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95화 (195/255)

# 195

3장, 삼분천하(三分天下) (2)

“왕실이라고 했습니까?”

한지호가 눈을 크게 떴다.

늘 계산적이고 차분한 박우식이 갑자기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우식이 장난을 칠 사람이 아니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도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정확히 말씀을 드리자면, 주한 영국대사관에서 접촉을 해온 것입니다. 하지만 영국 왕실의 요청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아울러 비밀 유지를 부탁했습니다.”

“대사관이라면 장난을 칠 리는 없겠군요.”

“네, 원장님. 그쪽에서 가능한 빨리 미팅 스케줄을 잡고 싶다고 해서 바로 전화를 드린 것입니다.”

“미팅이라면 영국에서요?”

“일단은 서울에서 대사관 관계자가 원장님을 뵙길 원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용건은 직접 만나서 이야기 하겠다고 하는데, 왕실의 이름을 언급할 정도면 보통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내일 진료 끝나고, 홍콩으로 가는 비행기 타기 전에 잠깐 시간이 비죠?”

“그렇습니다.”

“그 시간 가능하면 스케줄 잡아주세요. 안 되면 홍콩 다녀와서 봐야할 것 같군요.”

“대사관에 전화하고 바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고생해주세요.”

한지호가 박우식과 통화를 마무리했다.

전화를 끊고도 그는 계속 스마트 폰을 쳐다봤다.

영국 왕실에서 대사관을 통해 자신을 찾았다는 사실이 신기하기 때문이다.

입헌군주제를 유지하는 영국에서 왕실은 상징적인 존재다.

실질적인 통치를 하지 않아도 왕실의 영향력은 아주 막강하다.

세계 곳곳에서 왕실이 외교적으로 아주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것은 물론, 영국 국내 정치에서도 알게 모르게 알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한국 사람에겐 왕실(王室)이라는 말 자체가 동화 속 이야기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영국 왕실이 한지호의 고객이 된다면 VVIP가 아니라 VVVIP, 과장을 조금만 보태면 V를 100개는 붙여도 될 것이다.

‘일단 대사관 사람을 만나보고, 자초지종을 따져봐야지. 흥분은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아.’

한지호는 살짝 들뜬 마음을 가라앉혔다.

자고로 설레발을 치거나 일찍 샴페인을 터트려서 좋을 일은 하나도 없다.

그는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다른 원장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무장님, 그러니까 박 이사님 전화였습니다.”

“안 좋은 일은 아니지요?”

“전혀 아닙니다. 그보다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자면, 메디컬 타운 중심부에 들어서는 원화 정의 한의원과 원화 아카데미를 위한 인력 확충을 생각 할 타이밍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공동으로 키운 부원장들도 여기에 투입하겠지만, 더 많은 신규 인력과 연구 인력이 필요해질 겁니다.”

“한 원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규모가 워낙 큰 사업이니 미리미리 사람을 뽑아두지 않으면 무척 곤란해지겠지요.”

“원화 아카데미의 연구 인력은 따로 선발하고, 메디컬 타운의 한의원에서 일 할 부원장 급, 혹은 그 이하의 한의사들은 이번에도 공동으로 면접을 보는 게 어떻습니까.”

한지호의 말에 네 명의 원장들은 짠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요.”

“당연히 그래야지.”

“저도 찬성입니다.”

그동안 끊임없이 소통하며 큰 방향을 잡아뒀기에 이견(異見)이 나올 여지가 적었다.

수도권의 요충지로 급부상하고 있는 김포 한강신도시.

그곳에 건설 중인 K-메디컬 타운은 의료 분야로 한국의 새로운 먹거리를 창출하기 위한 정부의 실험체다.

한지호의 도전이 담긴 원화 정의 한의원과 원화 아카데미는 K-메디컬 타운의 중심부에서 뼈대를 드러내고 있었다.

역사를 향한 도전의 현장에서 한지호와 네 명의 원장들은 단단하게 의기를 투합했다.

한지호라는 사공을 믿고 물살을 가르는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앞날이 밝아 보였다.

+++

급하긴 급한 모양이었다.

주한 영국대사관에서는 한지호의 스케줄을 무조건 받아들였다.

그가 홍콩에 다녀오기를 기다릴 틈이 없는 듯 했다.

여느 때처럼 오전, 오후 진료를 마치고 홍콩으로 가는 밤 비행기를 타기 전.

다른 미팅이나 VIP 개인 진료가 없는 날이기에 원래라면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영국대사관에서 나온 사람을 만나게 됐다.

