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
5장, 제국의 초석 (1)
“아니, 대체 언제 영국까지 가서 국위선양을 또 하고 온 건지! 정말 대단해요, 대단해.”
보건복지부 장관 양성문이 한지호의 어깨를 두드리며 활짝 웃었다.
영국 런던에서 날아온 낭보는 양성문 장관을 들뜨게 만들기 충분했다.
한지호가 여왕을 알현하고, 영국 왕실의 인장이 찍힌 브로치를 선물 받았다는 사실은 세계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무슨 치료를 했는지는 몰라도 한의학이 영국에서도 통한 것이다.
영국과 미국은 서양 세계를 지탱하는 중심축이다.
헐리우드의 헨리오 무크, 그리고 영국 왕실.
영미(英美) 문화권을 상징하는 곳에서 한지호가 활약을 했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변방의 민간요법으로 폄하 받기도 한 한의학이 당당하게 세계무대에서 공신력을 인정받은 셈이다.
야심차게 K-메디컬 타운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한국 정부와 보건복지부에서도 쌍수를 들고 환영할 소식이었다.
벌써부터 수많은 중국 관광객이 K-메디컬 타운에 대해 문의를 해오고 있다.
서울을 넘어 홍콩과 헐리우드, 런던을 누비는 한지호 효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지호는 족히 수백억 원 가치의 홍보 효과를 혼자서 뽑아냈다.
양성문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예뻐 보일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그는 한참 어리고 어린 한지호가 부탁을 하면 국무회의에서 춤이라도 출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양 장관님께서 많이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한지호는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겸손한 태도를 지켰다.
하지만 양성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내가 도와준 게 뭐가 있다고, 오히려 한 원장의 도움을 계속 받기만 하는 거 같아 민망할 따름이에요.”
“장관님께서 K-메디컬 타운에 입주 할 원화 정의 한의원과 원화 아카데미에 신경을 얼마나 많이 써주셨는데요.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 생각해주면 그저 고맙지요, 고마워.”
푸근하게 웃은 양성문이 눈을 빛냈다.
그의 시선이 한지호의 재킷에 고정됐다.
반짝반짝 빛을 내는 브로치가 재킷 카라에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그것인가요?”
“맞습니다. 여왕님께서 직접 주신 겁니다.”
“어쩐지 기품이 남다르다 했어요. 영국 왕실의 하사품이라니……. 공식적으로 영국 입국도 자유로워진다지요?”
“영연방 국가에 입국할 때 여러 혜택을 받게 된다고 들었습니다.”
한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국 왕실에서는 브로치 하나만 내려주고 입을 닦은 게 아니었다.
넘친다 싶을 정도의 치료비를 줬고, 행정적 특혜까지 제공했다.
왕실의 인장이 찍힌 브로치는 말 그대로 우정의 징표였다.
한지호는 이제 영국을 비롯해 영연방 국가에 입국할 때 외교관 수준의 대우를 받게 된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민간인에겐 주어지지 않는 혜택을 지구 곳곳에서 누리게 된 것이다.
이제 그를 한국 국경을 넘어선 국제적인 거물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예전에 한지호는 영종도 블랙문 카지노의 오프닝 파티에 참석했던 사람들을 바라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 누구와 견주어도 떨어지지 않는 레벨로 성장했다.
거물로 성장하는 속도만 놓고 보면 한지호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축에 속할 것이다.
장관의 자리까지 오른 양성문이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처음 최규열에게 한지호를 소개 받았을 때와 비교를 해도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따로 없을 지경이다.
한지호는 더 이상 재기 넘치는 유망주가 아니었다.
일국의 장관인 양성문이 보기에도 자신보다 더 높은 곳에서 놀고 있는 인물이 됐다.
그러나 과하지 않게 겸손한 태도는 그대로였기에 심기가 상할 일은 전혀 없었다.
양성문은 온화한 인상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럼 우리 일 이야기를 좀 더 해볼까요?”
“네, 장관님.”
