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214화 (214/255)

# 214

2장, 최후의 숨결 (1)

“후욱- 후욱-.”

숨소리가 무척 크고 거칠었다.

왕년에 신체활동이 왕성했던 사람들의 특징이다.

한 때 지구에서 가장 강한 남자로 손꼽혔던 모샤드 일라이는 비쩍 마른 노인이 됐다.

하지만 보통 사람보다 두 배는 큰 숨소리가 그의 왕년을 증명하고 있었다.

방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넓은 침실에 들어선 한지호는 주위 환경부터 확인했다.

간병인 두 명이 상시로 모샤드 일라이를 지키고 있었다.

그가 화장실을 가거나 식사를 할 때 두 명의 간병인이 손발이 되어준다.

모샤드 일라이의 건강을 관리하는 의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재활 병동에서 쓰이는 운동 기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 전까지는 모샤드 일라이가 침실 안에서 가끔이라도 재활 운동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주치의로부터 시한부 선고를 받고 난 다음 그의 상태는 급격히 악화됐다.

지금은 한지호와 큰 딸 맨디, 매니저 리오가 문을 열고 들어왔음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저 침대에 누워 멍하게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링겔을 꽂고 바이탈을 체크하며 누워있는 모습은 죽음을 앞둔 무기력한 노인다웠다.

“파파.”

중년에 이른 맨디는 아버지인 모샤드 일라이를 다정하게 불렀다.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부모에게 자식은 영원히 어린 아이와 같다.

마찬가지로 자녀에게도 부모는 영원히 파파, 마마인 것이다.

스으윽-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모샤드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맨디를 바라보는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흐리멍텅한 눈빛도 정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맨디는 의자에 앉아 아버지 모샤드 일라이의 손을 꼭 잡았다.

큰딸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다시 고개를 돌린 모샤드는 멍한 표정으로 천장만 바라봤다.

그러다 한 번씩 히죽거리며 웃었지만, 의미가 담긴 것 같진 않았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상태가 좋지 않다.

파킨슨 병 말기에 보이는 전형적인 증상이다.

한지호는 말없이 맨디의 옆에 앉았다.

침대 가까이에 앉아 모샤드를 돌볼 수 있게끔 의자가 여럿 준비 돼 있었다.

“손을 잠시….”

한지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맨디가 꼭 잡고 있던 모샤드 일라이의 손을 넘겨줬다.

그녀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져 있는 게 보였다.

매일 보는 아버지의 상태가 점점 나빠지는 것이 속 상할 것이다.

한지호는 짠한 기분이 들었지만 감정을 억눌렀다.

진맥을 할 때는 최대한 냉정한 마음가짐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 치의 사심도 깃들이지 않고 객관적인 정보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만큼 약하지 않아.’

모샤드 일라이의 맥은 한지호가 예상했던 것보다 강하게 뛰고 있었다.

아주 작은, 사소하게 넘어갈 수 있는 차이점에서부터 단서를 찾아나가야 한다.

한지호는 눈을 감고 모샤드 일라이의 맥박을 감지하기 위해 온정신을 집중했다.

맨디와 리오, 그리고 간병인은 한의사가 진맥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

그들은 혹시 한지호에게 방해가 될까봐 숨소리도 크게 내지 않았다.

“됐습니다.”

잠시 후 눈을 뜬 한지호가 모샤드 일라이의 손을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모샤드는 마치 고목나무처럼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누워서 천장을 보는 것 외에는 모든 행위가 무의미한 것 같았다.

그때였다.

“으음… 크흠.”

가만히 누워만 있던 모샤드가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침대에서 조금 떨어져있던 간병인이 급히 다가왔다.

간병인은 익숙한 동작으로 모샤드의 몸을 일으켜세웠다.

침대 가까이 앉아있던 맨디와 한지호는 자연스레 자리를 비켜줬다.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 침대에서 일어난 모샤드 일라이는 불안한 걸음걸이로 느리게 걷기 시작했다.

별 일은 아니었다.

제발로 화장실에 가는 것이다.

“이럴 때는 또 괜찮아 보이는데 말이에요…….”

맨디가 아쉬운 듯 화장실로 향하는 모샤드 일라이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말했다.

