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93화 (193/255)

# 193

2장, 인연과 인맥 (2)

“시간 진짜 빠르다. 그렇게 덥더니, 어느새 가을이네.”

“그러게요……. 잠깐 가을 지나고 금방 겨울이 되겠죠?”

“겨울부터는 촬영 시작이지?”

“네, 오빠.”

“그럼 정말 바빠지겠다. 드라마는 촬영 들어가면 일주일 내내 밤새는 일도 수두룩하다던데.”

한지호가 자동차 조수석에 앉은 유초아를 보며 말했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공중파 드라마 오디션에 여자 조연 역할로 캐스팅 된 유초아는 크랭크 인을 앞두고 있다.

한지호의 말에 그녀 역시 긴장한 듯 표정이 굳었는데, 그 모습마저 귀여웠다.

“주연이 아니라서 촬영분이 많지는 않겠지만, 최대한 촬영장에 자주 있으려구요. 회사에서도 체력적인 준비를 단단히 해두라고 해서 열심히 운동하고 있어요.”

“내가 보약 지어줄게. 야소녀 멤버들도 내가 지은 약 먹었던 거 알지? 드라마 찍을 때 도움이 될 거야.”

“우와-! 정말요? 오빠 바쁘실 텐데…….”

“약 지을 시간 정도는 충분히 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가 먹을 건데 직접 챙겨야지.”

한지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의 보약은 야소녀 멤버들을 통해 알려지며 한 때 연예계에서 유행을 했었다.

지금도 한지호 표 보약을 찾는 연예인들이 적지 않다.

물론 가격은 예전보다 훨씬 비싸졌지만, 한지호의 명성이 높아진 만큼 그가 직접 지은 특별한 보약을 원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당장 돈이 있다고 해서 바로 구할 수 있는 보약이 아니다.

한지호의 손길이 들어간 보약을 얻기 위해서는 길고 긴 예약 대기를 견뎌내야 한다.

그러나 유초아는 예외다.

그녀에게는 무엇을 해줘도 아깝지 않다.

예전에는 마냥 기특한 여동생 같았다면, 올해부터 묘한 마음이 들고 있었다.

홍콩에서 금링링의 치명적인 유혹을 단번에 거절할 수 있었던 것도 유초아 덕분이다.

계속 외면하고 있지만 한지호도 서서히 자신의 마음을 인정해가는 과정이다.

10살이나 어린, 천사원에서 함께 자랐던 유초아가 여자로 보인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지호는 연예계를 주름잡는 여자 스타들과 여러 번 깊이 얽힌 전례가 있다.

영화배우 김해수와 연애를 하진 않았지만 결코 가벼운 사이가 아니었고, 이지은과는 꽤 오래 만난 다음 서로를 좋아하면서도 가슴 아픈 이별을 택했다.

유초아가 연예계에서 활동을 시작하면 그녀들과 부딪치게 될 것이다.

이미 탑의 자리에 오른 김해수와 이지은은 연예계에 수많은 지인과 관계자들을 두고 있다.

혹시라도 그녀들의 지인과 관계자들이 한지호 때문에 유초아를 안 좋게 볼 수도 있다.

이제 막 커리어를 시작하려는 유초아의 앞날에 한지호라는 너무 유명한 인물의 그림자는 짐이 될지 모른다.

언뜻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한지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신은 원래대로 큰 오빠이자 키다리 아저씨 역할만 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왜 그래요, 지호 오빠? 갑자기 안색이 안 좋아졌어요.”

“아냐. 아무것도. 이제 내려서 좀 걸을까?”

“좋아요!”

차에서 내려 산책을 하자는 말에 유초아가 반색하며 기뻐했다.

한지호는 가평과 청평 사이 그리 유명하지 않은 호숫가로 차를 몰고 왔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유초아가 출연할 드라마가 대박이 나면 모르지만, 지금 한지호는 어느 연예인과 비교해도 인지도에서 밀리지 않는다.

한류 스타로 분류되는 특급 배우나 예능인 정도를 제외하면 한지호보다 유명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연예인이 거의 없을 것이다.

국제적인 지명도를 따져봐도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추위안차오, 금링링, 한류 스타인 런런런 멤버들 덕분에 중국에서도 한지호의 이름은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헨리오 무크의 인터뷰가 헐리우드를 비롯한 세계 영화계에 결정타를 날렸다.

아직 그 열기가 가라앉지 않았기에 서울 시내에서 만나는 건 도박이었다.

특히 유초아는 드라마 데뷔를 앞두고 있다.

