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
8장, 희망을 노래하자 (2)
“네, 저는 지금 가수 고해진 씨가 재활 치료를 받는 현장에 나와있습니다.”
공영방송 9시 뉴스의 기자가 S대 병원을 찾았다.
고해진 측과 미리 말을 맞추고 온 취재진은 조심스럽게 촬영을 시작했다.
그들이 카메라로 비춘 공간 저편에서는 고해진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의식을 되찾고 깨어난 고해진은 아주 낮은 강도의 근력 훈련을 하며 몸을 정상 상태로 회복하기 위해 애쓰는 중이었다.
카메라와 기자가 가까이 다가오자 고해진이 동작을 멈췄다.
그의 재활을 돕고 있는 치료사도 잠시 쉬자고 말하며 카메라 앵글 밖으로 물러났다.
“안녕하세요, 고해진 씨. 아주 오랜만에 국민들에게 모습을 보여주시는 건데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기자가 정해진 대본대로 멘트를 치며 마이크를 내밀었다.
고해진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욱을 한 팔로 스윽 닦아내며 대답했다.
“국민들께서 많이 걱정해주신 덕분에 치료를 잘 받고 있습니다. 몸도 많이 좋아졌고, 열심히 재활해서 빨리 음악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실제로 고해진의 얼굴색은 얼마 전까지 중환자였던 사람 같지 않았다.
한지호가 약침으로 고해진을 깨워낸 게 불과 2주일 전이다.
그 사이 발음도 또렷해졌고, 자기 발로 걸어다니며 생활을 하게 됐다.
안색 역시 원래의 모습과 다를바 없었다.
다만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문제가 남아있었다.
근력 손실은 사소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천공으로 인한 장 출혈이 있었기 때문에 음식을 조심해서 섭취해야 하고, 소화기능을 완전히 회복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다.
그리고 또 하나, 보통 사람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지만 가수에겐 치명적인 후유증이 생겼다.
원하는 만큼 고음이 올라가지 않는 것이다.
쇼크로 뇌가 충격을 받으면 신체 어디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짐작하기 어렵다.
특히 고해진처럼 장기간 혼수상태에 빠졌던 환자는 깨어나도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기 힘들다.
그렇기에 지금 앓는 후유증은 어쩌면 가벼운 편에 속한다.
그러나 가수, 곧 노래하는 일이 직업이자 인생인 고해진에게는 무척 심각한 문제였다.
하지만 고해진은 절망하지 않고 성실하게 재활 치료를 받았다.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았듯이 노래할 수 있는 능력도 다시 회복하게 될 거라고 믿는 것이다.
“좋아지신 모습을 보니 국민들도 기뻐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고해진 씨, 검찰이 담석제거술을 집도했던 의사를 기소했다는 소식 들으셨나요?”
기자의 두 번째 질문을 받는 고해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전성기 시절 가요계를 주름잡고 토론 프로그램에서 국회의원들도 위축시켰던 바로 그 눈빛이었다.
“의료 과실로 볼 수밖에 없는 정황이 명백해서 검찰이 결정을 내렸다고 들었습니다. 저 개인의 복수를 위해 처벌을 바라는 게 아니라 사고를 당해도 목소리를 내기 힘든 국민들을 대신해서 끝까지 재판을 지켜보겠습니다.”
감출 수 없는 분노가 느껴졌지만 개인적인 감정에 휩쓸리진 않았다.
고해진은 사적인 복수 대신 공적인 대의를 내세웠다.
그게 진심이기도 했다.
일반 국민은 의료 사고를 당해도 소송조차 하기 어렵다.
대형 병원과 의사들이 법무팀을 가동하고 증거를 은폐하면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어진다.
물론 세상에는 좋은 의사와 병원이 더 많다.
그러나 구조적 차원에서 의료 사고를 당한 환자는 언제나 약자가 될 수밖에 없다.
고해진 정도의 유명인이 사고를 당했기에 이만큼이나 화제가 된 것이다.
그러한 책임감을 느낀 고해진은 혼자 건강해져서 보상금으로 몇 억을 받고 입을 닦으려 하지 않았다.
불합리한 의료 사고 문제를 사회적으로 공론화시키고, 정당한 처벌은 물론 법 개정까지 추진할 작정이었다.
남궁훈을 비롯한 연예인 동료들과 한지호도 법 개정 운동에 힘을 보태기로 했다.
이른바 고해진 법안이 한국 의료 분쟁법을 뒤흔들 수도 있는 것이다.
몇 가지 신변잡기 질문을 던진 기자는 마지막으로 한지호와 김진언을 언급했다.
