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
4장, 로열 로드(royal road) (1)
런던은 세계인들이 꿈꾸는 도시다.
특히 20대 30대 젊은이들 사이에서 런던은 뉴욕, 파리와 함께 반드시 가봐야 할 3대 도시로 불린다.
오랜 전통이 살아있는 건축물, 동화 속 환상을 자극하는 왕실과 귀족의 존재, 그리고 음악과 예술, 패션의 중심지라는 사실까지.
날씨는 변덕스럽고 물가는 비싸지만 수많은 청춘들이 런던에 매료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한지호는 난생 처음 영국에 와봤다.
마음 같아선 런던의 거리를 걸으며 하루 종일 구경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주어진 일정이 길지 않았다.
히드로 공항에 내린 그는 헬레나 부대사를 다시 만났다.
그녀는 한지호를 전담해서 안내하기 위해 먼저 런던에 도착해 있었다.
입국 게이트를 빠져나오자마자 헬레나에게 사로잡힌 한지호는 대기하고 있던 리무진을 탔다.
리무진은 영국이 자랑하는 브랜드 재규어의 XJL이었다.
007 영화에도 등장하는 왕실의 의전 차량에 몸을 실은 그는 조용히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런던 시내로 들어서자 웅장한 건물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고, 각양각색의 패션을 자랑하는 런더너(Londoner)들도 눈길을 끌었다.
“멋지네요.”
꽤 오래 입을 열지 않았던 한지호가 툭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러자 바로 옆에 앉아있던 헬레나가 반색을 했다.
“그렇죠? 만약 시간이 남는다면 전문 가이드를 붙여드리겠어요.”
“아닙니다. 혼자 무작정 걸어 다니는 걸 좋아해서. 시간이 남을지도 아직 모르겠고.”
“네. 우리는 곧 도착할 것 같습니다.”
헬레나가 운전석 너머를 확인하고 목적지에 다가왔음을 알려줬다.
한지호는 비공식적으로 영국 왕실을 방문한 것이다.
치료에 성공하기 전까지는 그가 왕자의 말을 살펴본다는 걸 비밀에 붙여야 한다.
그래야만 왕실은 쓸데없는 구설수에 오르내리지 않고, 한지호도 명성에 흠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에 온 것 자체를 비밀로 할 필요는 없었다.
한지호는 왕궁(王宮)인 버킹엄 궁전(Buckingham Palace)에 들러 간단한 인증 절차를 거칠 예정이었다.
버킹엄 궁전은 왕실의 집무실이자 직계 왕족들의 거처이며 국빈을 맞이하는 공식적인 장소다.
만약 한지호가 라인하르트를 치료하고 나면 국빈 자격으로 버킹엄 궁전에서 다시 환대를 받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신분 확인을 받은 후 왕족들의 사가(私家)에 들어갈 수 있는 출입증을 받는 게 전부다.
“트라팔가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때 헬레나가 다시 한 번 의전 차량이 움직이는 경로를 알려줬다.
한지호는 눈을 크게 떴다.
트라팔가는 런던을 대표하는 광장이다.
런던 시내의 중심지인 동시에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다.
확실히 수많은 인파가 활기를 뿜어내며 트라팔가 광장을 빛내고 있었다.
트라팔가 광장에서 피카딜리 서커스를 지나 더 몰(The Mall) 거리를 지나면 웨스트 민스터다.
여왕이 머무는 곳, 영국인들의 자부심이 서려있는 곳인 버킹엄 궁전은 다름 아닌 웨스트 민스터 중심에 우뚝 서있었다.
한지호를 태운 재규어 XJL은 버킹엄 궁전의 정문으로 들어섰다.
원래 버킹엄 궁전은 1년 중 정해진 날에만 개방된다.
그렇기에 평상시에는 그 유명한 왕실 근위병들이 정문을 지키고 있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근위병 교대식도 영국 관광의 하이라이트다.
물론 근위병이 경호의 전부는 아니다.
궁전 곳곳에 MI6의 최첨단 설비와 특수 요원들이 왕실의 안위를 지키려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스르륵-
정문 앞에서 재규어 차량이 멈춰 섰다.
문을 막은 근위병들은 간단하게 차량 드라이버를 확인했다.
왕실 의전 차량 번호판이 붙어 있었기에 꼬치꼬치 검문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쿠그그긍-
굳게 닫혀있던 버킹엄 궁전의 정문이 가로로 좌악 열렸다.
왕실의 차가 드나들 때마다 궁전에 모여있던 관광객들은 탄성을 질렀다.
일반인은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세계를 향한 동경의 소리였다.
