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
5장, 제국의 초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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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리가 났다.
나라 전체가 뒤집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분위기였다.
물론 40대 이하의 젊은 사람들이 술렁이는 것이지만, 파문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지금은 인기가 시들해졌다고 해도 가수 고해진은 시대의 아이콘이다.
80년대 말 혜성처럼 등장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나이가 든 이후에도 젊은이들의 멘토로 불리며 만만치 않은 영향력을 끼쳤다.
최근 그는 새롭게 밴드를 결성해 재기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고가 터진 것이다.
뉴스에 의하면 고해진은 담석을 제거하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
담석은 환자를 고통스럽게 만들지만,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다.
담석 제거술 역시 어려운 수술이 아니다.
수술이라기 보다는 아주 간단한 시술이라고 여기는 의사들도 있다.
그런데 고해진은 담석 제거술을 받으러 입원했다가 의식불명 상태로 생사의 고비에 놓이게 됐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수술을 집도한 의사는 나름대로 설명을 했다.
담석 제거 과정에서 장기에 천공을 발견했고, 급히 응급 조치를 취하며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족들의 말은 전혀 달랐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고해진은 담석을 제외하면 무척 건강한 상태로 장 천공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또한 의사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재수술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가족들에게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았다.
여러모로 의료 사과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정황이다.
의사가 담석 제거 과정에서 실수로 고해진의 장기에 천공을 일으켰고, 수습을 하기 위해 급히 재수술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고해진은 깨어나지 못한 채 혼수상태로 누워만 있다.
천공과 장 출혈로 쇼크를 입었고, 신체 기능이 전반적으로 매우 악화됐다.
기적적으로 눈을 떠도 정상적인 생활을 하긴 힘들 것이다.
사실 의학적으로는 회생할 가능성이 무척 낮다.
슬픈 이야기지만, 이대로 시간을 보내다가 사망하게 될 확률이 높다.
분명 너무 어이없는 사건이고, 고해진의 상징성이 크기에 사회적 문제가 될 조짐이 보였다.
그러나 고해진처럼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의료사고를 당해도 억울함을 토로하기 어렵다.
환자와 가족이 병원과 의사를 상대로 의료 소송을 내서 승리하는 게 무지하게 어렵기 때문이다.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의료사고를 극히 보수적으로 판단한다.
애초에 대형 법무법인을 끼고 있는 병원을 상대로 개인이 소송을 거는 것 자체가 무모한 싸움이다.
고해진의 가족은 동료 연예인과 지인들의 도움으로 사고를 이슈화 시키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의료 소송에서 이긴다고 해도 고해진의 몸 상태가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의료 과실 여부가 밝혀질 때까지 길고 지루한 법정 공방을 벌여야 한다.
그동안 고해진을 담당한 의사는 아무 제약 없이 다른 환자들에게 수술을 할 수도 있다.
고해진의 가족들 입장에서는 복장이 터지는 일이다.
한지호는 서울 원화 한의원 원장실에서 TV 뉴스를 보고 있었다.
어제 유초아와 함께 고해진의 사고 소식을 접했다.
하루가 지나고, 그의 가족과 동료들이 입장 발표를 했지만 상황은 꽉 막힌 것 같았다.
의사는 당연히 의료 과실을 부정하고 있다.
그나마 하루만에 고소장을 접수하고, 검찰에서 재빨리 의료 기록을 압수하는 등 조치를 취해서 다행이었다.
고해진이라는 시대의 스타가 피해자라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차일피일 시간만 질질 끌다가 가족들이 지쳐 떨어졌을 것이다.
“쉽지 않겠는데. 국과수에서 부검을 하는 게 제일 빠르지만, 사후에나 가능한 일이고…….”
한지호가 안타까운 얼굴로 혼잣말을 읊조렸다.
부검을 하면 의료사고 여부를 가장 확실하게 알아낼 수 있다.
그렇지만 고해진은 아직 살아있다.
