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98화 (198/255)

# 198

4장, 로열 로드(royal road) (2)

한지호가 마음으로 한 말을 알아들은 것일까.

아니면 눈빛에서 뿜어지는 의지와 각오를 읽어낸 것일까.

콧김을 내뿜으며 경계심을 거두지 않던 라인하르트가 더욱 세차게 울었다.

“히이히힝-!”

고막을 때리는 울음소리였다.

사료를 제대로 먹지 않아 야위었는데도 이만한 에너지가 나온다는 게 놀라웠다.

라인하르트가 정상적인 컨디션이었다면 웬만한 맹수는 우습게 봤을 것이다.

실제로 말, 특히 전투마의 역할을 수행하는 놈들은 야성이 살아있다.

몇몇 기록에는 전투마가 병사를 산 채로 씹어 먹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잡식성인 말의 야성이 전쟁터에서 강화되면 호랑이도 뒷걸음질 칠 정도로 난폭해지는 것이다.

기병전(騎兵戰)이 사라진 현대에는 그만한 야성을 가진 말을 찾기 어렵다.

하지만 명마의 혈통을 이어받은 녀석들은 맹수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조심하세요!”

멀찍이 떨어져 서있던 헬레나가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라인하르트의 울음소리와 형형한 눈빛, 뜨거운 콧김과 드문드문 보이는 이빨이 그녀를 겁먹게 만들었다.

하지만 한지호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는 말릴 틈도 없이 굳게 잠겨있던 빗장을 열어버렸다.

철커덩!

걸쇠를 열고 라인하르트가 머무는 축사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거침없는 움직임에 라인하르트마저 당황한 것 같았다.

이제 녀석과 한지호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하나도 없다.

게다가 거리 또한 코가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라인하르트가 마음 먹고 날뛰면 한지호가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이다.

헬레나는 속이 타는지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한국에서 어렵게 모셔온 한지호가 다치기라도 하면 왕실이 책임을 져야할지 모른다.

아주 짧지만 긴장되는 순간, 한지호는 라인하르트의 눈망울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는 노려본다고 해도 될 정도로 강렬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기세 싸움에서 절대 밀리지 않겠다는 뜻이다.

‘내가 너보다 강하다!’

입을 굳게 다문 한지호가 강렬한 메시지를 눈으로 전달했다.

짐승은 본능에 의해 움직인다.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고 판단하면 여지없이 꼬리를 만다.

오금희 호공(虎功)의 기운을 폭발시키고 있는 한지호는 맹수의 제왕이 됐다.

그에게서 뿜어지는 무시무시한 기파를 라인하르트가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기싸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몇 초 동안 한지호의 눈을 쳐다보던 라인하르트가 고개를 돌린 것이다.

“히이잉…….”

울음소리도 훨씬 작아졌다.

눈길을 피하며 자신이 약자임을 인정한 셈이다.

한지호는 순식간에 영국 왕실 최고의 명마를 길들였다.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기선제압이 아니다.

평생 말을 관리해온 사육사가 이 광경을 봤다면 놀라서 뒤로 자빠졌을 것이다.

헬레나도 입을 크게 벌리고 멍하니 서있었다.

한지호는 눈에 힘을 풀고 손을 뻗어 라인하르트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옳지. 착하다, 라인하르트.”

마치 오래 전부터 라인하르트를 길들였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녀석을 다독였다.

고개를 돌렸던 라인하르트는 한지호의 손길을 가만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말이 갈기를 내어준다는 것은 전부를 내준 것과 다름없다.

이윽고 라인하르트가 기분 좋다는 듯 아까와는 다른 표정을 지었다.

갈기를 쓰다듬는 손길이 보통이 아니기 때문일까.

한지호에게 완전히 제압당한 후 경계심을 푼 라인하르트는 믿기 힘들 만큼 온순해졌다.

불과 몇 분 전까지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야성어린 울음을 토하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원래 이것이 명마의 본성이다.

인정하지 않은 사람에겐 한없이 난폭해도 한 번 고개를 숙이면 철저히 말을 따른다.

그렇기에 보통 명마를 길들이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며칠도, 몇 시간도 아니고 몇 분 만에 라인하르트를 길들인 한지호는 갈기를 쓰다듬던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스으으윽-

사람에게 진맥을 하는 것처럼 라인하르트의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서다.