한지호의 소개로 들어가게 된 대형 기획사에서도 그녀를 차세대 스타로 키우기 위해 신경을 쓴다는 뜻이다.

만약 한지호와 만나는 모습이 목격되면 당장 구설수에 오를 것이다.

데뷔하기 전부터 남자와 관련된 문제로 이슈가 돼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

한지호는 매사 예민한 연예인들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자신이 그 입장이 되어 보니 무척 피곤하기 때문이다.

“여기 너무 예뻐요, 지호 오빠.”

“그래?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고 하던데 진짜 숨은 명소네.”

유초아는 한지호의 유명세 덕에 경치 좋은 가평의 호숫가로 나와 산책을 하는 게 마냥 좋은 것 같았다.

그녀도 드라마 촬영 준비로 하드 트레이닝을 받으며 많이 지쳐 있었다.

이렇게 한적한 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게 얼마만인지 가늠하기 힘들다.

한지호는 어린 아이처럼 기뻐하는 유초아의 얼굴을 마냥 흐뭇하게 바라보지 못했다.

스무살, 대학생이 되자마자 연예계라는 복마전에 뛰어든 그녀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유초아 스스로 선택한 꿈이고, 한지호가 길을 열어줬지만 계속 신경이 쓰였다.

“초아야, 드라마 촬영이나 연예계 생활이 너무 힘들면 언제든 말해. 그 길 아니고도 세상에는 재밌는 일이 많으니까. 내가 끝까지 도와줄게.”

짧은 말에 담긴 한지호의 진심이 전해진 것일까.

유초아가 한지호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녀의 하얀 얼굴이 한지호의 눈동자를 가득 채웠다.

고즈넉한 호숫가의 배경도 보이지 않았다.

곧이어 그녀가 작고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오빠가 걱정해주는 거 다 알고 있어요. 제가 선택한 길이니까…… 스스로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볼게요.”

“그래, 그런 각오면 됐다.”

한지호는 옅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초아는 아이가 아니다. 어엿한 성인이다.

길은 한지호가 터줬지만, 계속해서 펼쳐질 험로를 자기 힘으로 걸어가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실제로 그녀는 기획사를 소개 받은 이후 한지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대형 기획사에 오디션을 보게 해준 것도 한지호가 먼저 나서서 알아봐준 것이다.

유초아는 인맥을 억지로 만들려고 애쓴 적이 없었다.

그저 주어진 인연이 그녀에게 기회를 선사했고, 자기 손으로 기회를 꽉 부여잡은 게 전부다.

작은 깨달음을 얻은 한지호는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여기 근처에 닭도리탕이랑 도토리 묵 엄청 잘하는 곳이 있다는데, 좀 더 걷고 그쪽으로 가보자.”

“사람들 많을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요?”

“괜찮아. 미리 전화해서 방을 예약해 놓으면 되니까.”

“완전 맛있을 거 같아요.”

“그나저나 초아 너까지 유명해지면 우린 진짜 조심해야겠다.”

“그렇긴 하겠죠?”

“뭐, 골치 아픈 문제는 일단 드라마가 대박 난 다음 생각하자.”

한지호와 유초아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둘 다 남부럽지 않게 바쁜 일정을 쪼개서 여유를 만끽하러 왔다.

아직 말은 안 하지만, 그저 가족 같은 사이라면 매번 틈을 내서 둘만의 시간을 가질 리는 없다.

다만 너무 소중한 인연이기에 함부로 깨트릴 수 없어서 극도로 조심하는 것 같았다.

“좋다.”

한지호는 호수에 담긴 물 위로 잔잔한 파문이 번지는 걸 지켜봤다.

그의 곁에서 유초아가 걸음걸이를 맞추며 웃고 있었다.

별 것 아닌 산책도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또 한 페이지의 추억이 쌓이며 시간이 가을을 관통하고 있었다.

+++

나뭇잎의 색깔도 달라지고 있었다.

여름까지 푸름을 뽐내던 잎사귀가 저마다 빨강, 노랑 등 다채로운 색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가을은 점점 깊어가고, 한지호의 행보도 한층 무르익어갔다.

정부는 김포 한강 신도시에 K-메디컬 타운 건설을 위한 첫 삽을 떴다.

이미 200억 원의 실탄을 장전해놓은 한지호는 정부와 연계해서 원대한 계획을 완성시켰다.

K-메디컬 타운 내부에 원화 한의원과 원화 아카데미를 동시에 건립하겠다는 계획을 정부 측에서도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정부 국책 사업에 자발적으로 거액을 투자해서 의료 연구 기관을 짓겠다는데 마다 할 이유가 없다.

