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92화 (192/255)

# 192

2장, 인연과 인맥 (1)

째각, 째각-

아날로그 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적막을 깨트리고 있었다.

웬만한 가정집 전체 크기와 맞먹는 넓이의 스위트 룸 거실.

그곳에서 한지호와 헨리오 무크는 조용히 뭔가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한지호는 헨리오의 손목을 잡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진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맥을 잡힌 헨리오는 숨소리도 방해가 될까봐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한지호가 홍콩에 머무를 때는 매일 스위트 룸에 들러서 진맥을 한다.

그러나 오늘은 평소와 분위기가 달랐다.

눈을 감은 한지호는 다른 게 없지만, 진맥을 받는 헨리오가 유달리 긴장한 것 같았다.

처억.

곧이어 한지호가 헨리오의 손목을 내려 놓았다.

헨리오는 기다리지 못하고 바로 입을 열었다.

“어때요? 어떻지요?”

“그게 말입니다.”

한지호가 살짝 뜸을 들였다.

그는 초조해하는 헨리오의 얼굴을 바라보다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더 시간을 끌었다간 헨리오에게 고혈압 증세가 나타날 것 같았다.

“맥이 아주 좋습니다. 주의 사항만 잘 지킨다면 건강한 성 생활에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 그 말은…….”

“주치의로서 이만하면 조건부 완치 판정을 내려도 된다고 판단합니다.”

“완치! 완치!”

헨리오가 그답지 않게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소리를 질렀다.

몇 년을 묵혀온 환호성이다.

한지호는 대머리의 노신사가 기뻐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봤다.

“다시 남자의 삶을 살 수 있다니, 닥터 한! 이 은혜를 대체 어떻게 갚아야 할지요?”

“명심하세요. 음주와 흡연, 과로와 수면 부족은 시한 폭탄입니다. 앞으로도 생활 습관을 철저하게 유지하며 꾸준히 한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그럼요! 물론이지요. 닥터 한이 시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된지 오래요. 남자로서 살 수 있게 됐는데 다른 게 대수겠어요?”

헨리오는 기쁨을 숨기지 않고 날 것 그대로 드러냈다.

남자의 삶을 회복했다는 것이 그에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한지호도 완벽하게 공감은 할 수 없지만 어렴풋이 이해가 됐다.

최치우, 문재영 등 주위의 지인들이 남자의 생명을 잃으면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이라고까지 표현했다.

헨리오는 목숨보다 귀한 남자의 생명을 되찾았으니 어린 아이처럼 환호하는 게 당연할 것이다.

노인이라고 해서 성욕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절박한 문제일 수 있다.

특히 서양처럼 개방적인 사회에서 노인의 성은 매우 중요한 사회 이슈이기도 하다.

한동안 기쁨을 토해내던 헨리오가 두 팔을 뻗어 한지호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닥터 한, 내가 무엇을 해줄까요? 지난주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내 분신이 반응하는 것을 느꼈고, 그때부터 닥터 한에게는 뭐든 더 해주고 싶었어요.”

“이미 충분한 치료비를 받았습니다.”

한지호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는 치료를 시작하며 10만 달러를 받았다.

선수금 개념이었지만, 그 자체로도 엄청난 고액이다.

아무리 VIP들이 서울과 홍콩의 원화 한의원을 많이 찾아도 한 번에 1억 원 이상을 지불하는 환자는 흔치 않다.

그러나 헨리오는 선수금 10만 달러로 입을 닦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에게 있어 10만 달러는 그리 큰 돈이 아니다.

헐리우드 스타들은 전용기를 타고 다닐 만큼 어마어마한 자산을 자랑한다.

헨리오 무크는 헐리우드 스타는 아니지만 비버리힐즈의 누구 못지않은 재산과 명성을 가졌다.

“내가 부끄럽지 않게 고마움의 표시를 더 할게요. 닥터 한은 나의 남은 삶이 다시 행복해질 수 있도록 만들어준 사람이요.”

“그 정도입니까? 진심으로 뿌듯합니다.”

“당연히 그 정도이지요! 닥터 한도 나이가 들어보면 알게 되겠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만은 않아요. 할 수 있을 때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즐기며 살아가도록 해요.”

그냥 하는 말 같지 않았다.

인생의 경험이 묻어난 의미심장한 조언이었다.

한지호도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인생에서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

남성의 성 기능도 당연히 주어지는 게 아니다.

몸의 변화로 성 기능을 잃으면 순식간에 남자로서 자존심이 오그라들며 삶이 피폐해질 수 있다.

건강도, 부와 명예도 언제 어떻게 잃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인생을 사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즉 현재를 온전히 즐기는 것이다.