“재수술을 집도하신 김진언 교수님과 약침 치료로 의식을 회복시킨 한지호 원장님은 치료비를 받지 않으신다고 들었습니다. 대신 그 치료비로 의료 사고를 당한 환자들을 돕는 재단을 세운다고 하셨는데 고해진 씨의 제안이었나요?”
“아닙니다. 그 두 분은 정말, 정말 훌륭한 의사와 한의사이십니다. 한지호 원장님이 가장 먼저 제안을 하셨고, 김진언 교수님도 흔쾌히 동의를 해주셨습니다. 대학 병원으로서 쉽지 않은 결정을 지지해준 S대 병원에도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제 건강이 조금 더 회복되면 의료 사고 환자들을 위한 콘서트를 열 예정입니다. 그러고나면 콘서트 수익금과 제가 냈어야 할 치료비, 팬 여러분의 후원금을 모아서 고해진 재단을 만들겠습니다. 사실 의료 사고는 누구나 당할 수 있습니다. 그때 제가 여러분의 힘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이 일을 하라고 신께서 저를 살려주신 것 같습니다.”
심금을 울리는 명언이었다.
촬영을 하기 전, 대략적인 답변 내용을 들었던 기자도 새삼 감동을 했는지 눈가가 붉어졌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을 겪었던 당사자가 진심을 담아 다른 사람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아마 9시 뉴스를 보게 될 전국의 시청자들도 뭉클한 감동을 느낄 게 분명했다.
“감사합니다, 고해진 씨. 꼭 빨리 쾌차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인사와 함께 촬영이 끝났다.
인터뷰 촬영분은 편집을 거쳐 오늘 밤 9시에 시청자들의 안방을 찾아갈 것이다.
카메라가 꺼진 후, 기자가 고해진에게 악수를 청했다.
“어려운 일을 당하셨는데 사회를 먼저 생각하시다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고해진은 특유의 피식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기자의 손을 맞잡았다.
“존경은 내가 아니라 한지호 원장님과 김진언 교수님이 받아야합니다. 특히 먼저 재단 설립을 제안하진 한 원장님은… 진짜 대단한 사람입니다. 내가 만난 남자 중에서 제일 멋진 수컷 같습니다.”
멋진 수컷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았다.
잘 쓰는 말은 아니지만, 고해진은 예전부터 종종 자신만의 독특한 언어를 구사해왔기 때문이다.
기자는 새삼 한지호의 이름을 되뇌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파도 파도 미담밖에 나오지 않아서 미도파라고 물리는 국민 한의사, 한지호.
고해진을 치료하며 또 다시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게 된 그에 대한 호기심이 기자 정신을 건드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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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아-!”
고해진이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탁월한 성량을 자랑하던 가수답게 그의 음성이 저렁쩌렁하게 울렸다.
가정집에서 이만한 목소리를 내면 민폐일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집이 아닌 병원이다.
그것도 방음 처리가 완벽하게 된 S대 병원 재활 치료실이기 때문에 문제될 것은 없었다.
한지호는 재활 치료실에서 고해진의 목 상태를 체크하고 있었다.
물론 그에게는 전담 재활 트레이너들이 여러 명 붙었다.
주치의 김진언 교수를 비롯해서 재활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이 고해진을 돌보고 있다.
그러나 고해진 본인이 한지호의 진료를 강력하게 원했다.
한지호도 가능한 끝까지 고해진을 책임지고 싶어했다.
뿐만 아니라 S대 병원과 김진언 교수도 한지호의 재활 치료 참여를 환영했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김진언 교수는 한지호가 약침으로 고해진의 의식을 회복시킨 것을 직접 목격했다.
이전까지 그가 믿고 있던 의학적 상식이 붕괴되는 순간이었고, 한계를 넘어선 새로운 의술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렇기에 의사로서 한지호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손상된 근육 천공이 발생한 장기 회복은 S대에서 전담하고 있다.
다만 혼수상태에 빠진 충격으로 후유증을 얻은 신경계와 목소리는 한지호의 주도 아래 재활을 진행 중이었다.
“목소리를 크게 내지 말고, 작아도 좋으니 호흡을 길게 뻗는다고 생각해보세요. 한 번만 더 해볼게요.”
한지호가 디테일하게 발성을 주문했다.
그는 음악에 문외한이다.
하지만 고해진을 치료하기 위해 온갖 자료를 뒤져가며 공부를 했다.
어차피 음악적 관점이 아니라 의학적 관점으로 성대 회복을 돕는 것이기에 자신이 있었다.
“아아아-!”
한지호의 주문대로 고해진이 목소리를 길게 뽑았다.
처음보다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아쉽다.
담석 제거술을 받기 직전, 몇 년만의 컴백을 준비하던 고해진의 목 상태는 최상이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야 팬들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을 것이다.
