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96화 (196/255)

# 196

3장, 삼분천하(三分天下) (3)

재즈 음악만이 흐르는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에 헬레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는 언성을 높였다는 사실을 자각한 듯 살짝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흥분한 기색은 여전했다.

이리 되면 한지호도 자초지종을 들어볼 수밖에 없다.

자기 입으로 말을 제외한 동물은 치료할 수 없다고 했는데, 하필이면 영국 왕실에서 고치기를 원하는 대상이 말이기 때문이다.

이해가 안 되는 일은 아니었다.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다.

예로부터 서양의 귀족과 상류층은 경마와 승마를 스포츠로 즐겨왔다.

특히 승마는 귀족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관문 역할을 한다.

예컨대 돈이 아무리 많아도 승마를 할 줄 모르면 뼈대 있는 가문 취급을 못 받는다.

서양에서는 자기 소유의 명마(名馬)를 키우고 관리하며 승마를 즐길 줄 알아야 졸부 취급을 받지 않는 것이다.

한지호가 말을 치료할 줄 아는 것도 우연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전생인 의성 규호는 중국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란의 시대를 누비고 다녔었다.

당시 기병(騎兵)은 군주들이 특별히 관리하는 귀한 몸이었고, 말을 잘 다루는 장수들은 천하에 위명을 쟁쟁하게 울렸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명장들을 숱하게 치료했던 규호는 자연스레 그들의 말도 돌본 적이 있었다.

장수들은 전쟁터에서 자신과 함께 호흡하는 애마를 가족보다 더 소중하게 여긴다.

그렇기에 자신의 말을 맡긴다는 것은 곧 스스로의 생명을 맡기는 것과 다름없었다.

특히 그 이름도 유명한 적토마를 치료한 건 전생의 기억에서 가장 강렬한 부분 중 하나였다.

동탁이 여포에게 선사한 적토마는 조조의 소유가 되었고, 이후 조조는 흠모하던 관우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선물을 한다.

하지만 관우가 죽은 뒤에는 오(吳)나라 마충(馬忠)의 손으로 넘어갔고, 먹이를 거부하다 야위어 죽었다고 알려졌다.

규호는 마충의 부탁으로 먹이를 거부하는 적토마를 치료하게 된 적이 있었다.

비록 적토를 끝까지 살리지는 못했지만, 말도 사람처럼 주인을 가리며 충심(忠心)을 발휘한다는 걸 깨달은 계기였다.

적토를 비롯한 삼국지 장수들의 명마를 가까이서 돌보고 치료했던 기억.

그 기억이 화근이 되어 주한 영국부대사인 헬레나에게 여지를 주고 말았다.

“닥터 한, 왕실을 대신해서 어렵게 부탁을 드립니다. 영국으로 한 번 와주시기만 해도 안 될까요? 말씀드린 것처럼 치료가 불가능해도 충분한 보상을 해드리고, 닥터 한의 명성에 누가 가지 않도록 철저히 비밀을 유지하겠습니다.”

“후우-.”

한지호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잠시 고개를 숙였던 그가 헬레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비행기 탑승까지 한 시간이 남았습니다. 일단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죠. 영국 왕실에 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인지. 결정은 그 다음에 내리겠습니다.”

한지호로서는 최대한의 양보를 한 셈이다.

이만하면 절반은 설득 된 것이나 다름없다.

동물을 치료한다는 점만 제외하면 헬레나가 제시한 조건은 더 할 나위 없이 좋다.

다른 동물도 아니고 하필이면 말이 대상이라고 하니 영국 왕실의 사연을 들어보는 것 정도는 괜찮을 듯 싶었다.

어쨌거나 헨리오 무크 이후 서양의 유력인사와 연을 맺을 수 있는 기회다.

상대는 보통 유력인사도 아닌 영국 왕실이다.

한지호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부대사 헬레나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서의 만남.

한지호와 영국 왕실 사이에 인연의 붉은 실이 놓아질 것 같았다.

+++

“그럼 저도 한국에 가게 되는 것입니까?”

바이룽이 눈을 크게 떴다.

한지호와 함께 일하며 예전보다 더 차분해진 그가 이만큼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는 흔치 않다.

물론 좋은 쪽으로 흥분한 것이다.

한지호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K-메디컬 타운의 메인 타겟은 중국 관광객입니다. 바이룽 부원장님이 중심을 잡아주면 원화 정의 한의원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렇지만… 홍콩은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원장님께서 안 계시고, 저도 자리를 비우는 날이 생긴다면…….”

