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
9장, 시작이 반이다 (2)
문재영 부원장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옆으로 원화 정의 네트워크 소속 원장들 중에서 최연장자인 최 원장이 보였다.
최 원장도 문재영 부원장처럼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항상 쾌활한 최 원장이 이런 표정을 지을 때가 많지는 않다.
한지호는 두 사람을 쳐다보며 턱 밑을 쓰다듬었다.
그 역시 고민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과연 무엇이 세 사람을 심각하게 만들었을까.
다행히 원화 정의 네트워크에 문제가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서울과 홍콩의 원화 한의원, 그리고 수도권에 자리잡은 네 곳의 네트워크 소속 한의원은 1년 365일 전성기를 구가하는 중이다.
K-메디컬 타운에 입주할 원화 정의 한의원과 원화 아카데미도 착착 준비가 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걱정할 거리가 전혀 없는 태평성대다.
하지만 세 사람은 풀기 힘든 의학적 화두를 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한지호는 최규열과 신영준, 양성문을 초대한 집들이에서 신약 개발 아이디어를 풀어놓았다.
바로 한의학에서 흔히 쓰이는 약재인 마황(麻黃)을 연구해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마황은 감기의 초기 증상을 치료할 때도 자주 쓰인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다이어트 한약의 주 재료로 널리 사용되는 추세다.
그러나 과다하게 복용하게 되면 부작용을 초래한다.
마황의 주 성분은 에페드린과 슈도에페드린이다.
에페드린은 기관지 근육을 이완시키고, 슈도에페드린은 이뇨 작용을 돕는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두 성분이 신체의 교감 신경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방에서는 마황을 흥분제로 처방하기도 했었다.
감기의 초기 증상뿐 아니라 다이어트 한약에도 마황이 쓰이는 건 대사량을 큰 폭으로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운동을 하지 않아도 교감 신경이 자극 되고, 신체 내부 기관이 흥분해서 에너지를 발산하기 때문에 열량이 소모되어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약이 그렇듯 마황도 과다하게 복용하면 심각한 부작용이 따를 수밖에 없다.
인위적으로 교감 신경을 자극하기 때문에 몸에 무리가 간다.
심장이 심하게 뛰고, 두통과 미식거림에 이어 손이 저릴 수도 있다.
또한 마황은 금방 내성이 생기기 때문에 한 번 복용한 다음에는 더 많은 양을 처방해야만 한다.
이렇듯 확실한 효능만큼 부작용과 한계가 많은 약재가 마황이다.
물론 한지호가 마황에서 영감을 얻은 이유는 분명히 있었다.
마황 중 상품이라고 하는 초마황도 가격이 그리 비싸지 않다.
저렴하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지만, 주 성분으로 인한 효과 하나는 확실하다.
신약을 개발해 대량으로 공급하기 딱 알맞은 약재였다.
감치 치료, 다이어트, 천식 등 다양한 영역에서 쓰여온 에페드린과 슈도에페드린을 잘만 연구하면 뭔가 나와도 나올 것 같았다.
“하루 아침에 아이디어가 나오지는 않겠지만… 정말 어렵네, 어려워.”
최 원장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가 탄식을 내뱉자 문재영 부원장도 고개를 숙이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저도 고민해봤는데 이렇다 할 생각이 떠오르지 않네요. 죄송합니다, 원장님.”
문재영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마황을 이용한 신약 개발 아이디어를 생각해보라는 한지호의 말을 듣고 진심으로 깊게 고민한 것이다.
순한 인상의 문재영이 지나치게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니 꼭 한지호가 사람을 괴롭힌 느낌이었다.
한지호는 가볍게 웃음을 흘리며 손사래를 쳤다.
“하하, 아닙니다. 이렇게 간단히 나올 아이디어라면 모든 제약회사가 떼돈을 벌었겠죠. 미한약품의 신영준 회장님도 8년에 걸친 연구 끝에 신약을 개발하셨으니까요.”
“신 회장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지. 8년을 뚝심있게 밀어붙인 덕에 미한약품의 주가를 1조 원 이상으로 키우셨으니.”
최 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식에 관심이 많은 그는 미한약품 신영준 회장을 신처럼 떠받들었다.
한지호에게 따로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할 정도였다.
군인 출신으로 제약회사 오너가 되어 시가총액 1조 원을 넘겼으니 입지전적인 인물은 확실하다.
