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213화 (213/255)

# 213

1장,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쏴라 (2)

“메이맥 매니저님.”

“리오라고 편하게 불러주세요.”

통상 서양에서 성을 떼고 이름을 부르는 건 제법 가까운 사이일 때나 가능한 일이다.

리오 메이맥은 한지호와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려 들었다.

가만히만 있어도 매력이 철철 넘치는 그녀가 미소와 함께 이름만 부르라고 한다.

어지간한 돌부처라도 스르르 마음이 녹아버릴 것이다.

하지만 한지호는 긴장의 끈을 풀지 않았다.

눈앞에 앉아있는 여자는 데이트 상대가 아니다.

아주 무겁고 진지한 협상을 위해 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에이전시의 매니저다.

별 생각 없이 그녀의 제안을 덥썩 물어버리면 재앙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

그는 다시 한 번 리오의 말을 자신의 입밖으로 꺼내며 확인을 했다.

“주치의가 시한부를 선고했을 정도면 모샤드 일라이의 상태는 매우 위중하겠죠?”

“혼수상태에 들어간 것은 아니에요. 의식은 있고,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 화장실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소량이지만 식사도 하고 있어요.”

리오의 말은 꽤 많은 정보를 전달해줬다.

파킨슨병이 심화 단계에 이르면 침대에서 일어날 수조차 없다.

간병인의 도움을 받을지언정 화장실을 가는 게 가능하다는 건 파킨슨병 자체가 최후까지 진행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치의가 시한부 판정을 내린 걸 보면 다른 문제가 더 있는 모양이었다.

아마 파킨슨병 외에도 당뇨나 고혈압, 또는 손쓸 수 없는 말기 암이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

“화장실을 간다는 건 근육이 완전히 퇴화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식사를 하는 걸 보면 소화 기능도 남아있고. 문제는 역시 맑은 정신이겠군요.”

“네, 맞아요. 예전에는 하루에 몇 시간이라도 맑은 정신을 보여줬었는데 지금은 달라졌어요. 가족들은 많은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닥터 한. 그저 모샤드 일라이가 먼 길을 떠나기 전에 맑은 정신으로 인사를 나누고 유언을 듣고싶어해요.”

모샤드 일라이의 가족들이 원하는 바를 조금 더 명확하게 알 것 같았다.

리오에게서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는 황당한 느낌이 덜했다.

물론 여전히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치료 의뢰이기는 하다.

한지호가 아니라 세계의 어떤 의사라도 섣불리 뛰어들지 못 할 일이다.

대부분은 말을 듣자마자 거절할 게 뻔하다.

그러나 한지호는 달랐다.

처음에는 그도 거절이라는 단어부터 떠올렸다.

다만 미국에서 홍콩까지 한달음에 날아온 성의를 생각해서 부연 설명을 들어보자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리오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마음 깊은 곳에서 도전 정신이 꿈틀거렸다.

무인들은 이것을 호승심이라 부른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에게 도전하며 한계를 시험하려는 의지, 때로는 목숨까지 거는 태도가 바로 호승심이다.

한지호가 이제껏 불가능해 보이는 치료에 도전해온 것도 누구보다 호승심이 강하기 때문이었다.

무인이 아닌 의사로 살아가는 한지호의 호승심은 질병을 향해 불타오른다.

파킨슨 병은 알츠하이머와 함께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과학 기술이 고도로 발달했어도 아직까지 정복이 불가능한 질병이다.

게다가 환자는 다른 사람도 아닌 모샤드 일라이다.

각 국의 대통령들이 병문안을 찾아갈 정도의 스포츠 전설이다.

요즘 떠오르는 월드 스타들과는 격이 다르다.

그야말로 전세계와 전연령대가 하나 되어 흠모하는 영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달라는 것은 아닌데…….”

“바로 그렇죠.”

한지호가 영어로 혼잣말을 읊조렸고, 리오는 기다렸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기 시작한 그녀의 얼굴에서 생기가 넘쳐 보였다.

장거리 비행의 피로를 잊고 한지호와의 대화에 완전히 몰입한 모습이다.

리오는 한지호를 설득하기 위해 수천 km의 거리를 날아왔다.

기회를 엿본 그녀가 바로 말을 이었다.

“만약 치료 도중 불미스러운 결과가 발생해도 가족들은 책임을 묻지 않을 거라고 합니다. 원한다면 계약서를 작성할 수도 있어요.”

