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
4장, 로열 로드(royal road) (3)
한지호, 헬레나, 토니 왕자, 그리고 라인하르트.
이렇게 모두가 넓은 들판으로 나왔다.
굳이 멀리까지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들어오면서 확인 했듯이 토니 왕자의 저택 뒤편으로 푸른 초원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토니 왕자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한지호의 소문을 익히 들었고, 한국에서 어렵게 초청했지만 보자마자 100% 신뢰하긴 어려웠다.
그러나 놀라운 점은 벌써 있었다.
함께 저택 뒤편으로 나온 라인하르트가 한지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는 것이다.
보통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손길을 주면 녀석은 길길이 날뛴다.
숙련된 사육사도 라인하르트의 몸을 만지거나 고삐를 잡는 것을 두려워했었다.
사료를 제대로 먹지 않으며 예민해진 다음에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잘못하다 사람을 잡겠다 싶을 정도로 난폭하게 군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마구간에서 라인하르트를 데리고 나온 건 토니 왕자가 아닌 한지호였다.
한지호는 마치 오랫동안 라인하르트를 길들인 사람처럼 갈기를 쓰다듬었고, 편안하게 고삐를 쥔 채 녀석을 이끌었다.
라인하르트도 토니 왕자를 대하는 것처럼 한지호의 지시를 잘 따랐다.
고작 마구간에서 저택 뒤편까지 나온 것뿐이지만, 평소와 다른 라인하르트의 태도에 토니 왕자는 만만찮게 놀란 눈치였다.
“이제 뭘 어떻게 보여준다는 거죠, 닥터 한.”
토니 왕자가 입을 열었다.
한지호는 저택 응접실에서 꽤 도발적인 발언을 했었다.
라인하르트의 사육 방식이 잘못 됐고, 그로인해 지금 같은 결과가 나타났다고 한 것이다.
듣기에 따라서는 토니 왕자가 매우 불쾌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이제 자신이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눈으로 보여준다고 했으니 정말 보여줄 차례다.
한지호는 시간을 끌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사전에 허풍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한지호가 토니 왕자에게 양해를 구했다.
무엇을 실례 하겠다는지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불과 몇 초 사이, 한지호의 의도가 토니 왕자와 헬레나에게 전해졌다.
그가 말릴 틈도 없이 몸을 날려 라인하르트 위로 올라탔기 때문이다.
“히이잉-!”
라인하르트가 울음을 토해냈다.
그러나 싫어하거나 거부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닥터 한! 라인하르트는 오직 왕자님만…….”
“아니, 괜찮아요. 두고 보죠, 헬레나.”
깜짝 놀란 헬레나를 토니 왕자가 말렸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깊이 가라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토니 왕자는 만능 스포츠 맨이고, 특히 승마에 조예가 깊다.
영국 올림픽 대표팀 선발전에 나설 만큼 승마 실력이 보통이 아니다.
그는 방금 전 한지호가 라인하르트의 등에 올라탈 때의 동작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국가대표 선수보다 더 가볍고 날렵한 몸짓이었다.
승마 경험이 부족한 사람은 남의 도움 없이 말 안장 위에 올라타기 힘들다.
그렇기에 토니 왕자는 한지호가 승마의 실력자라고 판단했다.
물론 사실은 전혀 다르다.
한지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말에 올라탄 것이다.
오금희를 수련하며 익힌 내공과 근력 덕분에 안장 위로 오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좀 떨리는데? 그렇지만… 낯설지 않아.’
막상 말등에 올라타자 긴장이 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난생 처음 타보는 말이었고, 그게 하필이면 명마인 라인하르트다.
게다가 영국의 토니 왕자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
생각해둔 것은 있지만, 실수라도 하면 개망신을 당하게 된다.
지금 이 순간 한지호가 믿고 의지할 것은 전생의 기억뿐이다.
다행히 말에 탄 감각이 마냥 낯설지만은 않았다.
삼국지 시대를 살았던 규호는 장수가 아닌 의원이었지만 때때로 말을 탔다.
천하를 울리는 장수들과 교분을 맺었기에 기마술을 배우는 게 어렵지 않았었다.
게다가 드넓은 중원을 급히 이동할 때 말을 타지 않으면 시간이 몇 배로 걸린다.
전생의 감각이 시공간을 초월해 현실의 한지호에게 이어지고 있었다.
한지호는 살짝 몸을 숙였다.
그는 라인하르트의 갈기를 어루만지며 조용히 속삭였다.
“날 도와주면 자유롭고 편해질 수 있어. 잘 부탁한다, 라인하르트.”
“히히힝-!”
한지호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라인하르트가 콧김을 내뿜었다.
둘을 지켜보는 토니 왕자는 어느 순간부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는 최근 들어 라인하르트의 등 위에 올라탄 적이 없었다.
