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
3장, 삼분천하(三分天下) (1)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많은 수의 기자들 앞에서 공식적인 자리를 갖는 것은.
찰칵- 찰칵찰칵!
한지호가 나타나자 기다렸다는 듯 플래쉬가 터졌다.
눈부신 카메라 플래쉬도 낯설지 않았다.
공식 기자회견이 오랜만이긴 하지만, 한지호는 연예인 이상으로 카메라 마사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곳은 다름 아닌 Y대 의대 본관이었다.
방금 전에는 암센터의 최규열 센터장이 기자들 앞에서 브리핑을 마쳤다.
그러나 기자회견의 클라이막스는 한지호의 차례라는 걸 모두가 다 알고 있었다.
한국, 아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한의사.
한국의 전통의학으로 중국을 넘어 헐리우드까지 명성을 날리는, 게다가 젊고 훈훈하기까지 해서 여심을 가차없이 흔드는 남자.
바로 그 한지호가 단상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대표 원장, 한지호입니다.”
단지 한 문장으로 자기 소개를 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하던 기자회견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특히 미혼의 여기자들이 저도 모르게 탄성과 한숨을 흘렸다.
냉정함을 지켜야 하는 취재원이지만, 한지호를 직접 봤다는 사실에 팬심이 표출 된 것이다.
“먼저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신 최규열 센터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센터장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Y대 의대와 원화 정의 네트워크, 그리고 미한약품이 함께 원화 아카데미에서 다양한 의학 연구를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지난 번, 췌장암을 앓던 환자를 조기에 발견하고 Y대 암센터와 함께 치료했던 경험이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때처럼 한의학과 현대의학이 힘을 합치면 대한민국 의술 발전에 보탬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신약 개발에 앞장서온 미한약품의 투자와 노하우 역시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저는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원장님과 모든 구성원을 대신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네트워크의 명예를 걸고 의학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K-메디컬 타운에서 펼쳐질 역사, 원화 아카데미가 만들어갈 의술의 미래를 기대해주시기 바랍니다.”
짤막한 포부였다.
한의학과 현대의학, 제약회사가 힘을 모아서 의학 연구 기관을 만들었다.
원화 아카데미는 한지호가 주도해서 만든 기관이지만 그동안 어울리지 않던 의료계의 삼대 축을 하나로 모았다.
그것만으로도 역사적인 의미가 차고 넘쳤다.
한지호는 또 한 번 뉴스의 중심에서 한국 의료사에 획을 그었다.
단상 앞에 어깨를 떡 벌리고 선 그의 모습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옛날로 치면 새로운 영토를 정복하고 백성들 앞에 나타난 개선장군 같았다.
그가 살짝 고개를 숙여 마이크 앞에 입을 붙였다.
“미리 알려드렸던 대로 30분간 질의응답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기자회견을 시작하기 전에 언론사별로 질문 순서를 정해뒀다.
그러지 않았다면 질의응답 시간이 난장판이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베테랑 기자들이 질문을 하기 위해 손을 번쩍 들고 몸싸움을 하는 광경은 영화에서나 나온다.
대부분의 기자회견에서는 언론사마다 질문 횟수와 순번을 정해주기 마련이다.
물론 질의응답에도 언론사끼리 묘한 알력 다툼이 존재한다.
주최측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 메이저 언론사와 유명 기자가 앞 순서를 배정 받을 수 있다.
한지호에게 첫 번째 질문을 하게 된 기자도 알아주는 베테랑이었다.
“고려일보 변성욱 대기자입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 기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다른 기자들은 기대어린 눈빛으로 그를 주시했다.
대기자 직함은 아무나 달 수 없다.
기자로서 동종업계에서 인정을 받고, 최소 20년 이상의 경력을 쌓아야만 회사에서 대기자라는 직함을 부여한다.
특히 고려일보라는 국내 최대 일간지의 대기자는 다른 언론의 국장이나 편집장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는다.
데스크가 되기에 충분한 경력이지만 여전히 현장을 지키는 기자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변성욱 대기자의 질문은 무척 날카로웠다.
“원화 정의 네트워크에서 200억 원, Y대 의대에서 100억 원 상당의 연구 장비와 인력 지원, 그런데 미한약품에서는 어느 정도의 자금을 투자할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습니다. 아직 밝힐 수 없는 것입니까? 아니면 미한약품은 원화 아카데미의 연구 성과가 나왔을 때 선별적으로 투자를 하게 되는 것입니까?”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몇 몇 기자들이 탄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부분 원화 아카데미의 비전이나 목표, K-메디컬 타운에서의 활동 범위 등에 대해 질문을 할 참이었다.