한지호는 조바심을 내지 않고 침을 들었다.
이윽고 별다른 설명 없이 고해진의 목에 침을 놓기 시작했다.
고해진도 익숙한 상황인 듯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몇 차례에 걸쳐 한지호로부터 성대 재활을 위한 침을 맞았었기 때문이다.
꾸욱- 꾹-
툭 튀어나온 성대 아래부분에는 천돌혈이 있다.
함부로 건드렸다간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혈도다.
그렇지만 한지호의 손길에는 거침이 없었다.
심장과 머리에도 숱하게 침을 놓아왔기 때문에 천돌혈쯤은 어린 아이 다루듯 편안하게 시침할 수 있다.
고해진도 겁을 먹지 않았다.
앉은 자세로 목에 침을 맞는 것은 썩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주로 침을 맞는 뒷목도 아니고, 턱 밑에 침이 꽂히는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그러나 고해진은 누구보다 확실하게 한지호를 신뢰하고 있었다.
한지호가 아니었으면 지금처럼 재활을 꿈꾸기는커녕 기약 없는 혼수상태에 빠져있었을 거란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이대로 잠시만 있다가 다시 한 번 해볼게요.”
침을 다 놓은 한지호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꾸준히 혈도를 자극해온 결과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다.
급작스러운 쇼크로 꽉 막혀있던 성대 주위의 기혈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당사자인 고해진도 조금씩 목 상태가 올라오는 게 체감 될 것이다.
기혈이 풀린다는 것은 곧 순환이 잘 된다는 뜻이다.
혈액을 포함해 인체를 지탱하는 기(氣)가 원활하게 순환하면 몸이 안 좋아질래야 안 좋아질 수 없다.
한지호는 성대를 고치는 동시에 고해진의 신체 컨디션 전반을 다 회복시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상태에서 한 음씩 고음으로 올라가보겠습니다.”
“네, 선생님.”
순순히 대답한 고해진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소리를 제대로 내기 위해서는 숨을 잘 들이마시고 내뱉는 게 필수적이다.
한지호는 고해진에게 간단한 호흡법도 전수해줬다.
오금희를 알려줄 수는 없지만, 예전부터 전승 된 도인술을 전수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한지호가 가르쳐준 호흡법 덕분에 고해진은 가수로서도 새로운 경지를 넘볼 수 있게 됐다.
재활이 잘 끝나면 호흡법의 진가가 드러날 것이다.
“도- 레- 미-!”
고해진이 한 음 한 음 천천히 목소리를 냈다.
성대 주위에 침을 놓기 전과 비교하면 음성이 훨씬 맑아진 것 같았다.
원래 고해진의 음색은 허스키한 편이지만, 의식을 회복한 뒤에는 허스키한 정도가 아니라 꽉 막혀 답답한 느낌을 줬었다.
“라- 시- 도-!”
그렇게 막혀있던 목소리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세월이 묻어 허스키해졌지만 젊은 시절의 맑음을 유지한 묘한 음색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레……! 여기까지가 한계입니다.”
고해진이 침을 꽂은 채 힘겨운 표정으로 말했다.
전력을 다해 고음을 뽑아내느라 지친 얼굴이다.
가수가 음을 내기 위해서는 아랫배에 힘을 주고 온몸을 공명시켜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체력 소모도 큰 편이다.
한지호는 그의 목에 꽂았던 침을 빼주며 격려를 해줬다.
“아시겠지만 평균적인 남성들의 음역대는 2옥타브 솔이 한계입니다. 고해진 씨는 원래도 저음역을 주로 사용했고, 이미 2옥 레까지 음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음하고 반 정도만 더 올리면 원음을 회복하게 되는 겁니다, 선생님.”
“고음이 올라가도 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노래를 부를 수 없습니다. 재활 치료도 더 열심히 받으셔야 합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제가 퇴원해서 콘서트를 열게 되면 첫 번째 티켓은 무조건 한 선생님께 드리겠습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한지호와 고해진이 서로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번 사고를 계기로 고해진은 의료 사고 피해자를 위한 재단을 설립하기로 했다.
두 사람은 고해진법 통과와 고해진 재단 설립을 위해 뜻을 모았다.
어린 시절 음악을 통해 맺어졌던 인연이 고해진의 생명을 살리고, 함께 세상을 바꾸는데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한지호는 고해진의 컴백 콘서트에서 일상으로의 초대를 듣는 상상을 했다.
어둡고 막막했던 사춘기를 버티게 도와준 그 노래를 라이브로 다시 들을 수 있다면 무엇보다 값진 선물이 될 것이다.
영웅의 귀환이 멀지 않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