물론 방법은 일반적인 진맥과 다르다.

갈기부터 목 옆 부분, 그리고 근육으로 가득찬 등과 배 아래, 마지막으로 엉덩이와 뒷다리까지 고루 만지며 호흡과 맥박, 근육의 떨림을 느꼈다.

그야말로 종합적인 진단을 시도하는 것이다.

다른 동물에게도 같은 방법이 먹히는지 알 수 없다.

한지호는 물론이고, 전생의 규호도 동물을 치료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말에게는 통한다.

규호는 이런 식으로 여러 명마의 건강을 진단했고, 시름시름 앓던 놈들을 살려낸 적도 많았다.

오나라 마충에게 인계된 후 먹이를 거부하고 죽어가던 적토도 잠시나마 활력을 찾았었다.

“입 한 번 벌려보자. 아-!”

라인하르트의 전신을 쓰다듬으며 상태를 확인한 한지호가 녀석의 얼굴 앞에 섰다.

마치 소아과 환자를 다루는 것처럼 입을 벌리는 시범도 보였다.

동물, 특히 명마는 지능이 꽤 높다.

인간의 언어를 다 알아듣지는 못해도 일정 수준 이상의 교감이 가능하다.

한지호는 두 손으로 라인하르트의 입을 벌리게 만들었다.

힘을 줘서 강제로 벌린 게 아니다.

눈을 맞추고, 녀석이 이해할 수 있게 같이 입을 벌렸다.

그러자 라인하르트가 알아서 커다란 입을 열었다.

“흐음…….”

한지호는 라인하르트의 구취를 맡고, 혓바닥 색깔을 체크했다.

사실 수의사들은 동물을 진단할 때 혓바닥을 보고 건강을 파악하는 경우가 많다.

한지호는 수의사도 아니지만 전생의 기억을 바탕으로 이런 노하우를 알고 있었다.

그는 다시 라인하르트의 옆으로 돌아서서 갈기를 쓰다듬어줬다.

하지만 안색이 그리 밝지 않았다.

“어떻습니까?”

헬레나가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한지호는 그녀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스트레스가 쌓여서 극에 달한 상태입니다. 마음의 병이라고 하면 이해가 될까요. 그러니 수의사들도 쉽게 진단을 내릴 수 없었던 것 같군요.”

“마음의 병… 이요? 말이?”

“동물도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누적이 되면 몸의 병으로 진화하죠. 라인하르트에게 필요한 처방은 따로 있습니다. 토니 왕자님이 돌아오면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한지호의 표정이 묘했다.

헬레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토니 왕자를 제외하면 누구도 다루기 어려워하는 라인하르트를 한지호가 몇 분 만에 길들인 걸 직접 봤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선 그를 믿는 게 최선이다.

한지호는 한숨을 내쉬고 라인하르트의 얼굴을 가볍게 툭툭 쳤다.

“조금만 기다려. 맘껏 뛰놀게 해줄 테니까.”

라인하르트에게 건넨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그래서일까.

라인하르트는 마치 한지호의 속뜻을 알아들은 듯 낮은 소리로 그르렁거렸다.

왕자의 말을 치료하기 위해 찾아온 런던에서 한지호는 처음 만난 라인하르트와 깊은 교감을 나누고 있었다.

+++

라인하르트를 살펴본 한지호는 호텔로 돌아가지 않았다.

예정보다 일찍 토니 왕자가 사저(私邸)로 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토니 왕자의 저택 응접실에서 밀크티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진 않았다.

응접실에 진열된 각종 골동품을 구경하는 것만 해도 무척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무려 주한 영국대사관의 부대사인 헬레나가 전속 가이드처럼 일일이 설명을 해줬다.

영국의 왕위 계승 서열 4위인 20대 초반의 토니 왕자는 골동품과 고고학에 조예가 엄청난 듯 싶었다.

응접실을 채운 각종 골동품 컬렉션은 단순히 돈이 많다고 구비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니었다.

역사에 대한 인식과 취향이 뚜렷해야만 이런 컬렉션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토니 왕자는 스포츠 매니아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예상 외로 스마트한 인물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정장을 입은 집사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와 메이드들을 총괄하는 사람이었다.

“왕자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잠시 마구간에 들르신 후 응접실로 오실 겁니다.”