간병인의 부축을 받지만 자기 걸음으로 화장실에 가서 용변을 해결하는 게 어디인가.

지금 이 모습만 보면 모샤드 일라이의 상태는 나빠 보이지 않는다.

파킨슨 병 말기로 의식이 흐려졌다는 것은 물론,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는 게 의아할 정도였다.

한지호는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가끔은 의식이 돌아오기도 합니까?”

“네, 아주 가끔씩은……. 간병인들의 말에 의하면 하루에 한 번 정도는 짧게 정신을 찾는다고 해요. 내 이름을 부르거나 손자들 이름을 부르며 안부를 물어볼 정도로. 하지만 그 시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어요.”

“그렇군요. 아직 완전히 의식이 넘어간 상태는 아닙니다. 파킨슨 병 말기 증상이지만, 아예 손을 쓸 수 없는 최종기는 멀었다는 것이죠.”

“그러면 혹시?”

한지호이 말에 맨디가 눈을 반짝였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리오도 집중하는 얼굴이었다.

한지호는 섣부른 기대를 주지 않기 위해 고개를 저으며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파킨슨 병 말기를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근육이 완전히 퇴화되지 않았고, 이따금 의식이 돌아오는 상태라면 일시적인 충격요법을 쓸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아…….”

맨디는 살짝 실망한 눈치였지만 이내 감정을 다스렸다.

한지호를 급히 모셔올 때 기대했던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리오에게 이야기를 들으셨겠지만, 잠시라도 아버지의 정신이 돌아온 상태에서 대화를 나누는 걸 원할 뿐이에요. 그것만 가능하다면 무엇이든 해드릴 수 있어요.”

리오가 말하는 것과 혈육인 큰딸 맨디가 말하는 것은 느낌이 다르다.

아무래도 당사자인 만큼 더 절절한 진정성을 담아서 말을 했다.

한지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10초 남짓한 시간이지만, 그는 상당히 깊게 고민을 했다.

그러나 맨디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성공 가능성은 절반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방법을 시도하면 가뜩이나 좋지 않은 모샤드 일라이에게 무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애매했다.

방 안이 공기가 다소 무거워졌다.

절반의 가능성이라도 방법이 있다고 말한 사람은 한지호가 유일하다.

엄청난 몸값을 자랑하는 미국 최고의 의사들도 파킨슨 병 환자의 의식을 인위적으로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했었다.

그런 점에서는 한지호를 LA로 부른 보람이 있었다.

하지만 절반이라는 확률, 그리고 모샤드 일라이의 건강에 무리가 갈 수 있다는 말이 가시처럼 걸렸다.

결국 선택은 가족들의 몫이다.

한지호도 그것을 알기에 침묵을 지킬 따름이었다.

철컥-

그때 모샤드 일라이가 침실 안에 딸린 화장실을 사용하고 나왔다.

간병인의 부축을 받고 절뚝거리며 침대로 돌아오는 그의 얼굴에서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모샤드 일라이는 맨디와 리오, 한지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다시 침대로 돌아가 편하게 누운 채 멀뚱멀뚱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본 맨디가 결단을 내렸다.

“주치의가 시간이 한 달도 남지 않았다고 했어요. 어쩌면 일주일, 혹은 며칠이 될지도 몰라요. 그 전에 파파의… 아버지의 원래 모습을 보고, 가족들과 함께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싶어요. 어떤 책임도 묻지 않을테니 도와주세요, 닥터 한.”

더 이상의 긴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한지호는 맨디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의 의지를 확인한 다음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단 한 번의 기회밖에 없을 겁니다. 하루 정도 준비 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뉴욕에 간 남동생 가족이 내일 아침 도착할 거에요. 다른 가족들은 전부 LA에 살고 있고.”

“그럼 내일 오후에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시도를 해보겠습니다.”

“네. 가족들에게도 너무 기대하지 말라고 미리 말을 해둘게요.”

“고맙습니다.”

한지호는 자신의 부담을 덜어주려 애쓰는 맨디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보통 부모가 어마어마한 성취를 이루면 자식들이 망나니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세계 최고의 권투선수이자 억만장자인 모샤드 일라이를 아버지로 둔 큰딸 맨디는 세간의 통설과 달리 무척 성숙한 사람이었다.