원래 정부는 투자 유치를 못 해서 안달인 곳이다.

한국과 아시아를 넘어 국제적인 명성을 쌓은 한지호가 직접 의료 R&D 분야에 투자한다는 소식은 K-메디컬 타운 전체의 성공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더군다나 원화 아카데미는 단순한 한방 의료 연구기관이 아니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한의학과 현대 의학을 접목시켜 연구하는 기관이 될 전망이었다.

한지호는 자신의 꿈, 한의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후대에 전하겠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녔다.

서울과 홍콩을 오가며 환자들을 진료하고, 남은 시간에는 방문 진료를 원하는 VVIP들을 돌본다.

그리고 또 시간을 쪼개서 중요한 미팅을 거듭했다.

그야말로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지만, 힘들지만은 않았다.

역사에 이름과 의술을 남길 수 있다는 확신이 점점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는 중요한 사람들을 만나러 왔다.

헨리오 무크의 인터뷰가 알려진 이후 정계와 재계의 거물들이 한지호를 만나길 원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하지만 그는 거물이 부른다고 쪼르르 달려가진 않았다.

자신도 누구 못지않은 거물의 대열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늦은 시각 한지호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정말 중요한 사람들이 모였다는 뜻이다.

“한 원장, 어서 오게.”

벌떡 일어나 한지호를 맞이한 사람은 Y대 암센터 센터장 최규열이었다.

대한민국 의료계에서 손꼽히는 위치에 오른 최규열이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원래 최규열은 감정 표현을 격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한지호를 반기는 것은 진심이었다.

Y대 암센터가 한지호와 함께 김금순 환자의 췌장암을 치료하며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최규열의 입지도 더욱 탄탄해졌다.

한지호가 예뻐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조금 늦었습니다, 센터장님.”

“아닐세, 서울 시내 길이 막히는 잘못이지. 먼저 소개부터 해드리겠네.”

가볍게 악수를 나눈 최규열이 앉아있는 사람을 돌아봤다.

한지호도 호흡을 다스리며 낯선 얼굴을 체크했다.

사실 그가 누구인지는 미리 들어서 알고 있었다.

최규열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한 사람도 흥미로운 눈길로 한지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한 원장도 자주 들어봤겠지. 미한약품의 신영준 회장님이시네.”

“처음 뵙겠습니다,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대표원장인 한지호라고 합니다.”

한지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는 자신을 원화 한의원이 아니라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대표원장이라고 소개했다.

K-메디컬 타운은 네트워크 차원에서 준비한 사업이다.

그렇기에 관련 인물을 만날 때는 정확하게 소개를 하며 네트워크를 부각시키고 있었다.

인사를 받은 신영준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한 원장. 말은 정말 많이 들었는데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었지 말입니다. 이렇게 보게 되어 영광입니다.”

“앞으로 많이 배우겠습니다.”

신영준 회장의 말투는 상당히 독특했다.

한지호는 그의 특별한 이력을 알고 있어 놀라지 않았다.

신 회장은 장성 출신이다.

육군에서 소장으로 전역을 했다.

무려 투 스타, 한국군의 최고 수뇌부였던 것이다.

장성이 전역해서 약품회사의 회장이 된 것도 놀랍지만, 그는 탁월한 추진력으로 신약 개발에 성공해서 미한약품의 주가를 8배나 올렸다.

영화 속에서 나올 법한 입지전적 인물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지호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존경을 표했다.

신영준 회장도 자신처럼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일에 목숨 걸고 도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이니 참 좋습니다.”

“일단 앉아서들 이야기 하십시다.”

최규열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고, 신영준도 흡족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두 명의 장년인과 한 명의 청년이 모였지만, 이들은 마음만 먹으면 의료계에 폭풍을 일으킬 수 있다.

신기술의 첨단에 서있는 Y대 암센터장, 신약 개발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주식 시장에서 갑부가 된 미한약품 회장, 그리고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한의사이자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대표원장.

현대의학과 한의학에 약품의 강자까지 완벽한 삼각형을 이룬 셈이다.

이렇게 셋이 모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료계의 대형 뉴스가 되기 충분했다.

이만하면 인맥이 아니라 인연이다.

한지호는 최규열과 신영준을 번갈아 쳐다보며 남몰래 한 쪽 주먹을 꽉 쥐었다.

이 멤버가 모이면 못 할 일이 없다.

한국 의료계를 넘어 세계 의료사를 다시 쓰는 것도 가능하다.

꿈만 같은 이야기가 현실로 빚어지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