원래 선진국 대사관 직원들은 콧대 높기로 유명하다.

특히 영국, 미국, 호주로 이어지는 삼국 대사관의 거만함은 외교가에서도 악명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대사관에서는 모든 것을 한지호에게 맞췄다.

홍콩 비행기를 놓치면 안 되는 한지호의 일정을 고려해 약속 장소도 인천공항의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로 잡았다.

원래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는 아무나 이용할 수 없다.

항공사에서 퍼스트 클래스 티켓을 구매한 사람, 또는 최고 등급의 마일리지 카드를 소유한 사람만 들어올 수 있다.

게다가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로 들어가려면 출국신고를 해야 한다.

그렇기에 비슷한 비행 일정이 없는 이상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에서 미팅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상대는 대사관 직원이다.

외국 대사관 직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을 이용하면 방법이 없지 않았다.

출국신고의 문턱은 외교관 패스를 이용해서 넘으면 된다.

비행기를 밥 먹듯이 타는 대사관 직원은 최고 등급의 마일리지 카드도 갖고 있었다.

사실 주한 영국대사관 소속의 일개 외교관이 한지호를 만나러 오는 게 아니었다.

무려 부대사가 한지호의 스케줄을 맞춰 인천공항까지 온 것이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한 영국대사관의 헬레나 부대사는 아주 깍듯하게 예우를 갖췄다.

영어에도 격이 있다.

어휘와 엑센트, 발음, 미묘한 뉘앙스로 영어의 레벨이 결정된다.

특히 영국 영어는 엑센트 하나로 상류계급과 하류계급을 나눌 수 있을 만큼 구분이 빡빡하다.

헬레나는 당연히 최상류층의 영어를 사용했고, 한지호가 듣기에도 공손한 어휘와 뉘앙스를 구사하려 노력하는 것 같았다.

“아닙니다. 비행시간 때문에 부득이하게 이곳에서 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한지호도 예를 갖췄다.

초면이기도 하지만 상대의 신분을 알고 있으니 약간은 부담스러웠다.

영국을 대표하는 공무원이자 외교관이 아닌가.

대사가 외교 공관의 얼굴이라면 실질적인 일은 부대사가 다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지호는 헬레나의 눈을 마주보며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중년에 이르렀지만 정갈하게 묵은 갈색 머리와 푸른 눈, 그리고 깔끔한 정장 아래 감춰진 탄탄한 체형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젊었을 때 모델 출신이었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여성에게도 미중년이란 말을 사용해도 된다면 헬레나에게 딱 어울리는 표현이다.

그녀가 주한 영국대사관의 넘버2이자 실무를 책임지는 고위 외교관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저도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에서의 미팅은 처음입니다. 아주 좋네요.”

엑설런트(excellent)의 영국식 엑센트가 한지호의 귀에 확 꽂혔다.

여자들이 괜히 영국 영화배우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음절마다 똑 부러지는 영국 발음은 듣는 사람을 빠져들게 만드는 힘이 있다.

한지호는 한결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보통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에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중요한 미팅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현실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명망 높으신 닥터 한을 만날 수 있다면 제가 어디든 와야지요.”

고위 외교관이기 이전에 헬레나는 한지호보다 10살은 더 많을 것이다.

조금은 과할 정도로 극진한 그녀의 태도에 한지호는 점점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대체 무슨 용건인 것일까.

주한 영국대사관의 부대사가 무엇이 아쉬워 이렇게 공손해진 것일까.

공항까지 찾아와서 급히 미팅을 잡은 것부터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영국 왕실의 인물을 치료해 달라는 부탁을 할 줄 알았다.

헨리오 무크를 치료하며 세계적인 유명세를 탔으니 영국 왕실에서 의뢰를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단순한 치료 의뢰는 아닌 것 같았다.

한지호는 단도직입적으로 상대의 의중을 물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바로 묻겠습니다. 사무장님에게 듣기로는 영국 왕실의 요청이라 했는데, 무슨 일이기에 헬레나 부대사께서 저를 찾아오신 것입니까?”

“닥터 한이 한국과 중국에서 의술로 쌓은 명성을 왕실에서도 주시하였습니다. 헨리오 무크의 인터뷰 역시 많은 화제가 되었으니까요.”

“감사합니다.”

“그래서 왕실에서는 비밀리에 치료를 부탁드리고 싶어 합니다. 제가 다른 수행원을 대동하지 않고 온 것은 왕실의 뜻에 따라 비밀을 유지하기 위함이지요.”

“비밀 치료라…….”