“사람을 새로 뽑아야죠. 홍콩 원화 한의원도 안정기에 접어들었으니까.”

“괜찮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원장님 눈에 차실.”

“처음부터 100을 기대하면 힘들겠지만, 태도가 바르다면 사람을 키우는 것도 재미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같이 키우면 됩니다.”

“아, 죄송합니다. 저도 아직 부족한데 주제 넘은 말씀을 했던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전혀요. 바이룽 부원장님이 없었다면 홍콩 원화 한의원이 이렇게 빨리 자리를 잡지는 못 했을 겁니다.”

한지호는 새삼 인연의 소중함을 느꼈다.

칭화 병원 중의학과장이던 바이룽의 첫인상은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없어서는 안 될 홍콩 원화 한의원의 버팀목이 됐다.

이제는 바이룽을 주기적으로 K-메디컬 타운 내부의 원화 정의 한의원에 초청해서 중국 환자를 상대하는 노하우를 전수하게 만들 계획도 세웠다.

바이룽은 단순히 홍콩에서 한지호의 대타 역할을 하는 부원장이 아니었다.

스스로 성실한 모습으로 신뢰를 얻었고, K-메디컬 타운에서 중역을 맡으라는 제안은 그에 대한 보상이었다.

“바이룽 부원장님이 아는 중의사들 중에서 새로운 영역에 도전할 자세가 갖춰진 사람으로, 이왕이면 젊을수록 좋습니다. 한 번 알아봐 주세요.”

“네, 원장님. 심혈을 기울여 추천을 받아보겠습니다.”

“잘 알겠지만 당장의 실력이나 커리어보다는 태도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원장님께서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보시는지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하하! 그래요, 믿을게요.”

한지호가 다시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홍콩 리펄스 베이에 한의원을 열고 무모한 도전을 시작한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바이룽은 한지호의 곁에서 한의학적 지식과 치료 노하우를 전수받았고, 그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도 자연스레 알게 됐다.

아마 재촉하지 않아도 좋은 싹을 지닌 젊은 중의사를 스카웃 해서 데려올 것이다.

최종판단은 한지호의 몫이지만, 바이룽이 추천한 인물은 그냥 믿어도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원장님, 그런데 K-메디컬 타운에서는 원화 정의 한의원도 중요하지만 원화 아카데미가 제몫을 해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바이룽이 화제를 살짝 돌렸다.

아무래도 자신이 자주 들락거리게 될 K-메디컬 타운에 관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도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일원이니 궁금해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이미 어느 정도는 설명을 해놓았지만, 한지호는 그가 모르는 이야기를 좀 더 풀기 시작했다.

“미한약품과 Y대 의대도 중요한 일원으로 참여하지만, 원화 아카데미의 연구 목표와 실험을 이끄는 건 결국 우리 몫입니다.”

“그 말씀은…….”

“한의학이라는 토대 위에서 Y대 암센터의 현대 의학과 미한약품의 제약 기술을 펼쳐 나가겠다는 뜻이죠. 첫 번째 신약도 한약의 형태로 개발 될 겁니다.”

한지호의 비전은 분명했다.

원화 아카데미는 한의학과 현대 의학의 융합을 시도하는 한국 최초의 연구기관이다.

그러나 뿌리는 한의학이다.

무엇이 더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다.

처음부터 한지호는 한의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원화 아카데미를 만든 것이었다.

그는 원래의 목적대로 원화 아카데미를 이끌어갈 계획이고, 미한약품의 신영준 회장과 Y대 암센터의 최규열 센터장도 동의를 했다.

한지호라는 구심점이 없으면 누구도 시도하기 힘든 프로젝트기에 그의 발언권은 절대적이다.

그 옛날 제갈공명은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내놓았다.

드넓은 천하를 위, 촉, 오 셋으로 나눈 다음 후일을 도모하자는 책략이었다.

반면 한지호는 미한약품과 Y대 의대를 원화 아카데미로 끌어들였다.

제약과 현대 의학이라는, 각자 다른 천하를 지탱하고 있는 기둥을 품에 안은 것이다.

한의학까지 세 개의 영역을 하나로 모아서 더 넓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방식이다.

힘을 분산시키지 않고 하나로 모을 때 천하를 도모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전생에서 얻었기 때문일까.

