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
9장, 시작이 반이다 (1)
유초아가 TV에 나왔다.
드디어 그녀가 출연하는 미니시리즈 드라마가 방영이 된 것이다.
여자 조연이지만 초반부터 비중이 꽤 컸다.
드라마 PD와 작가도 신인 여배우 유초아의 매력을 알아본 것 같았다.
유초아는 유명 배우인 여자주인공과 함께 화면에 잡혀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한지호는 거실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흐뭇한 표정으로 TV를 시청했다.
이 순간, 그는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국민 한의사이자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대표 원장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한 사람의 드라마 열혈 시청자가 되어 TV 속 이야기에 활짝 웃고 있었다.
아마 한지호의 이런 모습이 공개되면 다들 반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평소의 그는 워커 홀릭인 동시에 부드럽지만 늘 진중한 면모를 보여왔다.
외모는 아직 20대라고 해도 믿을 정도지만, 은은하게 풍기는 분위기가 남달랐다.
그렇기에 한지호의 나이가 겨우 30살이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 그는 갑옷처럼 두르고 있던 무게감 넘치는 아우라를 모두 걷어냈다.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TV로 유초아의 얼굴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마냥 어리게만 느껴졌던 유초아가 드라마에서 연기를 하고 있다.
그녀는 한 명의 여배우로서 자리매김을 시작할 것이다.
머지않아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탑스타가 될지도 모른다.
한지호가 봤을 때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차고도 넘쳤다.
“진짜 더 바빠지겠네.”
TV를 보며 혼자만의 휴식을 즐기던 한지호가 혼잣말을 내뱉었다.
여느 삼촌팬처럼 활짝 웃고 있던 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미니 시리즈에 얼굴을 비췄으니 유초아가 유명해지는 건 시간문제다.
정상급 여배우가 되지 않더라도 일반인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예전에도 했던 걱정이지만, 그녀가 더욱 바빠지고 온갖 음해와 질투에 시달리게 될 때 예전처럼 맑고 고운 모습을 지킬 수 있을까.
유초아는 자신이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그녀는 자신보다 한지호를 더 걱정할 정도로 훌쩍 성장했다.
하지만 한지호는 계속 유초아가 신경이 쓰였다.
이 감정이 막내 여동생을 향한 큰오빠의 것이 아님을, 좋아하는 여자가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남자의 마음임을 이제는 한지호도 인정하고 있었다.
지난 번 가평의 호숫가에서 데이트를 할 때 한지호와 유초아는 서로 비슷한 감정을 갖고 있음을 확인했다.
다만 섣불리 마음을 드러내고 키우기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워낙 어릴 때부터 가족처럼 지냈고, 마리아 수녀와 천사원의 다른 아이들도 고려해야 한다.
한지호는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당분간은 키다리 아저씨처럼 유초아가 필요할 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는 것으로 족하다.
국민 여동생으로 불리는 이지은과의 연애가 가슴 아프게 끝났었기 때문에 더더욱 조심스러운 측면도 있었다.
“전화나 해볼까… 촬영 중이려나.”
유초아가 나온 드라마 1화가 끝났다.
한지호는 스마트 폰을 들어 단축키를 눌렀다.
유치하다면 유치하지만 그는 유초아를 1번으로 저장해 놓았다.
띠이이- 띠이이-
건조한 통화연결음이 한참 동안 울렸다.
드라마는 방송이 시작되면 그때부터 살인적인 스케줄이 가동된다.
현장의 배우와 스텝들은 며칠씩 밤을 새는 일도 허다하다.
유초아 역시 조연이라 해도 만만치 않은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을 것이다.
한지호는 아쉬움을 느끼며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 했다.
“여보세요.”
그때 수화기 너머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유초아의 음성이 아니었다.
대신 굵고 걸걸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한지호는 본능적으로 인상을 팍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초아 전화 아닙니까?”
“아, 맞습니다. 한지호 원장님이시지요? 이름이 뜬 것을 보고 전화를 받았습니다.”
“나를 어떻게…?”
“죄송합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초아 현장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실장입니다. 사장님과 초아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원장님.”
그제야 의문이 풀렸다.
유초아의 소속사는 국내에서 손 꼽히는 대형 연예 기획사다.
한지호는 또 다른 VIP 환자를 통해 기획사 사장을 소개 받았고, 유초아에게 오디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줬었다.
그렇기에 매니저도 한지호와 유초아가 천사원에서 함께 자란 가까운 사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초아는 지금 다음 촬영 위해서 새로 메이크업을 하는 중입니다. 한 원장님께 전화 왔었다고 전하겠습니다.”