혼수상태이긴 해도 숨이 붙어 있기에 가족들도 실낱 같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사망선고를 받기 전까지 부검이라는 카드를 쓸 수는 없다.
한지호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다음 환자의 예약 시간까지 여유가 조금 있어서 뉴스를 봤는데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는 고해진을 직접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마음을 쓰는 이유가 있었다.
보육원 출신이라는 이유로 서러움을 당했던 사춘기 학창시절, 그리고 동기들보다 가난해서 무시 받은 한의대 시절.
고해진의 음악은 한지호에게 크나큰 위로가 되어 줬었다.
80년대와 90년대 최고의 스타였지만 이후 자발적 아웃사이더의 길을 걸었던 고해진은 주옥 같은 명곡을 많이 남겼다.
부모도 없이 외로움과 가난을 친구 삼았던 한지호에게는 아웃사이더를 위로하는 고해진의 음악이 와닿을 수밖에 없었다.
“내게로 와 줘, 내 생활 속으로……. 너와 같이 함께라면 모든 게 새로울 거야.”
한지호는 가장 좋아하는 고해진의 노랫말을 조용히 읊조렸다.
몸을 누이기에 좁았던 천사원의 방, 어둠 속에서 불 하나를 켜놓고 수능 공부를 하던 사춘기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 이 노래가 없었다면 더욱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곧이어 그는 뭔가 결심한 듯 눈빛을 가다듬었다.
한지호의 눈동자에서 은은한 서광이 감돌고 있었다.
“내가 도울 수 있다면, 얼마든지.”
의미심장한 혼잣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예기치 않은 의료사고를 당해 쓰러진 시대의 아이콘, 고해진.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는 국민 한의사, 한지호.
가수와 팬으로, 노래로만 이어져온 두 사람 사이에 새로운 접점이 생길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는 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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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호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무턱대고 함부로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전국에서 고해진을 수술한 의사를 구속하라는 여론이 들끓고 있었다.
가족들은 민감해질 대로 민감해졌고, 그들을 돕는 동료 연예인과 관계자들도 날이 바짝 서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한지호가 선의를 표현해도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쉽다.
자칫 고해진의 유명세를 빌려 주목을 받고자 한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가슴 아픈 뉴스를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한지호에게 있어 고해진은 사춘기의 우상이자 은인이다.
그는 연예계 인맥을 이용해서 고해진의 가족과 동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유초아의 소속사 사장에게 부탁을 했기 때문에 연락을 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한지호가 전한 메시지는 간단했다.
혹시라도 한의학적 자문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돕겠다, 부담 갖지 말고 알려달라는 내용이 전부였다.
구구절절 긴 이야기를 전해봤자 의미가 없다.
고해진의 가족과 동료들은 이미 지칠대로 지쳐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실제적인 도움이다.
사실 한지호와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 중에서 고해진의 노내로 위로를 받지 않은 이는 드물다.
중요한 것은 사연이 아니다.
다행히 한지호는 고해진에게 즉각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인물이었다.
한국이 아니라 전세계에서 이름을 날리는 한의사는 한지호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반강제로 은퇴하게 된 위천한방병원의 유우선 병원장도 한국에서만 유명했다.
그에 반해 한지호는 중국과 헐리우드, 영국 왕실에서까지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다.
의술로는 누구도 감히 시비를 걸 수 없는 위치가 됐고, 사회적인 영향력도 엄청나다.
한지호의 한 마디가 국내 한의학계를 대표하는 의견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실 한지호는 기존의 한의학계와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다.
원화 정의 네트워크는 주류가 아닌 외인구단이다.
하지만 한지호의 명성이 워낙 압도적이기에 비주류가 주류를 잡아먹은 셈이 됐다.
여러 방안을 고민해 봐야겠지만, 한지호가 고해진 편에 서서 도움을 주면 가족들에게 큰 힘이 될 것은 분명했다.
그래서인지 가족과 동료들로부터 곧장 답이 왔다.