맨디에게 마지막으로 듬직한 아버지의 모습을 찾아줄 수 있을까.

한지호는 침대에 누워있는 모샤드 일라이를 쳐다보며 각오를 다졌다.

그는 안 되는 것을 되게 하기 위해 미국까지 날아왔다.

이번에도 또 한 번 기적을 써내려갈 차례였다.

+++

비버리 힐스의 대저택에서 모샤드 일라이와 맨디를 만난 한지호는 숙소로 안내를 받았다.

그의 숙소는 LA에서 가장 비싼 호텔의 스위트 룸이었다.

모샤드 일라이의 가족을 대표하는 맨디는 어렵게 모셔온 한지호를 위해 최고의 대우를 해줬다.

만약 잠깐이라도 모샤드의 정신을 회복시켜준다면 그녀가 치료비로 어떤 대가를 지불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지호에게 남은 시간은 하루.

내일 오후에는 모샤드 일라이의 가족들이 비버리 힐스로 모인다.

기대감을 품고 모여든 가족들 앞에서 망신을 당할 수는 없다.

자칫하면 아시아에서 온 사기꾼 취급을 받을지도 모른다.

맨디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지만, 다른 가족들은 흥분해서 한지호를 몰아붙일 수도 있다.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치료에 성공하고 싶었다.

엄밀히 말하면 일반적인 치료는 아니다.

하지만 잠깐이라도 의술의 힘으로 파킨슨 병을 극복할 수 있다면 기념비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스위트 룸의 푹신푹신한 침대에 대자로 누운 한지호는 파킨슨 병에 대해 생각했다.

치매라고 불리는 알츠하이머와 파킨슨 병은 확실하게 다른 질병이다.

다만 말기 증상이 비슷하기에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파킨슨 병이 말기에 다다르면 정신이 흐려지고, 언어 능력이 떨어지며 이상 행동을 하게 된다.

알츠하이머와 달리 근육의 기능까지 퇴화 되기에 어떻게 보면 더 심각한 질병이다.

모샤드 일라이는 근육의 퇴화 정도는 심하지 않았다.

증상이 심화되면 지금처럼 자기 발로 화장실을 가기도 힘들어진다.

간병인의 부축을 받지만 아직 걸을 수 있다는 것은 파킨슨 병이 끝까지 진행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한지호도 해결책을 강구할 수 있었다.

“귀문을 열어야겠지.”

그가 읊조린 혼잣말이 심상치 않게 들렸다.

귀문(鬼門)을 여는 것이 모샤드 일라이의 정신을 인위적으로 회복시킬 유일한 방법이다.

본래 귀문은 말 그대로 귀신이 드나드는 문이라는 뜻이다.

점성술사나 불가의 승려, 산 속의 도인들이 점을 보거나 주술을 펼칠 때 쓰는 단어다.

그러나 한의학에서도 귀문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기(氣)의 존재를 믿는 동양의 전통의학이 영(靈)의 존재를 부정할 리 없다.

귀문은 인간의 기와 영을 통하게 만드는 관문이다.

침술과 대혈법으로 귀문을 열면 온몸의 기운이 활화산처럼 불타오르게 된다.

그 영향으로 무의식 밑에 가라앉은 정신도 생생하게 깨어날 수 있다.

한지호는 이미 귀문을 열어본 경험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전생인 규호가 한 일이지만 말이다.

“악진…….”

어느새 눈을 감고 전생의 기억을 돌아보고 있는 한지호의 입에서 위나라 맹장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악진(樂進).

문겸(文謙)이라는 자(字)를 쓰며 항상 돌격대의 선봉에 섰던 맹장 중의 맹장.

특히 합비에서 장료와 함께 손권의 대군을 막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바로 그 합비대전이 벌어지기 직전, 규호는 악진의 부탁을 받고 귀문을 열어줬다.

그로인해 악진은 믿을 수 없는 전공을 세웠지만, 합비대전이 끝난 후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현실에서 풀기 힘든 꽉 막힌 문제의 열쇠는 언제나 전생에 숨어 있다.

모샤드 일라이가 앓고 있는 파킨슨 병에 도전하기 하루 전, 한지호는 악진과의 만남을 떠올리며 방법을 찾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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