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
1장, 인간의 본능 (2)
황만금의 눈이 예리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그는 그저 그런 뒷방 늙은이가 아니다.
아직도 천억 대 이상의 자산을 운용하고 있는 서슬 퍼런 현역 선수다.
정확히 알려지진 않았지만, 황만금이 굴리는 현금과 주식의 규모가 최소 2000억 원은 넘는다고 한다.
어설픈 사탕발림이나 실속 없이 화려하기만한 궤변은 황만금에게 통하지 않는다.
한지호는 처음부터 잔머리를 굴릴 생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계획한 바를 숨기지 않고 풀어 놓았다.
“K-메디컬 타운에 트레이닝 센터를 열려고 합니다.”
“트레이닝 센터라?”
“우선 원화 아카데미라는 이름을 지어두긴 했습니다.”
“흐음…. 허나 K-메디컬 타운은 외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의료 특구이지 않나?”
“맞습니다. 하지만 정부에서 원하는 요건을 채워주면 나머지 공간을 임의로 사용해도 됩니다. 원화 아카데미의 경우 정부 관계자의 반응도 아주 좋습니다.”
“이제 깊이 들어가 보지. 트레이닝 센터건 아카데미건, 결국 무언가를 가르친다는 이야기인데. 대체 누구에게 무엇을 가르치겠다는 겐가? 한의대학을 따로 세운다는 말은 아닐 테고.”
“한의대를 졸업한 한의사들에게 더 깊이 있는 의술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뿐만 아니라 Y대 암센터와도 협력해서 현대 의학과 한의학이 교류하는 한국 최초의 연구 공간으로 키워볼 생각입니다.”
“미국 텍사스 의대나 존스홉킨스 의대, MD 엔더슨 암센터 등과 비슷한 곳을 자네가 만들겠다는 말이지?”
“네, 회장님. 무엇보다 한의학적 지식과 노하우가 제대로 전승되지 못하고 사라지는 현실이 너무 아쉽습니다.”
“전승이라, 전승.”
“시간이 지날수록 체계적으로 발전하는 현대 의학과 달리 한의학은 명맥이 많이 끊겼습니다. 뛰어난 한의사가 나타나 의술을 발전시켜도 그때뿐입니다. 이대로는 수십 년, 수백 년이 지나도 한의학의 위상이 나아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전통의학의 역사를 정립하고, 체계적인 의학으로 발돋움시키겠다는 아주 원대한 야망이로구만.”
황만금이 정확히 맥을 짚었다.
확실히 세상의 온갖 뉴스를 꼼꼼히 읽는 사람다웠다.
항상 한의학과 중의학 등 동양의 전통의학은 체계적이지 않다는 비판에 시달려 왔다.
사실 그런 비판에도 일리가 있었다.
한의학은 현대 의학과 달리 체계적으로 이론을 가다듬고 다양한 치료 결과를 기록으로 남겨 놓는 일에 소홀했었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삼국시대 화타와 규호의 의술을 계승한 장본인이기에 전통의학의 약점을 뼈아프게 체감했다.
만약 화타의 의술이 기록으로 남아있었다면 현대에도 한의학과 중의학의 위상은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현대인이 오금희를 익힐 순 없겠지만, 그래도 기록이 있었다면 한의학은 훨씬 더 발전했을 게 분명하다.
한지호는 전생을 깨달으며 얻은 행운을 자신 혼자 누리고 싶지 않았다.
후대에도 더 많은 사람들이 한의학의 혜택을 받으며 병마로부터 자유로워지길 바랐다.
어쩌면 이것이 규호의 유지를 이어받고 자자손손 천하를 바꾸는 일인지 모른다.
“제가 죽으면 저의 의술도 묻히게 됩니다. 곁에서 보고 배운 문재영 부원장이나 바이룽 부원장 정도에게만 일부분이 계승되겠죠. 하지만 아카데미를 세우고, 체계적으로 연구와 실험을 하면서 현대 의학과도 힘을 합치면… 10년, 20년 뒤 한의학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 도달할 겁니다.”
전율이 느껴졌다.
말을 하는 한지호도, 그의 포부를 듣는 황만금도 전율을 느꼈다.
단순히 돈을 얼마 더 벌고 말고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의학의 역사적 가치를 바꾸고, 나아가 인류를 진보시키려는 계획이다.
그러나 황만금은 빨리 냉정을 되찾았다.
적은 돈도 아니고 무려 100억 원을 투자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해득실을 따져볼 수밖에 없었다.