한지호와 헬레나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토니 왕자는 라인하르트를 진심으로 아끼는 것 같았다.

귀가하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마구간에 들러 라인하르트를 보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원목으로 만들어진 응접실 문이 좌우로 활짝 열렸다.

헬레나는 문이 열리는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한지호도 그녀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모습을 드러낸 토니 왕자는 웬만한 헐리우드 배우 뺨 치게 잘 생겼다.

짧은 금발에 다부진 체격과 푸른 눈동자, 영국인답지 않게 잡티 없이 깨끗한 피부는 사진과 다를 바 없었다.

체크무늬 셔츠 한 장을 입었을 뿐이지만 귀티가 좔좔 흘렀다.

귀티가 나면서도 스포츠맨처럼 건강한 이미지를 가지기는 어렵다.

하지만 토니 왕자는 두 가지 면모를 다 품고 있었다.

괜히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왕족으로 손꼽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여왕을 제외하면 토니 왕자의 아버지인 왕세자나 친형인 왕세손보다도 더 인기가 많다.

그렇기에 현재의 왕위 계승 서열은 4위라도 10년 쯤 흐르고 나면 여론에 의해 순위가 뒤바뀔지도 모른다.

왕실 역시 정치인들처럼 국민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헬레나, 오랜만이에요. 그리고 이쪽은…….”

“말씀드렸던 한국의 닥터 한입니다, 왕자님.”

“닥터 한! 런던까지 먼 길을 와줘서 고마워요. 헨리오 무크의 인터뷰는 아주 인상 깊게 읽었어요!”

그는 무척 쾌활했다.

20대 초반의 서양 남자들이 그렇듯 막힘없고 유쾌한 태도였다.

왕자라고 해서 딱히 거만해 보이지도 않았다.

싹싹하게 먼저 인사를 하며 손을 내밀었다.

한지호는 토니 왕자와 악수를 나누며 목례를 했다.

“한지호입니다.”

“라인하르트는 만나 봤습니까?”

“미리 상태를 체크했습니다.”

“좀 어떻던가요?”

토니 왕자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라인하르트 이야기를 시작하자 그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방금 전까지 구김살 없이 마냥 밝아 보이던 것과 딴판이었다.

헬레나가 설명했던 것처럼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라인하르트를 목숨처럼 아끼는 게 분명해 보였다.

한지호는 토니 왕자를 쳐다보며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스트레스가 극심한 상태였습니다. 목 근육과 아랫배가 딱딱하게 뭉쳐지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사료를 제대로 먹지 않아서 뒷다리의 근육이 조금 빠졌는데도 목과 아랫배는 돌덩이 같았습니다.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목과 어깨가 굳고 소화기관이 정상 작동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증상입니다.”

“수의사들도 내과적 외과적 이상 징후가 없으니 마음의 병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었죠. 대체 뭐가 문제인 것 같습니까? 라인하르트가 스트레스를 받으며 사료도 잘 안 먹는 이유를 모르겠어서 말입니다.”

토니 왕자는 짝사랑하던 여자에게 실연을 당한 사춘기 소년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직 순수함이 남아 있는 청년이었다.

그가 진심으로 라인하르트를 걱정하는 게 느껴졌다.

한지호는 시간을 끌지 않고 자신의 진단을 전했다.

“사료에 한약을 섞고, 뭉친 목 부분에 침을 놓아주면 도움이 될 겁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일시적인 처방이나 보조 효과에 불과합니다. 라인하르트가 스트레스를 받는 근본 원인을 해소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그 원인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라인하르트는 명마입니다. 혈통을 조사해보진 않았지만 전투마의 피를 물려받았겠죠. 간혹 핏줄에 새겨진 본능을 각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왕자님의 극진한 보살핌과 승마 훈련, 명마답게 엄격히 통제 된 교배까지. 이 모든 게 라인하르트를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토니 왕자가 눈을 찡그렸다.

한지호의 설명을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이었다.

자기 입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한지호도 토니 왕자의 반응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도 전생의 기억이 없었다면 이토록 자신감을 보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무슨 말인지 직접 보여드리겠습니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고 했다.

한지호는 왕실의 명마 라인하르트를 낫게 할 방도를 알아냈다.

다만 그 키(key)는 토니 왕자에게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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