한지호도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정통 복장을 갖춘 근위병들의 엄호를 받고 왕궁 안으로 들어섰다.
현실의 문턱을 넘어 동화 속 세상으로 점프한 기분이었다.
철컥-
차를 세운 운전기사가 문을 열어줬다.
극진한 예우를 받으며 차에서 내린 한지호가 고개를 들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버킹엄 궁전이 눈앞에 서있었다.
궁전 내부에 있는 방이 무려 650개가 넘는다.
얼마나 큰 건물인지 짐작하는 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뒤편의 정원은 48000평이다.
왕실의 미술품을 전시해 놓은 퀸스 갤러리(Queen's Gallery)와 마구간인 로열 뮤스(Royal Mews)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웬만한 광경에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한지호지만 버킹엄 궁전에서는 포커 페이스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저기 걸려있는 깃발이 보이십니까?”
한지호와 함께 차에서 내린 헬레나가 다가와 높은 곳을 가리켰다.
그녀는 궁전 중앙의 게양대를 지목했고, 왕실의 인장이 수놓아진 깃발이 펄럭거리고 있었다.
“로열 스탠더드(Royal Standard)입니다. 여왕님께서 궁에 머무르실 때만 게양되는 것이지요.”
“아… 그렇군요.”
“오늘은 여왕님을 뵙는 일정이 없지만, 좋은 결과를 얻어 꼭 알현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헬레나의 말뜻은 간단했다.
토니 왕자가 아끼는 라인하르트를 치료하면 여왕에게 직접 치하를 받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치료에 성공하면 공식적으로 왕실의 인정을 받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국제적인 뉴스가 될 텐데 여왕을 만난다면 또 한동안 이슈의 중심에 설 것 같았다.
그러나 한지호는 마음을 가볍게 먹었다.
벌써부터 보상을 생각하며 어깨에 힘을 줄 필요는 없다.
잿밥 생각을 많이 하는 건 치료에 하등 도움이 안 된다.
별다른 치료 방법을 찾지 못해도 합당한 액수의 보답을 받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그렇게 부담 없이 생각하는 편이 차라리 낫다.
“그럼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닥터 한?”
“그러죠.”
한지호는 헬레나와 함께 버킹엄 궁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신분 확인을 위한 절차지만 어쨌거나 왕궁에 발을 들이는 것이다.
이제부터 나흘, 런던에서 그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사람이 아닌 말을 상대로도 한지호의 의술이 빛을 발할 수 있을지, 성공 여부에 따라 어쩌면 아주 많은 게 달라질지도 모른다.
뿌옇게 흐린 런던의 하늘 아래에서 한지호의 도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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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왕자가 목숨처럼 아낀다는 명마 라인하르트는 버킹엄 궁전 안에 없었다.
왕실에서 관리하는 말은 보통 로열 뮤스(Royal Mews)에 있다.
로열 뮤스는 궁전 내부에 별도로 지어진 마구간 건물이다.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왕실의 소유가 아니라 토니 왕자 개인이 기르는 말이다.
그는 로열 무스에 사육을 맡기지 않고, 런던 근교의 자택에서 직접 라인하르트를 돌본다.
이것만으로도 토니 왕자가 자신의 애마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
유럽의 귀족과 상류층은 대부분 자기 소유의 말을 가지고 있지만, 사육과 관리는 전문가에게 일임한다.
교외 지역의 승마장에 말을 맡겨 놓으면 걱정 할 일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토니 왕자는 라인하르트를 로열 뮤스나 다른 승마장에 맡겨두지 않았다.
매일 짧게라도 라인하르트와 교감을 나누기 위해 자택의 마구간에 따로 데리고 있는 것이다.
버킹엄 궁전에서 출입증을 받은 한지호는 다시 차를 타고 런던 근교로 향했다.
토니 왕자의 자택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유럽의 대도시는 중심부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탁 트인 교외가 나온다.
푸른 초원과 강물이 흐르는 교외 지역에는 런던 귀족과 상류층의 대저택이 여기저기 세워져 있었다.
번잡한 런던 도심 가까이 이런 지역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곳이야말로 영국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장소다.
스무살이 된 이후 대저택을 상속 받은 토니 왕자는 혼자 살고 있었다.
원래는 케임브리지 대학 기숙사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지만, 곧 영국 해병대에 자원 입대 할 예정이라 자택에서 머무는 중이라고 한다.
토니 왕자의 대저택 정문에는 버킹엄 궁전과 달리 근위병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최신 경호 설비가 자동으로 작동되는 게 보였다.
만약 수상한 사람이 접근하면 그 즉시 경보가 울리고, 저택 내부에 머무르는 경호 병력이 튀어나와 제압을 할 것이다.