“내년 구정 전에 K-메디컬 타운의 1차 공사가 완료되고 입주가 시작될 계획이에요. 원화 정의 한의원은 우선 입주 대상이니 인력부터 시스템까지 미리미리 준비를 해두셔야겠지요.”
“그렇지 않아도 네트워크 차원에서 새로운 한의사들을 선발해서 키우고 있습니다.”
“항상 한 발 앞서가는 한 원장다워요. 그럼 원화 아카데미의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나요?”
양성문이 눈을 빛냈다.
사실 K-메디컬 타운에 들어설 원화 정의 한의원보다 원화 아카데미의 비중이 훨씬 더 높다.
원화 정의 한의원은 신입 한의사들을 키우며 외국인들에게 한의학을 알리는 역할을 할 것이다.
반면 원화 아카데미에는 1000억 이상의 돈이 투자된다.
현금으로 1200억, 의료 설비를 합하면 2000억 원 가까운 투자 규모다.
정부에서 거는 기대도 만만치 않다.
한약을 베이스로 한 신약 개발에 성공하면 수천 억, 수 조의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도 있다.
물론 가장 크게 기대를 하는 사람은 당연히 한지호였다.
그는 이제까지 이룬 모든 것을 걸고 원화 아카데미라는 도전을 시작했다.
정부의 지원을 바탕으로 Y대 의대와 미한약품까지 끌어들였으니 책임감도 어마어마한 지경이다.
보통 사람은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질식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지호는 달랐다.
그는 더 큰 부담, 더 막중한 책임을 짊어질 때 활활 타오르는 유형이다.
매번 거대한 도전에 겁 없이 뛰어드는 것도 실패 가능성에 위축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양성문을 똑바로 쳐다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필요한 연구 설비가 다음 달 한국으로 들어옵니다. 독일과 미국에서 어렵게 수입을 했습니다. 미한 약품과 Y대 의대에서 원화 아카데미에 파견할 인력도 정해졌습니다.”
“너무 서두르지는 말아요. 신약 개발과 의학 연구라는 게 단기간에 되는 일인 아니니 말이에요.”
“네, 우선 한의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일부터 시작할 계획입니다. 전국의 모든 한의대학에서 교재로 선정할 만큼 구체적인 학문적 성과를 내야겠죠. 신약 개발은 긴 호흡으로 천천히 준비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래요. 짧은 일정으로 영국을 다녀오느라 피곤할 텐데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좀 쉬어요.”
“다음에 따로 식사 하시죠, 장관님.”
“언제든 좋아요. 우리 한 원장이 불러준다면야, 허허.”
장관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몇 명이나 될까.
한지호는 웃으며 고개를 숙인 다음 양성문의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그는 공사가 막바지에 다다른 K-메디컬 타운의 조감도를 손에 들고 있었다.
새로운, 그리고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보금자리가 생기는 날이 멀지 않았다.
그곳에서부터 원화라는 이름의 제국을 세울 것이다.
한지호의 눈동자와 재킷에 달린 왕실 브로치가 함께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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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호 오빠, 이거 정말 만져봐도 괜찮아요?”
유초아가 큰 눈망울로 한지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같은 질문만 세 번째였다.
한지호는 웃으며 확실하게 대답을 해줬다.
“괜찮아. 망가트려도 뭐라고 안 할 테니 편하게 갖고 놀아.”
“와아- 진짜 너무 예뻐요.”
유초아는 태어나서 바다를 처음 본 사람처럼 순수한 탄성을 흘렸다.
그녀는 다름 아닌 영국 왕실의 브로치를 구경하는 중이었다.
보석을 세공해서 만든 브로치는 여자라면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최고의 장인이 손으로 새겨넣은 왕실의 인장도 보면 볼수록 오묘했다.
왼쪽에는 황금빛 사자, 그리고 오른쪽에는 새하얀 유니콘이 왕실의 깃발을 바치고 있다.
엄지손톱 크기의 작은 브로치 안에 인장을 새긴 것 자체가 대단한 기술이다.
유초아는 홀린 사람처럼 왕실 브로치를 감상했다.
“마음에 들어?”
“백 명에게 물어봐도 백 명 다 똑같이 대답할 걸요. 마음에 든다구요.”