“적어도 덤태기를 씌우지는 않겠다는 것이군요.”

“그거야 당연한 일이죠. 주치의가 이미 시간이 많지 않다는 진단을 내렸으니……. 마지막으로 모샤드 일라이와 대화를 나누길 원하는 가족들의 마음을 알아주세요, 닥터 한.”

리오는 마치 모샤드 일라이의 가족이 된 것처럼 간절하게 말했다.

어쩌면 에이전시 소속 매니저로서 모샤드 일라이와 그 가족들을 자주 만났기에 공감을 하는 건지 모른다.

한지호는 대화가 길어질수록 선택을 내리기 어려워졌다.

100% 거절에서 점점 80%, 70% 60%로 마음이 움직이고 있었다.

리오의 말에 의하면 가족들은 모샤드 일라이가 건강을 회복하는 것은 기대하지 않는다.

치료 과정에서 그가 죽음에 이르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했다.

다만 파킨슨 병 증상을 잠시라도 이겨내고 맑은 정신을 회복하게 해주는 것, 오직 그것만을 바라는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리오를 홍콩에 보냈으니 간절함을 의심할 여지는 없다.

“하아- 이거 참.”

한지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아쉬울 게 없는 처지다.

이미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고, 두 곳의 한의원과 K-메디컬 타운에 집중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다.

모샤드 일라이를 치료할 수 있는 것은 대단한 영광임에 분명하지만, 어찌되었건 리스크를 감수하며 뛰어들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계산적으로만 살아왔다면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오지도 못 했을 것이다.

한지호는 운명의 부름을 외면하지 않았다.

자신의 의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특히 자신 외에는 다른 대단이 없는 경우라면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한다.

이것이 칼 대신 침을 잡은 한지호가 천하를 얻어가는 방법이었다.

“해봅시다. 시간이 많지 않을테니 더 자세한 이야기는 비행기 안에서 듣도록 하고.”

“와우! 정말이세요?”

리오가 믿기지 않는 듯 탄성을 흘렸다.

한지호는 이미 결정을 내린 사안에 대해 두 번 고민하지 않는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내일까지는 홍콩에서 진료를 해야 합니다. 그 다음 스케줄은 조절해 봐야죠. 당장 한국에 전화를 걸어 일정을 조율하느라 바빠지겠군요.”

“고마워요, 닥터 한! 정말 고마워요! 나보다 모샤드 일라이의 가족들이 훨씬 더 고마워 할 거에요. 닥터 한을 미국까지 모셔오는 비용에 한계를 책정해두지 않았어요.”

한지호는 먼저 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었다.

리오의 말을 들으니 그러기를 잘한 것 같았다.

모샤드 일라이의 자산은 수천억 원에 달한다.

지금은 그의 가족들이 자산을 관리하고, 당연히 한지호에게 치료비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피곤할 텐데 좀 쉬어요. 우리 이야기는 내일 다시 합시다.”

한지호는 쿨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츠 칼튼 객실은 미팅 장소이자 리오 메이맥이 홍콩에서 지낼 숙소다.

그는 빠르면 내일 저녁, 늦으면 모레 아침 홍콩에서 바로 비행기를 타고 리오와 함께 미국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 밤 내내 한국에서의 스케줄을 조정해야 한다.

빈틈없이 꽉 찬 스케줄을 바꾸는 건 장거리 비행보다 더 피곤한 일이다.

“와인이라도 한 잔 어때요?”

리오가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에 어울리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와인을 권했지만 한지호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합니다. 늦지 않게 모샤드 일라이를 보러 떠나려면 정리해야 될 일들이 많아서. 와인은 비행기 안에서 같이 마시도록 하죠.”

완곡하게 거절을 한 그가 객실을 빠져 나왔다.

라틴 미녀가 호텔 룸 안에서 단둘이 와인을 마시자고 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한지호는 자신이 대견스러운 듯 객실 문 앞에서 스스로의 뺨을 어루만지며 입술을 달싹였다.

“일 하자, 일.”

그가 맞이한 새로운 도전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잠깐이라도 파킨슨 병을 극복해내는 것.

오직 한지호만이 도전할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리오 메이맥을 만나서 치료 제의를 수락한 한지호는 나비처럼 가볍게 날아오른 셈이다.

이제 벌처럼 매섭게 파킨슨 병을 쏘아버리기만 하면 된다.