남자로서의 모든 것을 잃었다가 다시 찾은 헨리오의 조언에는 생명력이 있었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즐기는 것. 명심하겠습니다.”

한지호는 환자를 치료할 때마다 인생의 교훈을 하나씩 얻게 되는 기분이었다.

홍콩에서 헨리오를 치료하면서도 느낀 바가 적지 않다.

그는 한의사로서도, 청춘으로서도 여전히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

한지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공은 커졌고, 입술은 굳게 닫힌 상태였다.

어지간해선 놀라지 않는 그가 이런 표정을 짓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하지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요즘 사람들처럼 스마트 폰으로 계좌 관리를 한다.

한의원 계좌는 사무장 박우식과 함께 공적으로 처리하지만, 개인 계좌는 직접 관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기 계좌에서 입금이나 출금이 되면 스마트 폰 메시지로 알림이 온다.

방금 전에도 알림을 확인하고 쉬는 시간에 폰을 꺼냈다.

“90만 달러? 10억 3815만 원……?”

어이가 없었다.

90만 달러라는 거금이 계좌에 입금 된 것이다.

보낸 사람 이름을 굳이 확인 할 필요도 없었다.

헨리오 무크.

치료를 마치고 홍콩에서 미국으로 돌아간 그가 거액을 보낸 것이다.

그는 이미 10만 달러를 냈지만, 완치가 된 이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고마움을 표시하겠다고 말했다.

90만 달러, 우리 돈으로 10억 원 가량이 그의 대답이었다.

세계적인 영화 음악의 거장이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 만큼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100만 달러를 딱 맞춰준 셈이었다.

확실히 스케일이 달랐다.

이게 말로만 듣던 헐리우드 스타일인지 모른다.

이만한 액수의 외화를 송금하려면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할 것이다.

어쨌거나 헨리오는 화끈하게 보답을 했다.

남성성을 잃고 무기력증에 빠져 비실거리던 노인은 이제 온데간데 없다.

“이렇게 최고 기록을 세울 줄은 몰랐는데……. 진짜 남자네, 헨리오.”

한지호는 정신을 차리며 헨리오의 남자다움을 인정했다.

한 사람의 환자에게 받은 치료비로는 역대 최고 기록을 세웠다.

100만 달러를 치료비로 받는 의사가 전세계에 몇 명이나 될까.

VVIP의 암 수술을 집도해도 의사 한 명이 이만한 보상을 받긴 힘들 것 같았다.

한지호는 헨리오 무크에게 새 인생을 찾아주며 아시아를 넘어 세계 레벨로 점프했다.

100만 달러의 치료비는 한지호의 달라진 레벨을 증명하는 숫자였다.

단순히 돈을 많이 벌어서 기분이 좋은 게 아니었다.

10억 원은 큰돈이지만, 한지호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벌 수 있는 액수다.

그러나 환자에게 신뢰와 인정을 받고 진심에서 우러나온 보답을 받는다는 느낌 때문에 기분이 더 좋은 것이다.

“고맙습니다, 헨리오. 보내준 90만 달러는 소중하게 쓸게요.”

한지호는 지금쯤 미국의 비버리힐즈에 있을 헨리오 무크에게 감사 인사를 읊조렸다.

그는 곧 청담동의 고급 빌라로 이주 할 예정이었다.

짧게나마 인연을 나눴던 영화배우 김해수가 살았던 바로 그 동네다.

신사동 오피스텔 아파트와 달리 청담동 고급 빌라는 매매를 해버렸다.

한지호가 입주 할 청담동 빌라는 매매가 40억 원에 달하는 고급 주거지다.

그는 현금으로 구매를 했고, 이 정도 지출은 감당할 능력이 충분하다.

하지만 헨리오가 추가로 보내준 90만 달러는 든든한 보탬이 될 것이다.

“원장님, 원장님!”

그때였다.

한지호가 90만 달러라는 예기치 못한 보답에 감동하고 있는 찰나, 간호사의 목소리가 울렸다.

개원 초기부터 호흡을 맞춰온 조민주 간호사가 노크를 한 것이다.

간호사실에서 웬만한 일은 한의원 내선 인터폰으로 전달한다.

이렇게 노크를 할 정도면 꽤 급한 일이라는 뜻이다.

“들어와요, 조 간호사님.”

한지호는 의아한 표정으로 조민주를 맞이했다.

수석 간호사인 조민주의 얼굴이 상기 돼 있었다.

불과 몇 분 전에 봤을 때와 다르게 살짝 붉어진 안색이 눈에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원장님.”