매니저는 시종일관 예의를 잃지 않고 정중하게 말했다.
실장이라고 했으니 기획사 내부에서 제법 직급이 높은 사람일 것이다.
그만큼 사회생활을 할 줄 알고, 한지호의 명성도 그를 더욱 공손하게 만드는데 일조했을 터였다.
“아닙니다. 촬영 중이라 바쁠 텐데 괜히 신경쓰이게 했네요. 다음에 다시 전화하겠다고, 보약 잘 챙겨 먹으라고만 전해주시겠습니까?”
“네, 원장님.”
“그럼 수고하세요.”
전화를 끊은 한지호는 민망한 듯 괜히 웃음을 터트렸다.
유초아가 연예인이 됐다는 사실을 아직까지 100%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매니저가 전화를 받을 수도 있는데 남자 목소리가 들리자 순간 불쾌해졌던 것이다.
“샴페인은 다음에 같이 터트려야지.”
한지호는 유초아의 안방극장 데뷔를 축하하기 위한 샴페인을 미리 사놓았다.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렵다는 돔 페리뇽 로즈 에디션이 그의 와인 셀러에서 잠자고 있었다.
저벅저벅-
그는 광활하다고 표현해도 될 만큼 넓은 거실을 가로질로 부엌으로 걸어갔다.
샴페인 대신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낸 한지호가 단숨에 목을 축였다.
잘 나가는 연예인과 재벌 2세들이 산다는 청담동 고급 빌라를 구입해서 혼자 쓰지만 오늘따라 조금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유초아는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의학으로 천하를 제패하겠다던 한지호는 자신이 지금 어디쯤 와있는지 돌아봤다.
1년에 100억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국제적 유명인사가 됐으니 절반 정도는 걸어온 것일까, 아니면 아직도 출발점 언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금방 맥주 한 캔을 다 마신 한지호는 다시 평소처럼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어디까지 와있든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처음 기대했던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천하(天下)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오늘은 아무 생각 없이 유초아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며 기분좋게 잠들면 될 것 같았다.
다시 냉장고를 열고 맥주 한 캔을 더 꺼내는 한지호는 오랜만에 주어진 고독한 휴식을 즐길 준비를 끝냈다.
+++
아주 귀한 손님들이 찾아왔다.
청담동 빌라로 이사를 하고 나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한 번에 들인 건 처음이었다.
Y대 암센터의 수장 최규열과 미한약품의 신영준 회장, 보건복지부 장관 양성문이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각각 학계와 재계, 정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물들이다.
한 분야를 움직이는 국내 최고의 거물 세 명이 한지호의 집에 모인 것이다.
물론 이들을 초대한 한지호는 세 명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
인생의 선배이자 원로로 세 사람을 존중하지만, 상하 수직관계가 아닌 수평적인 관계였다.
나머지 셋도 한지호를 후배보다는 젊고 어린 동료로 여겼다.
사실 나이로 따지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일반적인 30살 남자라면 Y대 의대에서는 고작해야 레지던트, 미한약품에서는 까마득한 신입사원, 보건복지부에서는 장관과 눈도 못 마주치는 말단 직원이다.
한지호는 본인의 능력으로 30년의 세월을 점프해버린 셈이었다.
국내 최고의 거물들을 한 자리에 모은 그는 집 주인이라는 이유로 기다란 대리석 테이블 상석에 앉았다.
은은한 상아빛이 아름다운 대리석 테이블 위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양식부터 일식, 중식에 이르기까지 한지호가 직접 차린 음식은 아니었다.
강남에 위치한 5성급 호텔 레스토랑의 케이터링 서비스였다.
원래 5성급 이상의 최고급 호텔 레스토랑에서는 케이터링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다.
정해진 장소가 아닌 곳에서는 음식의 질이 떨어질 수 있고, 예상 못한 트러블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있다.
한지호는 전면에 나서지 않았지만 고해진을 고치며 국민 한의사를 넘어 국민 영웅으로서 지위를 단단히 다졌다.
작금의 대한민국에서 그의 이름은 게임 속 치트키나 마찬가지다.
문의를 받은 호텔에서도 높은 콧대를 꺾었다.
오히려 최고급 요리 코스와 함께 음식을 담을 모든 집기까지 전부 세팅해줬다.
레스토랑 홀 책임자 위치의 호텔 직원들이 직접 방문해서 케이터링을 챙겼으니 얼마나 극진한 대우를 받았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다.
합당한 비용을 계산했지만, 세상에는 돈으로도 안 되는 게 있는 법이다.
돈으로 안 되는 일을 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인기와 명예다.