모샤드 일라이가 남긴 전설적인 명언,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쏴라는 말이 그의 뇌리에 맴돌고 있었다.

+++

휘익- 휘이익-

살짝 열어둔 창문 사이로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넓은 뒷좌석에 반쯤 눕다시피 앉은 한지호는 낯선 풍경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장거리 비행을 마치자마자 차에 탔지만 그렇게 피곤하지는 않았다.

비행기 1등석은 침대나 다름 없어서 휴식을 취하기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모샤드 일라이의 에이전시인 I.A.C에서 준비해둔 벤츠 S 클래스는 안락하기로 둘째라면 서러운 자동차다.

뒷좌석에서 발을 쭉 뻗은 한지호의 얼굴도 말끔했다.

LA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퍼스트 클래스 전용 라운지에서 샤워를 했기 때문이다.

얼굴색만 보면 10시간이 넘는 장거리 비행을 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한지호 덕분에 덩달아 퍼스트 클래스를 타고 LA로 돌아온 리오 메이맥의 표정도 밝았다.

그녀는 비행기 안에서 한지호와 제법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남미의 핏줄은 어디를 가지 않는지 사교성이 무척 좋은 편이었다.

한지호도 시원시원하고 쾌활한 리오와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장거리 비행의 지루함을 달랬다.

모샤드 일라이와 그 가족들에 대한 정보도 충분히 브리핑을 받았다.

부우우웅!

한지호와 리오를 태운 차가 탁 트인 고속도로를 막힘 없이 내달렸다.

드넓은 대지를 자랑하는 미국답게 10차선 도로가 쭈욱 펼쳐져 있었다.

LA 공항에서부터 도로를 질주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순간 창밖의 풍경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자동차가 도심지 내부로 들어가는 듯 싶더니 다시 한적한 교외로 빠져나왔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커다란 저택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지역이다.

서울의 평창동이나 성북동, 한남동은 명함도 못 내밀 것 같았다.

헐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으리으리한 대저택이 줄지어 서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실제로 이곳에 사는 헐리우드 스타들도 많다.

한지호는 그 이름도 유명한 비버리 힐스(Beverly Hills)에 당도한 것이다.

끼이익!

그를 태운 차가 쇠창살 빽빽한 현관 앞에 잠시 멈춰섰다.

곧이어 현관문이 좌우로 열렸다.

자동으로 열리는 현관을 지나 차를 몰고 더 들어가야 모샤드 일라이의 저택이 나온다.

저택 건물로 가는 길에는 잘 꾸며진 정원과 2개의 수영장이 손님을 먼저 맞이하고 있었다.

“다 왔어요. 먼 길을 왔네요.”

리오가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한지호도 그녀를 따라 내린 다음 사방을 돌아봤다.

확실히 미국은 스케일이 다른 나라이긴 하다.

“어서 와요-!”

그때 저택 안에서 누가 뛰어나왔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통통한 체형을 지닌 중년 여성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있었다.

리오는 자연스럽게 그녀와 포옹을 나누고 한지호를 소개했다.

“닥터 한, 이쪽은 모샤드 일라이의 첫째 딸 맨디에요.”

모샤드 일라이가 70대를 훌쩍 넘겼으니 그의 딸도 중년일 수밖에 없었다.

맨디는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손을 내밀었다.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요, 닥터 한. 우리 아버지를… 잘 부탁해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람 좋아 보이는 맨디와 악수를 나눈 한지호는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맨디와 리오가 함께이기에 대저택 안에서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모샤드 일라이는 2층에서 지내고 있다.

침실이라고 하지만 웬만한 아파트보다 더 넓은 공간에서 간병인의 수발을 받으며 생활한다.

전문 의료진도 저택에 상시 대기 중이고, 주기적으로 LA 최고의 의사가 방문한다.

한지호는 저택 내부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2층 침실 문앞에 섰다.

2층의 여러 침실 중에서 가장 크고 넓은 방이다.

이 너머에 주먹 하나로 세계를 열광시켰던 전설, 모샤드 일라이가 누워있다.

“들어갈까요?”

모샤드의 큰딸이자 이 저택의 실질적 주인인 맨디가 한지호에게 질문을 던졌다.

한지호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번에도 운명에게 몸을 맡겼다.

파킨슨 병이라는 인류의 난제(難題)에게 가는 길이 활짝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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