더러는 이 자리를 빌어 한지호에게 개인적인 질문을 하려는 기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변성욱 대기자는 달랐다.
원화 아카데미는 삼각편대다.
원화 정의 네트워크과 Y대 의대, 그리고 미한약품이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미한약품이 어떻게 투자를 하고 관여할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안이다.
변성욱은 미한약품이라는 글로벌 제약회사가 원화 아카데미를 얼마나 중요한 투자 대상으로 여기는지 알기 위해 정곡을 찌른 것이다.
맥락을 파악한 기자들이 한지호를 주시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가 충분히 당황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미한약품의 투자 규모가 얼마 안 되거나 신약을 개발해야만 협조하는 형식이라면 원화 아카데미의 가치는 저평가 받을 수밖에 없다.
반대로 미한약품이 마음을 먹고 투자를 한다는 게 밝혀지면 원화 아카데미를 향한 기대감도 증폭 될 것이다.
과연 한지호는 변성욱 대기자의 질문에 똑 부러지는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어물쩍거리며 답을 넘기면 기자들이 이 부분을 기사로 써낼 게 분명했다.
“고려일보의 변성욱 대기자님. 역시 소문대로 예리하십니다.”
단상에 선 한지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변성욱을 칭찬했다.
놀랍게도 그는 웃고 있었다.
날카로운 질문으로 인해 수세에 몰린 기미가 전혀 안 보였다.
“사실 최규열 센터장님과 저는 앞서 미한약품의 투자 규모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원화 아카데미의 비전에 대한 관심보다 자극적인 투자 액수에 이목이 집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질문을 받았으니 답을 드려야겠죠.”
한지호는 마치 이런 질문이 나오기를 기다린 것 같았다.
분명 기자들 중 한 명은 미한약품과의 연결고리를 건드릴 거라 예상한 것이다.
그렇기에 일부러 앞선 브리핑에서 미한약품을 길게 언급하지 않았었다.
기자들의 질문 없이 그냥 넘어가면 원화 아카데미의 비전에 집중할 수 있고, 설혹 누군가 정곡을 찔러도 드라마틱하게 반전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베테랑 취재진 수십 명을 손바닥 위에 놓고 갖고 논 셈이다.
한지호의 설계를 깨달은 변성욱 대기자는 머리털이 쭈뼛쭈뼛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미한약품 신영준 회장님과 직접 MOU를 체결했습니다. 신 회장님께서는 초기 투자금으로 1000억 원을 펀딩하셨습니다. 원화 아카데미에서 신약을 개발하지 못해도 한의학과 현대의학이 어우러져 연구를 하고, 한의학을 체계화시킨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며 선뜻 뜻을 모아주셨죠. 그렇기에 초기 투자금 1000억 원에는 아무런 조건이 붙지 않았습니다.”
“아…… 대, 대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변성욱 대기자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이미 다른 기자들은 한지호의 답변을 노트북에 적어 옮기기 바빴다.
넋이 나가 입을 헤 벌리고 있는 기자들도 있었다.
1000억.
엄청난 거액이지만, 국제 투자 세계에서는 한 번에 1조 원이 넘는 금액이 오가기도 한다.
그러나 한지호가 신영준 회장으로부터 투자 받은 1000억 원은 특별했다.
성공 가능성이 불투명한 한의학 의료 연구 분야에 투자를 받은 것치곤 천문학적인 돈이다.
게다가 조건이 없는 투자금이란 말도 충격적이었다.
보통 제약회사에서 연구기관에 투자를 할 때는 개발 시기와 임상 실험 결과 등 까다로운 조건을 요구한다.
연구실적이 부족하면 투자금을 일정 부분 회수하는 조항도 넣기 일쑤다.
미한약품도 마찬가지다.
신약개발 성공으로 글로벌 제약회사가 된 미한약품은 결코 일을 설렁설렁 추진하지 않는다.
더구나 웬만한 기자들은 육군 소장 출신의 신영준 회장이 얼마나 빡빡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다.