“다 좋네만…… 200억 원을 투자한 그 아카데미로 어떻게 수익을 창출할 계획인가? 서울과 홍콩의 원화 한의원, 명징 약초, 그리고 K-메디컬 타운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벌어들이는 돈이 엄청나겠지. 허나 그 수익으로 마냥 아카데미를 떠받칠 수 있겠나?”
“200억 원을 투자해서 2000억, 그리고 2조까지 바라보게 될 지도 모릅니다. 절대 자선 사업을 하려고 원화 아카데미를 만드려는 게 아닙니다, 회장님.”
한지호의 말에 힘이 실려 있었다.
남들 몰래 오랫동안 고민하고 또 고민한 결과 자신만의 답을 찾은 것 같았다.
황만금은 흥미진진하다는 눈빛으로 한지호를 쳐다봤다.
그는 직업이 투자인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고만고만한 투자처에 질려있기도 하다.
한지호는 황만금에게 매너리즘을 벗어나 새로운 자극을 주는 존재였다.
이번에도 한지호는 황만금의 기대를 훌쩍 뛰어넘었다.
패기 넘치지만 현실성도 염두에 둔 한지호의 설명이 깐깐한 큰손 황만금을 사로잡고 있었다.
“얼마 전 우리나라의 H약품이 신약 개발에 성공해서 미국으로부터 8조 원의 로열티를 받았다는 뉴스, 회장님께서도 보셨을 겁니다. H약품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계적으로 신약 개발은 황금 알을 낳는 거위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H약품처럼 원화 아카데미에서도 적극적으로 신약을 개발하겠다는 말이지?”
“체계적인 임상 실험 과정을 거친 한약을 비롯해서 상품으로 개발할 수 있는 연구 과제는 무궁무진합니다. 처음에는 자율적인 운영을 위해 제 100억과 회장님의 100억을 투자하지만, 나중에는 글로벌 제약회사들이 앞 다퉈 돈을 싸들고 찾아올 거라고 확신합니다.”
“자네는 정말… 재밌는 친구야. 아니, 이제는 무서운 친구가 되었구만.”
“그렇습니까?”
“여기에 100억을 투자하면 마치 불로초를 찾으라고 서불에게 억만금을 쥐어준 진시황이 되는 기분이겠네.”
“불로초는 없고, 서불과 진시황은 모두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의학의 발전이라는 목표를 이뤄낼 수 있습니다. 함께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죠.”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거 참, 돈이 안 되어도 끌리는 이야기일세.”
“회장님, 인간에게는 여러 본능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본능과 유구한 역사에 자기 이름을 남기고 싶은 본능은 가장 꼭대기에 있을 겁니다.”
“자네 말이 맞네. 인간의 본능을 두 가지나 자극하는 일이니 성공을 확신하는 것도 이해가 되는군, 그래.”
“함께 하시겠습니까?”
“까짓 것, 100억이 대수겠는가? 어디 한 번 같이 가보지. 자네 등에 업혀 이 늙은 몸이 쇠하기 전에 역사에 이름을 새겨보세.”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한지호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황만금이라면 분명히 원화 아카데미의 뜻을 이해하고 힘을 보태줄 거라 생각했다.
이로서 그는 200억 원의 초기 자금을 모았다.
자기 돈 100억을 내기 위해 한창 잘 나가고 있는 블랙문 카지노에서 투자금을 빼냈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어차피 카지노에 투자했던 건 지금 같은 순간을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돈을 버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큰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이지만, 역사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흔치 않다.
한지호는 천하를 좌우할 수 있는 인물이 되라던 규호의 절규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개인으로는 월드 투어를 다닐 만큼 세계적인 유명 한의사가 되는 것, 그리고 단체의 수장으로는 동양의 전통 의학을 연구하고 발전시켜 후대에 물려주는 것.
이것이 그가 의술로 천하를 흔들며 역사에 이름을 남길 방법이다.
“몇 달 만에 10억을 갚았으니 100억은 얼마나 빨리 갚는지 두고 보겠네.”
황만금이 결심을 굳힌 듯 농담을 던지며 손을 내밀었다.
한지호는 거부(巨富)의 주름진 속을 꽉 잡으며 시원하게 대답했다.
“항상 힘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전에 자네가 태자병을 고쳐주지 않았다면 지금 난 한 줌 흙이 됐을 걸세. 덤으로 사는 인생, 재미난 도전까지 할 수 있으니 더 바랄게 무어겠나.”
한지호와 황만금.
세대도, 출신도, 사는 세계도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은 서로를 좋은 친구처럼 여겼다.
그렇게 한지호는 꿈을 향해 또 한 걸음을 성큼 내딛었다.
그의 보폭이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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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호는 황만금을 만나 건강한 수명 연장과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픈 인간의 본능을 설파했다.