탄력을 받기 시작한 한지호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바이룽은 자신이 어마어마한 프로젝트에 일원으로 올라탔음을 느꼈다.

한지호라는 선장이 이끄는 배는 그리스 신화 속 아르고(Argo)처럼 드림팀으로 거듭나는 중이다.

항해의 끝이 어디일지, 감히 짐작하는 것조차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

“하아-.”

한지호가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창문 너머로 구름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하늘을 뚫고 구름보다 높은 곳으로 날아오른 그는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서울과 홍콩을 오가며 K-메디컬 타운 입주를 준비하는 요즘은 정말 몸이 두 개라도 모자라다.

그런데 나흘이나 스케줄을 빼게 됐으니 걱정이 앞섰다.

물론 바이룽과 문재영이 두 곳의 한의원을 든든히 지킬 것이다.

하지만 시기가 시기인 만큼 염려가 되는 게 사실이었다.

결국 헬레나 부대사의 부탁을 뿌리치지 못한 한지호는 영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왕실을 대신해 간절히 부탁을 하는데 마냥 거절할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다른 동물이 아닌 말은 치료할 수 있다고 먼저 여지를 줬기 때문이다.

“그래도 좋은 기회는 기회니까. 최선을 다해야겠지.”

한지호는 혼잣말을 읊조리며 마음을 다스렸다.

이미 런던 히드로 공항으로 날아가는 비행기의 퍼스트 클래스에 몸을 파묻었다.

이제 와서 복잡하게 생각해봐야 바뀌는 것은 없다.

그는 승무원이 퍼스트 클래스에만 제공되는 와인과 샴페인을 가져오기 전에 영국 왕실의 사연을 떠올렸다.

현재 영국 왕실은 수십년 째 여왕을 모시고 있다.

여왕의 아들인 왕세자는 중년을 훌쩍 넘겼어도 여전히 왕좌에 오르지 못하는 실정이다.

대신 왕실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것은 왕세자다.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왕세자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는데, 둘째인 토니 왕자가 바로 한지호를 영국까지 부른 장본인이다.

여러 언론에서 편의상 왕자라고 불리지만 정확히 따지면 왕손인 그는 영국의 왕위 계승 서열 4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입헌군주국 영국에서 핏줄로는 네 번째로 높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래봐야 이제 막 스무살이 된 청년이지만, 모범적인 태도와 스포츠맨십으로 벌써부터 영국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한지호가 치료 의뢰를 받은 대상은 토니 왕자가 아니다.

대신 그가 목숨처럼 아낀다는 명마(名馬) 라인하르트를 살펴보기 위해 영국 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이다.

어린 시절 생일 선물로 라인하르트를 받은 토니 왕자는 여러 스포츠 중에서 승마를 가장 좋아했다.

생일 선물이 독일 혈통의 백마이고, 취미 생활이 승마라는 걸 보면 확실히 사는 세계가 다른 것 같았다.

아무튼 그는 어려서부터 함께 커온 라인하르트를 분신처럼 여겼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라인하르트가 원인 모를 병에 걸렸고, 최고의 수의사들도 뾰족한 수를 찾아내지 못했다.

토니 왕자는 라인하르트 때문에 왕실의 행사에도 불참할 정도로 마음을 쓰고 있다.

이 소식이 영국 여왕의 귀에도 들어갔고, 손자를 끔찍이 사랑하는 할머니인 여왕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라인하르트를 고치라는 엄명을 내렸다.

하지만 왕실에서는 특별한 방법을 찾지 못했고, 최후의 카드로 한지호를 선택한 것이다.

마침 헨리오 무크의 인터뷰로 한지호의 존재가 영국에도 알려졌고, 서양 수의사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동양적 전통 치료가 먹힐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도 한 몫을 했다.

한지호는 그야말로 우여곡절 끝에 최상의 조건을 제시 받고 말을 치료하러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기억 속에 답이 있어, 내 기억 속에.”

그의 혼잣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전생의 기억은 한지호에게 교과서나 다름없다.

내키든 내키지 않았든 상관없이 영국 왕실과 인연을 맺는 것은 크나큰 기회다.

이 기회를 살릴 수 있다면 한지호의 맨 파워(Man Power)는 또 업그레이드 될 것이다.

쿠구우우우웅-!

인천을 떠난 비행기가 푸른 하늘의 품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영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기대와 걱정이 교차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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