신영준 회장은 시가총액 5천억 원의 미한약품을 4조 원으로 만든 장본인이지만, 여전히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며 헝그리 정신을 강조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가 1000억 원을 조건 없이 투자했다는 건 대단한 뉴스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평창동의 황만금도 한지호의 얼굴만 보고 100억 원을 투자했다.
그렇지만 미한약품 신영준 회장이 내놓은 1000억 원의 임팩트는 차원이 달랐다.
타닥, 타다다닥!
기자들의 타이핑 소리가 회견장을 뒤덮었다.
조용하지만 불꽃같은 열기가 타오르고 있었다.
첫 번째 질문에서 폭탄을 터트린 한지호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다음 질문을 받을 차례다.
언제나 그랬지만, 한지호의 기자회견과 인터뷰는 특별하다는 게 다시금 증명된 것 같았다.
+++
쿠우웅- 철커덩!
요란한 기계음과 소음이 고막을 때렸다.
쉬지 않고 흩날리는 먼지는 맑은 가을 하늘을 가려버릴 정도였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밝았다.
안전모를 쓴 한지호와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원장들은 K-메디컬 타운 공사 현장을 시찰하는 중이었다.
새로운 미래, 역사적 비전이 펼쳐질 장소다.
착착 진행되고 있는 공사 현장을 둘러보는 것이니 얼굴이 환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떻습니까?”
한지호가 안전지대에서 원장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네트워크 소속의 모든 원장들이 오전 진료를 부원장에게 맡기고 왔다.
그들은 현장에 오길 잘 했다는 듯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역시 정부에서 신경을 쓰는 사업이라 공사도 아주 깔끔한 것 같아.”
가장 연장자인 최 원장이 핵심을 잘 짚었다.
K-메디컬 타운은 정부가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추진하는 국책 사업이다.
공사 진행과 현장 관리 또한 철저한 게 당연했다.
한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 올라가는 건물에 우리 한의원이 들어설 겁니다. 공식 명칭은 원화 정의 한의원으로 정했습니다.”
“딱 중심 위치인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K-메디컬 타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해야 합니다. 기대를 아주 많이 받고 있어요.”
한지호가 박 원장의 말에 호응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K-메디컬 타운은 대규모 의료 단지다.
명문대 의대에서도 참여했고, 강남의 초대형 성형외과도 입주한다.
그런데 가장 요지를 한의학으로 입주한 원화 정의 네트워크에게 내어준 것이다.
정부 측의 특별한 배려와 기대가 아니었다면 힘든 일이다.
“우리는 단순히 한의원만 입주하는 게 아니라 원화 아카데미로 1000억 이상의 R&D 투자도 하니까요. 정부에서 우리를 간판으로 내세워 K-메디컬 타운을 홍보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아니라 한 원장님이 간판이 되시는 거지요.”
“그게 그거죠. 우리는 하나, 아닙니까? 하하하!”
“좋은 기회에 누가 되지 않도록 신경을 바짝 세우겠습니다.”
한지호와 원장들이 함께 웃었다.
다른 네 명의 원장들은 한지호 덕분에 K-메디컬 타운에 입주하게 됐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원화 아카데미에 거액을 투자하고, Y대 의대와 미한약품을 끌어들인 것도 한지호의 역량이다.
어찌 보면 네 명의 원장은 예전에 줄을 잘 선 대가로 계속 한지호에게 묻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한지호는 한 번도 네트워크 소속 원장들 앞에서 거만을 떨지 않았다.
한지호 역시 그들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표원장인 한지호는 다른 원장들을 잘 챙기고, 다른 원장들은 한지호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실무적인 영역은 경험 많은 총괄이사 박우식이 챙긴다.
이러니 원화 정의 네트워크가 쌩쌩 잘 돌아가지 않을 리 없었다.
우웅- 우우웅-
그때 한지호의 스마트 폰이 울렸다.
“죄송합니다, 잠시만요.”
한지호는 네트워크의 다른 원장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폰을 꺼냈다.
스마트 폰 액정에는 박우식의 이름이 떠있었다.
서울 원화 한의원의 사무장이자 네트워크 총괄 이사인 박우식은 허튼 일로 전화를 하지 않는다.
한지호는 고민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사무장님, 지금 공사 현장을 둘러보는 중입니다.”
“죄송합니다, 원장님. 그런데 바로 알려드려야 할 연락이 왔습니다.”
“어떤 연락인가요?”
“영국 왕실에서 비공식적 루트로 연락을 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