그런 사람과 아무렇지 않게 어울리며 식사를 하는 한지호가 새삼 대단한 것이다.
한지호는 한결 같은 최 원장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마황 이야기를 꺼낸 건 두고두고 고민을 해보자는 뜻입니다. 다음 번 네트워크 정기 모임에서도 신약 개발을 의논해볼 겁니다. 머릿속으로 신약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언젠가 딱 알맞은 아이디어가 떠오를지 모르니까요.”
“그렇지. 아예 생각도 안 하고 있는 것과는 많이 다를 수밖에. 샤워를 하다가도 유레카를 외치며 아이디어가 떠오를지 모르고 말이야.”
최 원장은 괜히 연장자가 아니었다.
네트워크의 큰 형답게 한지호의 의도를 정확히 알아차렸다.
문재영은 성격처럼 착실하게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이며 각오를 다졌다.
“저는 원화 아카데미에는 들어가지 않지만, 신약 개발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가 우리 문 부원장님 믿고 밖으로 싸돌아다니는 거 알죠?”
조기운이 독립한 지금, 한지호의 가장 든든한 오른팔은 문재영 부원장이다.
그가 서울 원화 한의원을 잘 맡아주기 때문에 홍콩을 비롯한 세계로 뻗어나가며 진료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문재영은 역삼동 서울 원화 한의원의 핵심 인력이기에 K-메디컬 타운에는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
원화 정의 한의원은 신입 한의사들 위주로 의료진을 꾸렸고, 원화 아카데미는 의료 기관이 아닌 연구 기관이다.
하지만 신약 개발에 대한 아이디어는 누구라도 낼 수 있다.
원화 정의 네트워크에 소속된 수많은 사람들 중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키 포인트 역할을 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중요한 사실은 한지호가 슬슬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는 최 원장과 문재영이 모인 자리에서 마황을 연구하겠다는 아이디어를 나눴다.
K-메디컬 타운 입주를 앞두고 그는 물밑에서 묵직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드라이브를 걸면 워커 홀릭답게 미친 사람처럼 몰두할 것이 분명하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성경 구절은 한지호를 위한 격언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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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불경기의 여파로 예년처럼 크리스마스 캐롤이 거리를 뒤덮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연말은 연말이다.
백화점과 대형 마트는 소비 심리를 증가시키기 위해 대형 트리를 설치했다.
가수들도 크리스마스와 연말 시즌을 맞춰 특집 앨범을 발매하고 콘서트 홍보에 열을 올렸다.
국제적인 불황으로 분위기가 침체됐지만, 연말은 1년에 몇 번 없는 대목이다.
그러나 한의원들은 연말이면 매출이 줄어드는 게 일반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송년회를 명목으로 술 약속을 잡고, 건강 관리는 새해로 미루기 때문이다.
보약 판매가 늘어나는 연초와 설날 즈음이 한의원의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원화 한의원은 연말에도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
서울 역삼 M 타워의 경우 2달 전부터 예약이 밀려 있었다.
연말이나 연초를 가릴 것 없이 서울 원화 한의원에서 한지호에게 원장 특진을 받으려면 2달을 기다려야 한다.
홍콩 리펄스베이는 서울보다는 상황이 낫지만 예약이 밀리긴 마찬가지였다.
중국 공산당 상무위원이 된 추위안차오와 대륙의 여신 금링링을 치료한 게 알려지며 홍콩에서도 한지호의 유명세가 정점을 찍은 탓이다.
적어도 원화 정의 네트워크 소속 한의원들에게 연말 불경기는 남의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한지호는 여유가 철철 넘쳐 흐르는 표정으로 걷고 있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낸 장소는 광화문에 있는 세종문화회관이다.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올라온 그는 곧장 공연장으로 들어갔다.
로비에서 오래 서성이다간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기 때문이다.
연예인보다 더 유명인사가 된 한지호의 등장이 알려지면 로비가 소란스러워질 게 뻔했다.
공연장 안에서도 다른 사람들과 섞일 가능성은 적었다.
세종문화회관 메인 홀에는 별도의 VIP 존이 있다.
객석 2층과 3층의 좌우를 살펴보면 발코니처럼 툭 튀어나온 자리가 보인다.
각 발코니에는 2명만 앉을 수 있다.