“왕자님께서는 오후에 돌아오실 예정입니다. 먼저 라인하르트를 살펴보신 다음 왕자님께 치료가 가능한지 말씀을 해주세요. 가져오신 짐은 차를 통해 호텔로 보내 놓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왕실에서는 한지호를 위해 런던에서 가장 비싼 호텔 스위트 룸을 예약해 놓았다.
나흘의 숙박비만 합산해도 수천만 원에 이른다.
그만큼 한지호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는 것이다.
곧이어 그의 캐리어를 실은 의전 차량이 먼저 떠나갔다.
저벅저벅-
한지호는 몇 걸음 앞장서서 걸어가는 헬레나의 뒤를 따랐다.
토니 왕자의 마구간은 저택 뒤편에 있다.
단순히 집 한 채를 돌아가는 게 아니었다.
방이 수십 개가 있는 대저택을 빙 둘러서 뒤쪽으로 가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걸어가는데 몇 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와!”
말없이 걷던 한지호가 탄성을 터트렸다.
저택 뒤쪽에 세워진 마구간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깨끗하게 새로 지은 티가 역력했다.
무엇보다 마구간 너머로 넓게 펼쳐진 초원이 인상적이었다.
드넓은 초원은 누구의 땅인지 알 수 없다.
공유지일 수도 있고, 토니 왕자나 다른 저택의 주인들이 소유한 사유지일 가능성도 있다.
어쨌거나 말을 타고 푸른 풀밭 위를 달리면 그야말로 그림 같은 풍경일 것 같았다.
이런 곳에서라면 진짜 말을 키울만 할 것이다.
한지호는 감탄을 금치 못하며 마구간 안으로 들어갔다.
후우욱-
마구간 내부에서는 바깥과 다른 열기가 느껴졌다.
한지호는 한 눈에 토니 왕자의 친구인 라인하르트를 찾아낼 수 있었다.
다른 말은 없고, 오직 새하얀 백마 한 마리만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히이잉-!”
짧은 갈기와 잡티 하나 없이 매끈한 몸을 가진 라인하르트는 낯선 사람의 등장에 울음을 토해냈다.
딱 봐도 명마인 게 확실했다.
균형 잡힌 비율과 잘생긴 얼굴, 탄탄하게 자리 잡은 근육은 평범한 말이랑 비교하기 어려웠다.
다만 조금 야위어 보이는 게 문제였다.
“사료를 제대로 먹지 않는 모양이군요.”
한지호의 말에 헬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부터 정상적인 식사량의 절반 정도만 겨우 섭취하고 있습니다. 수의사들이 내부 검진을 해봐도 다른 문제가 없는데…… 토니 왕자님께서 직접 사료를 줘도 잘 먹지 못한다고 합니다.”
“흐음.”
한지호가 짧게 탄식을 흘렸다.
탄성이 탄식으로 바뀌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은 셈이다.
종을 막론하고 동물이 사료를 잘 먹지 않는다는 것은 가장 위험한 신호다.
짐승은 본능적으로 먹이를 갈구한다.
배고픔이야말로 동물에게 있어 가장 두려운 감각이다.
인간은 다이어트 등 다양한 이유로 식단을 조절하지만 동물은 그렇지 않다.
어쩌면 먹는 문제를 어떻게 대하느냐가 인간과 짐승을 가르는 기준일 수도 있다.
“일단 살펴보겠습니다.”
“네. 필요한 게 있다면 바로 말씀해주세요.”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한 헬레나가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한지호는 조심스레 라인하르트에게로 다가갔다.
라인하르트는 경계심을 느끼는지 뜨거운 콧김을 내뿜고 있었다.
아직은 한지호와 라인하르트 사이에 거리가 있다.
하지만 잠겨있는 걸쇠를 열고 라인하르트의 영역 안으로 접근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흥분한 말, 조금 말랐어도 육중한 체구의 명마가 작정하고 날뛰면 사람이 죽는 건 한 순간이다.
물론 오금희를 익힌 한지호가 당할 리는 없지만, 쉽게 볼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지호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라인하르트의 커다란 눈망울을 똑바로 쳐다보며 발을 옮겼다.
콧김이 얼굴에 느껴질 정도, 웬만하면 위압감을 느낄 법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전생인 규호는 고금제일의 명마이자 폭마(暴馬)였던 여포와 관우의 적토도 온순하게 만들었다.
라인하르트가 아무리 대단한 녀석이라도 적토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한지호는 자신감을 갖고 마음으로 말을 걸었다.
‘무슨 이유로 사료도 먹지 않고 앓는지 내게 알려준다면… 반드시 고쳐주마, 라인하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