사료를 적게 먹으며 앓기 시작한 후 라인하르트가 기승(騎乘)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평생 형제처럼 함께 자랐던 라인하르트의 등 위에 다른 남자가 올라있다.
토니 왕자에게는 사뭇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가자!”
한지호는 토니 왕자의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힘찬 외침과 함께 고삐를 잡아당겼다.
동시에 더 놀라운 그림이 펼쳐졌다.
라인하르트가 기다렸다는 듯 다리를 굴리며 뛰어오른 것이다.
푸다닥-!
한 폭의 그림처럼 공중으로 점프한 라인하르트가 멋지게 착지했다.
곧이어 녀석은 답답함을 풀겠다는 듯 맹렬한 질주를 시작했다.
한지호는 특별히 전생의 기억 속 기마술을 꺼낼 필요도 없었다.
허벅지에 힘을 주고, 고삐를 꽉 잡은 채 라인하르트에게 몸을 맡겼다.
‘역시… 울혈이 맺혔군.’
그는 단지 말을 타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그것만으로 토니 왕자를 설득하기엔 부족하다.
마구간에서도 라인하르트를 관찰했지만, 마음껏 달릴 때 어떤 상태인지 세심하게 체크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을 태우고 달리는 라인하르트의 몸이 가벼워 보였다.
그러나 목 근육이 꿈틀거릴 때마다 유독 도드라지는 부분이 눈에 띄었다.
평상시에는 확인할 길이 없는 울혈(鬱血)이다.
그간의 스트레스가 쌓여 곳곳에 울혈을 만든 것이다.
아랫배, 그리고 엉덩이에서 뒷다리로 이어지는 부분에도 울혈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한지호는 라인하르트와 함께 달리며 녀석의 상태를 더 정확히 파악했다.
휘이이익-
세찬 바람이 그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라인하르트는 천천히 구보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그야말로 전투마의 본능을 되새기며 사방을 날뛰고 있었다.
어지간한 숙련자라도 이렇게 거친 움직임은 버티지 못하고 낙마할 수 있다.
그러나 한지호는 처음 말을 타면서 고삐를 붙드는 것뿐 아니라 라인하르트의 증상까지 살폈다.
사육사, 수의사를 통틀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워- 워. 이제 그만. 오랜만에 무리하면 너한테도 안 좋아.”
목적을 달성한 한지호가 고삐를 느슨하게 풀었다 조이며 라인하르트를 다독였다.
흥분한 말을 진정시키는 법도 베테랑 같았다.
그는 그저 전생의 기억대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할 따름이다.
하지만 지켜보는 토니와 헬레나에겐 충격 그 자체였다.
“히히히히힝!”
라인하르트가 긴 울음을 뽑아내며 출발했던 자리로 돌아와 멈췄다.
울음소리의 공명 자체가 이전과 달라졌다.
꽉 막힌 기분을 해소한 다음이라 그런지 시원하게 목청을 뽐낸 것이다.
처억!
한지호는 말등에서 내려올 때도 거침이 없었다.
가뿐하게 착지한 그가 토니 왕자를 쳐다봤다.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섞여 있는 표정이었다.
“말을 이렇게 잘 타는 줄은…….”
“왕자님, 그보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무엇이든. 들어봐야겠죠.”
“방금 라인하르트가 어때 보였습니까? 정해진 코스 없이, 승마 룰에 입각한 동작과 자세도 지키지 않고 막무가내로 달렸습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달린 게 아니라 그냥 날뛴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활기 차 보이지 않았습니까?”
“확실히 부정할 수 없겠더군요.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오랜만에.”
“되살아난 전투마의 본능을 조금이나마 충족했기 때문입니다. 라인하르트에겐 승마보다는 경마, 그리고 경마보다는 광활한 초원에서 마음껏 활개치는 것이 어울립니다. 본능이 깨어난 이상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기는 힘들 겁니다. 달릴 때 살펴보니 목에 울혈이 툭 튀어나오더군요. 제가 침을 놓으면 이틀 안에 울혈을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속도 좋아지고, 사료도 잘 먹게 되겠죠. 그러나 근본적인 해결을 원한다면 이 녀석을 자유롭게 내버려둬야 합니다.”
“라인하르트를 자유롭게 하라……. 내가 아껴준 방식이 라인하르트를 힘들게 했다는 것인가요?”
“왕자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저 우연한 계기로 뒤늦게 깨어난 라인하르트의 본능이 더 이상 안락한 생활과 짜여진 훈련을 원치 않는 것이죠. 몸값이 수십 억이 넘겠지만, 그래도 여러 말들이 함께 생활하는 대형 마사에서 짝짓기도 자주 하게 놔두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거칠지만 자유로운 환경이 처방입니다.”
한지호의 말을 경청한 토니 왕자가 걸음을 옮겼다.