VIP 존으로 들어가는 입구도 별도이기에 조용히 공연을 보고싶어하는 유명인들에겐 딱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왔네? 매진이겠는데.”
한지호는 자신이 앉은 발코니 아래로 보이는 객석을 확인했다.
빈틈을 찾기 어려웠다.
단순한 매진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대감이 무척 뜨거운 것 같았다.
“지호 오빠.”
그때 누군가 한지호를 불렀다.
한지호가 예매한 VIP 존에 들어왔다는 것은 미리 지정된 티켓을 받았다는 뜻이다.
“늦는 줄 알았는데, 다행이에요.”
해맑게 웃으며 자리에 앉은 여자는 다름 아닌 유초아였다.
한창 드라마 후반부 촬영 중인 그녀가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공연장에 온 것이다.
한지호는 환한 얼굴로 유초아를 맞이했다.
“잘 왔어. 시간 내느라 어려웠지?”
“미리 말해놔서 괜찮았어요. 마침 촬영이 없는 날이기도 했구요.”
유초아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원래 드라마가 TV에서 방송 중일 때 배우들은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그녀도 다를 바 없었다.
어젯밤까지 밤샘이나 다름없는 강행군을 소화했었다.
그러나 오늘 하루는 특별히 스케줄을 비웠다.
그나마 여주인공이 아닌 조연이라 분량 부담이 적었고, 유초아가 남몰래 매니저에게 몇 번이나 진심으로 부탁을 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늘이 한지호에게 얼마나 의미있는 날인지 알기에 유초아도 무리를 한 것이다.
슈우우우우-
그때였다.
무대에서 하얀 안개가 피어올랐다.
동시에 객석을 비추던 조명도 순식간에 꺼졌다.
드디어 세종문화회관 메인 홀을 가득 채운 공연이 시작될 징조였다.
사방이 캄캄해졌지만 한지호는 옆자리에 앉은 유초아의 숨결을 뚜렷하게 느꼈다.
유초아도 한지호가 나란히 앉아있는 걸 의식하고 있었다.
예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그녀는 정식으로 TV 드라마에 데뷔를 했고, 완곡하게나마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다음이다.
어색하면서도 설레이는 묘한 기류가 두 사람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둥- 두두둥-!
둘의 심장 박동을 대변하듯 웅장한 드럼 소리가 공연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곧이어 무대 뒤편의 대형 화면에서 누군가의 얼굴이 나왔다.
1988년, 가수 고해진이 대학가요제를 통해 처음 이름을 알렸던 영상이다.
“와아아아아-!”
“고해진! 고해진!”
영상을 본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고해진의 이름을 불렀다.
오늘 공연은 불의의 의료 사고로 투병 생활을 했던 고해진이 팬들에게 처음으로 선보이는 컴백 콘서트다.
게다가 의료 사고 피해자를 위한 고해진 재단을 설립하는 자선 공연이기도 하다.
혼수상태에서 생명을 장담하기 힘들던 고해진은 각고의 노력 끝에 재활 치료를 이겨냈다.
그가 몇 년만에 새로운 앨범을 들고 팬들을 만나는 자리다.
한지호는 고해진으로부터 직접 티켓을 선물 받았다.
자기 손으로 목숨을 구한 사춘기 시절 영웅의 콘서트를 본다는 것, 무척 특별할 수밖에 없는 이벤트다.
이 순간 옆자리에 유초아가 앉아있어 기분이 더욱 좋았다.
파바바박!
1988년의 영상이 끝나고, 화려한 조명과 함께 무대를 가렸던 커튼이 활짝 젖혀졌다.
위풍당당한 밴드와 함께 고해진이 마이크를 들고 서있었다.
그는 왼손을 하늘 높이 들고 소리를 질렀다.
“오늘 콘서트는 팬 여러분과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두 번째 인생을 선물해준 한지호 선생님께 바칩니다! ROCK ‘N ROLL-!”
고해진이 직접 한지호의 이름을 불렀다.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짜릿한 전율이 한지호의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어서 고해진이 힘차게 첫 번째 노래를 불렀다.
죽음의 문턱에서 인생을 다시 살게 된 가수 고해진의 새로운 시작이다.
한지호는 저도 모르게 옆에 앉은 유초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녀는 손을 빼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콘서트의 열기만큼 맞잡은 두 손의 온도도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