한지호의 돈은 재벌에 비해 부족해도 인기와 명예는 한국에서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드시면서 이야기들 나누시지요.”
손님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은 한지호가 식사를 권했다.
방금 막 차린 것처럼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요리가 식욕을 자극했다.
최규열과 신영준, 양성문에게는 그리 놀라울 게 없는 상차림이다.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5성급 호텔 레스토랑에서 코스 요리를 먹을 수 있다.
하지만 한지호가 최선을 다해 손님 맞이를 준비했다는 건 확실히 전해졌다.
“잘 먹겠네, 한 원장.”
“PH 호텔 음식이 예전부터 아주 괜찮았지 말입니다. 한 원장이 집들이에 신경을 쓴 게 티가 납니다.”
“바쁠텐데 우리까지 신경 쓰느라 고생했어요.”
최규열과 신영준, 양성문이 각각 한 마디씩 내뱉으며 수저를 들었다.
신영준의 군대식 말투는 여전히 독특했고, 양성문 장관은 말을 편하게 하라는 한지호의 거듭된 요청에도 계속 반존대를 썼다.
거리를 느껴서가 아니라 그게 편한 모양이었다.
슥슥- 스스슥-
이윽고 잠시 동안 수저로 그릇에 담긴 음식을 집는 소리만 울렸다.
입맛에 맞게끔 다양한 음식을 준비해서인지 다들 바쁘게 젓가락을 움직였다.
한지호도 참치회 몇 점을 접시에 담았다.
“일 이야기도 슬슬 해보십시다. K-메디컬 타운 1차 공사가 예정보다 일찍 끝날 거라고 들었습니다.”
신영준이 먼저 본론을 꺼냈다.
그는 군인 출신답게 성미가 급했다.
대신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은 화끈하게 믿어준다.
그렇기에 한지호에게도 1000억 원이라는 거금을 투자한 것이다.
신영준 회장의 그런 성향 덕분에 미한약품 직원들이 세계적인 신약을 개발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일이 잘 풀리려는지 공사가 기대 이상으로 순조로워서 말이요. 시공사에서도 이렇게 분위기가 좋은 현장은 처음이라고 할 정도이니, 예정보다 1달은 일찍 완공이 되겠지요.”
양성문 장관이 신영준 회장의 말을 받았다.
공사가 딜레이 되는 경우는 흔하다.
그런데 K-메디컬 타운처럼 예정보다 일찍 완공이 되는 경우는 무척 드물다.
보통 현장에서는 각종 변수를 고려해서 공사 기한을 보수적으로 책정하는데, 이번에는 어떠한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첫 번째 미션은 생각하고 있나, 한 원장?”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최규열 센터장이 한지호에게 질문을 던졌다.
한지호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고해진 씨를 치료하는데 쓰였던 삼칠근의 연구 기록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생각입니다. 동물 실험 결과를 다시 한 번 체크하고, 임상 실험까지 거쳐서 데이터를 만들어야죠.”
“한의학을 과학의 틀 안에서 다듬고 기록으로 남겨두는 것은 정말 의미있는 일이네. 미래의 의학 발전에도 크게 도움이 될 테고 말이지.”
최규열은 한지호가 K-메디컬 타운에 들어설 원화 아카데미를 통해 무슨 일을 하려는지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의학을 체계화시키는 것 말고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다.
바로 현대 의학과 한의학을 접목한 신약 개발이다.
신약 개발에 성공하면 수천억 원에서 조 단위의 특허비를 벌 수 있다.
신영준 회장이 선뜻 1000억 원을 투자한 것도 신약 개발 가능성을 주시했기 때문이다.
한지호 역시 신약 개발이 중요하다는 점을 도외시하지 않았다.
조바심을 낸다고 될 일은 아니지만, 원화 아카데미의 핵심 사업으로 비중있게 추진해야 한다.
“자세한 논의를 거쳐야겠지만, 저는 마황이라는 약재를 이용해서 신약 개발을 해보고 싶습니다.”
한지호의 머릿속에는 이미 신약 개발 플랜까지 짜여져 있었다.
그가 약재 명칭까지 언급하자 최규열과 신영준, 양성문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마황의 주 성분인 에페드린과 슈도에페드린을 연구해볼 가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유초아가 TV 드라마에 얼굴을 비추며 여배우로서 첫 걸음을 내딛은 것처럼 한지호도 도전의 활 시위를 당겼다.
남들 보기에는 더 이상 이룰 게 없는 위치지만 K-메디컬 타운과 원화 아카데미에서 세상을 바꾸려는 것이다.
한지호는 언제나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하는 새로운 시작을 창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