현금 100억 원을 투자하겠다는 양해 각서를 받은 그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투자를 받는 것만큼 중요한 미션이 한지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홍콩에서 또 다른 인간의 본능을 회복시켜야 한다.
본능에 호응하지 않는 신체 때문에 힘들어하는 영화 음악의 거장 헨리오 무크.
몇 번의 부작용을 넘긴 그가 결승선에 다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지호가 홍콩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그는 해가 뜨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헨리오.”
일찍 일어나 운기조식을 마친 한지호는 살짝 긴장한 상태에서 헨리오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종종 부작용으로 이상 증상을 보여 왔었다.
연이은 구토나 발작, 급성 빈혈 등 증상은 무척 다양하고 까다로웠다.
이번에도 그런 경우라면 아침부터 부랴부랴 리츠 칼튼으로 이동해야 할지도 모른다.
폰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전화기 너머 헨리오의 목소리는 밝았다.
위급한 상황에서 SOS를 요청하는 음성이 아니었다.
평소와는 달리 아주 고양 된 하이 톤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닥터 한! 닥터 한! 닥터 한!”
“네, 한 번만 불러도 됩니다. 아침부터 무슨 일 입니까?”
“아, 미안해요. 내가 너무 흥분했지요. 그런데 이게 정말 몇 년 만인지…….”
헨리오의 말이 심상치 않게 들렸다.
한지호도 눈을 크게 뜨고 통화에 집중했다.
“혹시 돌아온 겁니까?”
“자고 일어났는데 반응이 있어요.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지요?”
“물론!”
한지호가 아주 강한 엑센트로 Ofcourse! 라고 외쳤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아랫도리가 묵직해져있는 건 건강한 남자의 특권이다.
지난 몇 년을 성 기능 장애로 고생했던 헨리오에게 드디어 아침의 기적이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마냥 기뻐하긴 아직 일렀다.
한지호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헨리오를 타일렀다.
“좋은 징조입니다. 우리의 치료가 확실히 먹히고 있다는 뜻이군요. 그렇지만 이럴 때 더 조심해야 합니다.”
“조심이라니요? 이제 회복된 게 아닌가요?”
“몇 년이나 제기능을 못 했던 신체 부위가 하루 아침에 정상으로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이 때 방심해서 과음을 하거나 한약 치료를 중단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고마워요, 닥터 한. 하마터면 너무 흥분해서 일을 그르칠 뻔 했으니.”
“이건 주치의로서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성 접촉도 당분간 자제하는 게 좋습니다.”
민망한 말이지만 의사와 환자 사이에는 가릴 게 없어야 한다.
게다가 헨리오를 괴롭히는 근본적인 원인은 심신불교로 인한 성 기능 장애다.
한지호가 민감한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그건 또 무슨 뜻이요?”
헨리오의 목소리가 이전과 조금 달라졌다.
당황한 기색과 불편한 기분이 말투에 묻어 나왔다.
그러나 한지호는 개의치 않고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조리있게 설명했다.
“아직 기능이 완전히 회복된 상태가 아닐 겁니다. 그런데 성 접촉을 시도하다가 실패하게 되면 심리적 타격이 크겠죠. 심리적 낙인 효과는 앞으로의 치료에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좋은 징후에 기뻐하면서도 마음을 차분히 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케이, 완벽히 이해했어요.”
헨리오는 한지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아차렸다.
일찍 샴페인을 터트렸다가 자칫 공든 탑을 무너트릴 수도 있다.
한지호와 헨리오 모두 그런 일은 절대 원하지 않았다.
“어쨌든 축하합니다. 계속해서 더 좋은 징후들이 나타날 겁니다. 고지가 멀지 않았으니 같이 힘을 냅시다, 헨리오.”
“난 무조건 닥터 한이 시키는 대로만 하겠어요. 이제껏 어떤 의사도 오늘 같은 일을 가능하게 한 적이 없으니까요.”
헨리오는 한지호를 120% 신뢰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그가 느꼈을 환희는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수 년 가까이 반응하지 않던 남자의 상징에 힘이 실린 기분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한지호는 헨리오의 잃어버린 본능을 잘 찾아주고 있다는 사실에 속으로 기뻐했다.
완치 전까지 공개적으로 기쁜 감정을 표출할 순 없지만, 기분 좋은 소식에 심장이 쿵쾅거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헐리우드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헨리오를 완치시키면 한지호의 명성은 다른 차원으로 도약할 것이다.
이제는 동양이 아니라 서양에서도 유명해질지 모른다.
그야말로 지구적인, 세계적인 한의사가 되는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