 이미 한 번 해본 일이니까.”

규호가 합비에서 악진에게 파단법을 펼쳤던 기억이 생생하다.

파단법을 받고 귀문이 열린 악진은 합비대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로부터 3년 이후 시름시름 앓다가 병사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모샤드 일라이에게는 어차피 남은 시간이 거의 없다.

그렇기에 후유증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파단법이 실패해서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 또는 침을 놓는 도중 부작용으로 모샤드가 변고를 당하는 것이 걱정됐다.

모샤드의 큰딸이자 일라이 패밀리을 이끄는 맨디는 어떤 책임도 묻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은 모르는 것이다.

눈앞에서 모샤드 일라이가 잘못 된다면 다른 가족들이 한지호를 가만히 놔두려 할까.

거창하게 침을 놓았는데 아무 변화가 없어도 사기꾼 취급을 당할 판이다.

한지호는 미리 받아놓은 약속이 크게 의미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부담감은 일반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안 좋은 결과가 나오면 전세계의 언론이 한지호를 공격할지 모른다.

보통 사람은 숨을 쉬기 힘들 정도의 긴장감을 한지호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차이점은 단 하나다.

그는 부담과 긴장을 느껴야 살아있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불타오르는 호승심은 화산보다 더 뜨거웠다.

“이제 됐다.”

머릿속으로 파단법을 점검한 한지호가 방문을 열었다.

왼손에 든 케이스 안에는 모샤드 일라이에게 놓을 여러 개의 침이 들어 있었다.

저벅저벅-

천천히 걸어간 한지호가 긴 복도를 가로질러 거실에 다다랐다.

조용히 대화를 나누던 모샤드 일라이의 가족들이 일순 조용해졌다.

뉴욕에서 날아온 모샤드의 아들 가족을 비롯해 LA에 살고 있는 일라이 패밀리가 거의 다 모였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한지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한지호는 그들 대신 모샤드 일라이를 바라봤다.

그는 간병인 두 명의 부축을 받으며 거실 중앙의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잘 부탁드려요, 닥터 한.”

맨디가 온 가족들을 대신해서 한지호에게 말을 건넸다.

한지호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모샤드 일라이에게로 다가갔다.

많은 사람들, 특히 환자의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시간으로 침을 놓아야 한다.

일반적인 침술도 아니고 귀문을 여는 위험천만한 파단법을 펼쳐야 했다.

유례가 없는 상황이지만, 한지호는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후돈과 하후연, 허저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조에게 눈을 똑바로 뜨고 할 말을 다 했던 규호의 강심장이 한지호의 왼쪽 가슴에도 똑같이 박혀서 뛰고 있다.

그는 조심스런 손길로 모샤드 일라이의 상의를 벗겨냈다.

생기와 함께 맑은 정신을 잃은 세계 스포츠계의 전설에게 최후의 숨결을 불어넣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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