“다음에 하나 더 받아서 너 줄게.”
“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주고 싶은데, 그럼 왕실에서 서운해 할 수 있으니까. 영국 가서 하나 더 달라고 해야겠다.”
“그게 가능해요?”
“이번에 토니 왕자랑 친해져서 부탁하면 될 수도 있어. 여차하면 왕실에 아픈 사람 또 치료해주면 되니까, 하하.”
한지호는 가볍게 웃으며 농담삼아 말했다.
하지만 이런 농담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이 하면 허풍일 뿐이지만 한지호가 마음을 먹으면 농담이 진담이 될 수도 있다.
“브로치는 괜찮으니까 촬영 끝나면 영국 같이 놀러갔음 좋겠어요.”
“영국 가고 싶었어?”
“꼭 영국이 아니라 어디라도……. 외국에서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해보고 싶어요.”
“그렇겠다. 하긴, 나도 그랬으니까.”
한지호는 공중보건의를 마칠 때까지 단 한 번도 외국에 나가본 적이 없었다.
해외여행을 꿈 꿀만한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같은 천사원 출신인 유초아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한지호가 원화 한의원으로 성공을 거두며 든든한 후원자가 되기 전까지 그녀는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보육원의 여고생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공중파 드라마의 여자 조연으로 캐스팅 된 연예계 유망주다.
한지호는 유초아의 드라마 촬영이 끝나면 반드시 유럽으로 여행을 보내주겠다고 결심했다.
“촬영은 다음주부터 들어간다고 했지?”
“네, 오빠. 이제 진짜 촬영이라고 하니 많이 떨려요.”
“대본 연습 많이 했잖아. 하던 대로만 하면 되는 거니까 긴장하지 마.”
“잠도 거의 못 자겠죠? 운동 열심히 했는데 체력이 버텨줄지 모르겠어요.”
“내가 준 보약 꾸준히 먹고 있지?”
“그럼요.”
“체질에 맞게 최고로 신경써서 만든 보약이니까 그거 잘 먹었으면 괜찮을 거야.”
한지호가 유초아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일주일 뒷면 그녀가 드라마 촬영을 시작한다는 게 실감나지 않았다.
그러나 의심의 여지 없이 분명한 사실이다.
2주 정도 촬영 분량을 쌓고 나면 곧바로 미니시리즈 드라마가 방영된다.
그때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유초아라는 신인 여배우의 존재를 알게 될 것이다.
한지호는 살짝 복잡한 심정이었다.
유초아가 자신의 꿈을 이뤄가는 걸 응원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유명해지고 연예계에 익숙해져서 변하면 어떨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왜 그렇게 봐요, 지호 오빠?”
“응? 아니, 아니야.”
저도 모르게 유초아를 빤히 쳐다봤던 한지호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괜히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다.
“TV나 좀 볼까.”
어색함을 푸는데 TV보다 유용한 수단이 또 없다.
새로 이사한 청담동 고급 빌라의 거실에는 70인치가 넘는 대형 TV를 설치해 놓았다.
신사동 가로수길의 오피스텔 아파트도 훌륭했지만, 청담동 빌라는 연예인이나 재벌 2세들이 주로 사는 곳이다.
화려한 명성과 어마무시한 가격에 걸맞게 인테리어와 가구도 남달랐다.
임대가 아니라 아예 집을 사버렸기 때문에 한지호도 마음 놓고 투자를 했다.
삐익-
곧이어 TV 화면이 켜졌다.
마침 앵커가 뉴스 브리핑을 하고 있었다.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유명 가수 고해진 씨가 위독하다고 합니다. 가족들은 의료진의 과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소식, 현장에 나가있는 김기태 기자가 전하겠습니다.”
한지호와 유초아의 눈이 커졌다.
고해진은 20년 전부터 활동한 한국 대중가요의 전설 중 한 명이다.
아직 40대 중반으로 창창한 그가 갑자기 위독하다니, 선뜻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한지호는 고개를 앞으로 내밀고 뉴스에 집중했다.
뭔가 석연치 않은 일이 터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