“무슨 일 있어요? 다음 환자 진료는 시간이 좀 남았는데. 그런 일로 조 간호사님이 이렇게 급해질 것 같진 않고.”

“외신 속보가 떠서요. 저도 모르게…… 빨리 원장님께 보여드리고 싶어서요.”

그제야 민망함을 느꼈는지 조민주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수석 간호사라고 하지만 아직 30대 중반이다.

얼굴을 붉히자 그녀가 유독 앳되어 보였다.

“외신 속보라면 어떤 속보입니까?”

“속보가 뜨자마자 국내 포털 사이트에서 번역이 되어 인기 기사 1위가 됐어요. 원장님께서 홍콩에서 치료하신 헨리오 무크의 LA 타임즈 인터뷰 기사예요.”

“헨리오가 LA 타임즈와 인터뷰를 한 기사가 국내에서 1위를 했다고요?”

“네, 원장님 이야기가 자세히 나와 있어서요. 여길 보세요.”

조민주는 태블릿 PC를 팔에 끼고 있었다.

그녀가 내민 태블릿 화면에는 헨리오 무크의 인터뷰 기사가 떠있었다.

한지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기사를 읽었다.

“지병으로 몇 년 간 영화계를 떠나있던 거장 헨리오 무크가 돌아왔다. 그는 홍콩에서 한국의 유명한 전통 의사인 닥터 한에게 치료를 받았고, 오랫동안 그를 괴롭힌 지병에서부터 벗어났다. 이를 계기로 삶에 의욕을 되찾아 영화 음악 감독으로서 복귀를 선언한 것이다. 헨리오는 한 번 뿐인 인생을 다시 즐겁게 살 수 있는 힘을 얻었다면서 홍콩에서의 경험을 털어놓았다. 그가 어떤 지병을 앓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국인 의사가 전세계의 영화 팬들에게 거장의 음악을 돌려준 셈이다. 한편, 헐리우드 영화 제작사인 마블은 어벤져스 4의 음악 감독을 헨리오 무크가 맡을 것이라고 발표해 팬들을 흥분시켰다.”

“맞아요, 그 부분 때문에 난리가 났어요!”

한지호는 자신이 언급된 기사 내용을 읽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헐리우드 스타들은 프라이버시에 굉장히 민감하다.

헨리오 역시 헐리우드의 거물이기 때문에 자신의 치부라 할 수 있는 투병에 대해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다.

물론 성 기능 장애라는 내용은 알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인터뷰를 보면 거의 모든 부분을 오픈한 셈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헨리오 무크가 몇 년만에 헐리우드로 복귀하며 가진 인터뷰다.

말 그대로 전세계인이 주목하는 인터뷰에서 한지호가 중요하게 언급 됐다.

인터뷰를 본 세계인들은 대체 닥터 한이 누구야, 라고 궁금해 할 게 분명했다.

헨리오 무크의 지병을 치료하고, 그로 하여금 다시 헐리우드에서 영화 음악 감독으로 컴백하게 만든 한국인 전통 의사.

닥터 한이라는 이름은 수많은 영화 팬들과 유명인들 사이에 선명하게 각인 됐을 것이다.

90만 달러, 합해서 100만 달러의 치료비는 어떻게 보면 약과였다.

복귀를 알리는 인터뷰에서 한지호를 소개해준 것은 돈으로 값을 따지기 힘들다.

닥터 한, 한지호가 누릴 홍보 효과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대중적인 파급력으로 따지면 금링링이나 추위안차오를 치료했을 때를 뛰어 넘는다.

헨리오 무크는 역대 최고의 치료비를 준 걸로도 모자라 역대 최고의 홍보 효과를 안겨줬다.

한지호가 조바심을 내지 않아도 한의학으로 월드 투어를 다니는 꿈이 금방 이뤄질 것 같았다.

기회는 언제나 예상보다 빨리 찾아온다.

그 기회를 온전히 잡느냐는 자기 자신에게 달린 문제다.

이제껏 한지호는 다가온 기회를 놓친 적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기회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한지호가 모두의 만류를 뿌리치고 홍콩에 한의원을 여는 도전을 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추위안차오와 금링링을 치료 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헨리오를 소개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기회의 씨앗은 도전이다.

한지호는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도전하며 계속 씨앗을 뿌렸고, 예기치 못한 타이밍에 훌쩍 자란 기회를 꽉 움켜쥐는데 성공했다.

그는 이 성공에도 안주하지 않고, 또 다시 다른 도전을 하며 씨앗을 뿌릴 것이다.

한지호는 다시 한 번 헨리오의 인터뷰 기사를 읽으며 미소를 지었다.

현대의 의성(醫聖)이 활약할 수 있는 무대가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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