유초아의 소속사 대표는 한지호에게 전화번호 하나를 넘겨줬다.
연예인을 대표해서 고해진 사건 대책위원장을 맡은 남궁훈의 번호였다.
남궁훈과 가족들은 도움이 되고 싶다는 한지호의 메시지를 반갑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한지호는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접근했지만, 가족들에겐 그가 천군만마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홍콩에서 남궁훈의 연락처를 받은 한지호는 지체하지 않고 전화를 했다.
고해진과 마찬가지로 한 때 수많은 팬들을 거느렸던 남궁훈은 한지호에게 거듭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아직 도와준 일도 없는데 관심을 가지고 호의를 보인 것만으로도 고마워하는 것이다.
그만큼 의료사고 분쟁은 힘든 과제다.
연예인이 아닌 일반인이라면 병원에 도전 할 엄두를 못 내는 경우가 다반사다.
한지호는 서울로 돌아가는 즉시 남궁훈을 만나기로 했다.
아마 그 자리에서 의식불명 상태로 누워있는 고해진을 보게 될 가능성도 높다.
홍콩에서부터 한지호는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한 때 자신의 우상이었던 고해진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기분 좋은 만남은 아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고해진과 그의 가족들, 동료들에게 힘을 주고 싶었다.
쿠와아아아아앙-!
한지호의 각오 만큼이나 우렁찬 소리를 내며 비행기가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홍콩에서의 진료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한지호는 청담동으로 향하지 않았다.
원래라면 최근에 이사한 청담동 고급 빌라로 가서 피로를 풀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남궁훈과 미리 약속을 해놓았다.
그를 만나 자초지종을 듣고, 시간이 지나도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고해진을 진맥하기로 했다.
한지호로선 부담이 많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힘이 되고 싶다며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
고해진의 가족들과 남궁훈은 내심 한지호에게 거는 기대가 클 것이다.
지금으로선 한지호 외에 다른 뾰족한 수가 없다.
검찰에서는 수사에 착수했지만, 부검을 하지 않는 이상 의료 사고 여부를 확실히 밝혀내기 힘들다.
그렇다고 부검을 위해 고해진이 죽기를 바랄 수도 없다.
동시에 의식을 잃고 깨어나지 않는 고해진의 모습은 수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만들고 있다.
게다가 수술을 집도한 의사는 뻔뻔하게 자신의 책임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중이다.
여러모로 참 답답한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황에서 한지호가 나타난 것이다.
가족과 동료들의 기대는 얼마나 클 것이고, 만약 별 도움이 못 되면 또 얼마나 실망을 하게 될까.
인천공항에 세워둔 자신의 벤틀리를 타고 곧장 약속 장소로 이동하는 한지호의 마음은 가볍지 않았다.
약속 장소가 가까워 질수록 점점 더 무거워지고 있었다.
‘부담감에 짓눌릴 수 없지. 이런 마음도 지금은 사치게 불과하다, 한지호.’
그는 두 손으로 핸들을 꽉 잡고 마음을 다스렸다.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고해진과 그의 동료, 가족들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한지호는 그저 왕년의 스타에게 호의를 베푼 것이지만, 그들에게는 한지호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일 수도 있다.
끼이익-
곧이어 한지호의 새하얀 벤틀리 컨티넨탈이 병원 주차장에 도착했다.
고해진이 입원해있는 곳은 Y대와 더불어 국내 최고로 평가 받는 S대 병원이다.
처음부터 S대에서 수술을 받았다면 좋았을 것을.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다.
한지호는 차에서 내리기 전 백미러를 통해 자기 얼굴을 바라봤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힘든 시절을 버티게 해준 영웅을 구하러 가자. 이제 내가 영웅이 될 차례야.”
누가 들으면 비웃을 수도 있지만 한지호는 진지했다.
진심으로 고해진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영국 왕실의 인정을 받고, K-메디컬 타운에서 한의학 제국의 초석을 세우고 있는 한지호가 차에서 내려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의 발끝이 고해진에게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