“완전한 비밀을 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치료가 잘 끝나면 왕실에서 공식적으로 닥터 한을 치하 할 예정이고, 그리 되면 세계적으로 또 한 번 이슈가 되겠지요. 다만 헨리오 무크의 경우처럼 치료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을 함구해주시길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만약 치료 결과가 좋지 않다면 이 모든 과정은 없던 일이 되었으면 합니다.”

“치료에 실패하면 아예 없던 일로 삼으라는 뜻입니까?”

“그것이 닥터 한의 명성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물론 바쁘신 분을 영국까지 모셔놓고 아무 보답도 드리지 않을 왕실이 아닙니다.”

한지호는 헬레나의 말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영국 왕실의 요구는 간단하고 명확했다.

한국과 중국을 넘어 헐리우드까지 퍼져나간 의술로 누군가를 치료하면 된다.

치료에 성공하면 영국 왕실에서 공식적으로 한지호에게 상을 내릴 것이다.

다만 누구의 어떤 병을 치료했는지는 함구해야 한다.

그러나 치료에 실패하면 영국 왕실과 한지호의 접촉은 기록에 남지 않는 비밀로 묻힌다.

대신 영국까지 와서 진료를 한 수고에 대한 보상은 왕실에서 넉넉히 지불 할 거라는 이야기였다.

스케줄을 뺄 수만 있다면 밑질 게 없는 장사다.

성공하면 영국 왕실의 인정을 받으며 서양에서 유명세를 확실히 굳힐 수 있다.

헐리우드와 왕실, 미국과 영국이라는 서양 세계의 두 축을 한의학으로 공략하게 되는 셈이다.

설혹 실패해도 잃을 것 없이 금전적 보상을 받는다.

한지호가 아무리 유명한 한의사지만, 영국 왕실에서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며 내건 조건치고는 너무 좋았다.

“사전 정보는 전혀 없습니까? 비밀을 약속한다는 전제 하에 환자와 질병에 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마음은 이미 절반 이상 기울었다.

이런 조건이라면 영국에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한의학으로 월드 투어를 하겠다는 평소의 꿈과도 일치하는 미션이다.

하지만 까막눈인 상태로 영국까지 날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최소한의 정보는 주어져야 한지호도 준비를 할 수 있다.

그의 질문을 받은 헬레나는 올 게 왔다는 듯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곧이어 왜 부대사인 헬레나가 그토록 공손한 태도를 보였는지 드러났다.

“왕자께서 목숨처럼 아끼시는…… 동물을 치료해 주셨으면 합니다.”

바로 이것이었다.

한의사인 한지호에게 사람이 아닌 동물을 치료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무리한 부탁이고, 경우에 따라서 대단히 불쾌한 제안으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충분하다.

그런 점을 알기 때문에 헬레나도 무척 신경을 썼던 것 같았다.

“왕자가 아끼는 동물? 수의사를 찾아가는 게 맞지 않습니까.”

한지호는 저도 모르게 말에 날이 섰다.

그 역시 헬레나의 말을 듣고 황당한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헬레나는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모든 수의사들이 실패했습니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왕실에서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합니다. 오죽하면 제게 이런 지시를 내렸을지…….”

그러고 보니 헬레나의 처지도 딱하게 됐다.

부대사라는 고위 외교관이면 어디서든 떵떵 거리고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랴부랴 한지호를 찾아와 통 사정을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안 되는 일은 안 되는 것이다.

불가능한 일을 억지로 맡을 순 없다.

“능력 밖의 일인데 영국까지 가는 건 무의미합니다. 말이 아니면 동물을 치료할 능력이 없습니다.”

“닥터 한, 방금 혹시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갑자기 헬레나의 눈이 커졌다.

한지호는 그녀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대답했다.

“능력 밖의 일이라서 영국으로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아니, 그 다음에요. 말이 아니면 동물을 치료할 능력이 없다고……. 그럼 말은 치료하실 수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헬레나의 말을 들은 한지호는 아차 싶었다.

본능적으로 전생의 기억이 혼재되어 실언을 한 것이다.

전란의 삼국시대 곳곳을 누비고 다녔던 규호는 말을 치료한 적이 있었다.

전설의 명마, 적토(赤兎).

여포와 관우의 총애를 받았던 적토마를 치료한 기억이 생생했다.

헬레나는 한지호가 내뱉은 한 마디를 놓치지 않았다.

“왕자께서 목숨처럼 아끼는 동물은 바로 말입니다. 닥터 한이 방금 치료할 수 있다고 하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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