그는 방금 전 달리기의 여운을 즐기고 있는 라인하르트의 앞에 마주섰다.
“히이잉-”
오랜 주인이 다가오자 라인하르트가 애교 섞인 소리를 토해냈다.
스트레스를 풀었기에 조금 덜 예민해진 것이다.
토니 왕자는 두 손을 뻗어 라인하르트의 길쭉하고 잘생긴 얼굴을 어루만졌다.
“라인하르트, 너는 정말… 나를 닮았구나. 내가 왕실에 묶여서 답답한 것처럼 너는 내게 묶여있던 것이라니……. 너라도 내가 놓아줄게,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도록. 그것이 너를 위한 길이라면.”
왕자로 태어나 신생아 시절부터 온세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살아온 토니의 깊은 속내가 드러났다.
그는 가장 아끼는 친구인 라인하르트가 자신처럼 힘들어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토니 왕자의 진심이 느껴졌는지 라인하르트는 눈을 감고 그에게 얼굴을 비볐다.
한지호는 토니 왕자와 라인하르트가 교감을 나누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인마일체(人馬一體)가 따로 없었다.
애잔하면서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런던 하늘을 물들인 붉은 노을이 토니 왕자와 라인하르트를 따스하게 감싸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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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호 한, 왕실은 그대의 의술과 선한 의지에 고마움을 표하며 우정의 징표를 남기고자 합니다.”
굵은 목소리가 울렸다.
영국 왕실의 행사를 집행하는 민스터 백작의 음성이었다.
한지호는 버킹엄 궁전의 대관실 카펫 위에 서있었다.
비공개로 진행되는 행사지만 분위기는 사뭇 엄숙했다.
기다란 카펫 너머 왕좌에는 연로하지만 익숙한 여왕이 앉아 있었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영국의 여왕 옆에 서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토니 왕자였다.
왕세자와 왕세손은 일정 상 불참했다.
하지만 여왕을 알현하고, 직접 선물을 하사 받는 기회는 흔히 주어지지 않는다.
“여왕님께 다가서는 것을 허락합니다.”
민스터 백작의 안내를 들은 한지호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왕실 사람이 아닌 이상 버킹엄 궁전 안에서 여왕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다.
하지만 작위를 수여받을 때와 왕실의 선물을 받을 때만 예외로 인정 된다.
한지호는 라인하르트를 치료한 대가로 왕실의 선물을 받게 됐다.
지난 나흘 동안 라인하르트가 시름시름 앓았던 근본 원인을 밝혀내고, 침술로 녀석의 울혈을 가라앉힌 한지호 덕분에 토니 왕자도 본래의 컨디션을 되찾았다.
토니 왕자를 아들인 왕세자보다 더 아끼는 여왕으로선 바라마지않던 경사였다.
물론 공식적으로 한지호가 토니 왕자의 애마인 라인하르트를 치료한 사실은 밝히지 않는다.
다만 의술로 왕실에 도움을 줬다고 두루뭉술하게 발표할 따름이다.
어쨌거나 한지호는 헨리오 무크에 이어 서양의 주류 사회에 또 한 번 크나큰 충격을 안겨줬다.
동양의 전통 의학을 익힌 젊은 의사가 세계적인 영화 음악 감독과 영국 왕실을 감동시킨 것이다.
서양의 과학과 기술, 그리고 의학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편견을 깨기 충분한 행보였다.
“고마워요. 이제 닥터 한은 왕실의 친구랍니다.”
머리가 새하얗게 샜지만 허리를 꼿꼿이 세운 여왕이 직접 선물을 하사하며 말했다.
우정의 징표는 왕실 인장이 새겨진 브로치였다.
당연히 진귀한 보석으로 만들었지만, 눈에 보이는 가치가 전부는 아니다.
여왕이 하사한 영국 왕실의 브로치를 경매에 내놓으면 몇 억은 넉넉히 받을 것이다.
사실 물질적인 가치는 부수적이었다.
돈을 떠나서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엄청난 명예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앞으로 정장을 입을 때마다 여왕의 브로치를 꼭 붙이겠다고 다짐했다.
“영광입니다, 여왕 폐하.”
선물을 받은 한지호가 다시금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곧이어 다시 얼굴을 든 그는 토니 왕자와 눈이 마주쳤다.
짧고 굵었던 런던 방문에서 왕실의 인정을 받은 것과 별개로 좋은 친구를 만나게 된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그 친구는 다름 아닌 토니 왕자다.
나이는 어려도 배울 점이 많은 인물이었고, 토니 왕자 역시 불가사의한 의술과 기마술을 보여준 한지호에게 마음을 열었다.
서로를 마주 본 한지호와 토니 왕자가 미소를 지었다.
버킹엄 궁전에서 새로운 역사의 가능성이 무르익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