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88화 (188/255)

# 188

10장, 남자 (1)

“원장님,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 것 같으세요.”

문재영 부원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전에 진료를 받은 환자의 상태가 좋지 않아 점심 시간이 늦어졌고, 그래서 한지호와 문재영이 따로 밥을 먹게 됐다.

그 소식을 들은 명징 약초 최치우도 3층에서 내려와 합류했다.

역삼동 M 타워 부근에서 설렁탕을 먹은 세 사람은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시간이 조금 남아서 아직 여유가 있었다.

“고민…… 아닙니다.”

한지호는 문재영의 질문을 받고 고개를 저었다.

사실 고민이 있었다.

그렇기에 설렁탕을 먹을 때도 말수가 거의 없었다.

눈치가 빠른 편이 아닌 문재영이 알아차릴 정도로 평소와는 달라 보였다.

커피를 후다닥 마시고 3층의 명징 약초로 올라가려던 최치우도 한지호를 유심히 쳐다봤다.

역삼동 원화 한의원과 합병한 이후 제 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최치우의 걸걸한 목소리가 울렸다.

“문 부원장 말대로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는구만. 터놓기 어려운 문제인가? 그럼 더 묻지 않겠네.”

문재영에 이어 최치우까지 관심을 보이니 한지호도 계속 입을 닫기 어려웠다.

사실 꼭 지켜야 할 비밀 같은 건 아니었다.

그는 지난 주 홍콩에서 헐리우드를 대표하는 음악 감독 헨리오 무크를 만났다.

결과적으로 헨리오의 성 기능 장애와 여러 부작용을 치료하는 주치의가 됐다.

헨리오는 당분간 홍콩에 머물 예정이고, 한지호는 며칠 뒤부터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

그로인한 고민이 표정에 묻어나왔던 것이다.

“그게 사실은….”

한지호는 맞은편에 앉은 문재영과 최치우를 바라봤다.

최치우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빈털터리 시절부터 함께 해온 사람이다.

문재영은 서울 원화 한의원을 든든하게 지탱해주는 기둥이다.

생각해 보니 이들에게 털어놓지 못할 고민은 그리 많지 않다.

환자의 프라이버시를 오픈하지 않는다면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남자라는 동물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남자?”

“네, 남자. 무엇이 남자를 살게하는가. 남자만의 독특한 자존심과 약점 등.”

“크흐음…. 무슨 이야기인 줄 알겠네만, 왜 갑자기 그런 고민을 하는 겐가?”

최치우가 흥미를 보였다.

문재영도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한지호를 쳐다봤다.

남자(男子).

언제 어느 때에 들어도 재미있는 주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지호가 남자에 대해 고민하다니, 더욱 특별한 이야기가 숨어있을 것 같았다.

한지호는 번갈아 둘을 바라보며 말을 시작했다.

“남자에게 있어 남성성은 어쩌면 목숨보다 중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성기능을 잃으면, 속된 말로 고자가 되면 그 스트레스를 감당할 수 있을까요?”

“인터넷에 유행하는 짤방이 있습니다, 원장님. 내가 고자라니! 라는 짤방인데요…….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 고자가 되는 걸 죽은 것보다 못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문재영이 목소리를 낮추며 대답했다.

한지호도 그가 말한 짤방을 본 적이 있었다.

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남자가 의사로부터 성 기능을 상실했다는 말을 듣고 괴로워하며 절규하는 사진이다.

그 사진이 인터넷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행했다.

그만큼 남자가 성 기능을 잃는 것, 고자가 되는 것에 대한 공포가 보편적으로 먹힌 셈이다.

“왜 그런 고민을 하는지는 모르겠네만, 이 나이에도 아침에 일어났는데 아랫도리에 반응이 없으면 그렇게 우울할 수가 없다네. 친구놈들 물어봐도 다 그 이야기야. 우리한테 한약을 사가는 나이 든 남자 손님들 십중팔구는 건강 때문이 아니라 남자 구실 잘 하려고 오는 것이지.”

“정말 그 정도입니까?”

“한 원장이야 아직 젊어서 모를 수 있네. 허나 나이가 들어보면… 지갑에 돈이 없어도 자존심을 세울 수는 있지. 헌데 아랫도리 구실을 못하면 남자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게야.”

한지호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남자지만 내성적이고 차분한 성격의 문재영, 그리고 장년을 넘어 노년에 접어들고 있는 최치우 모두 한 목소리로 성(性)이 남자에게 목숨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전혀 다른 성격, 다른 연령에서 공통의 의견이 나온 것이다.

아마 표본을 확대해도 다들 비슷한 이야기를 할 것 같았다.

한지호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성 문제가 남자에게 엄청 중요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고민을 한 것인가? 답하기 곤란한 문제라면 그냥 넘어가도 좋네만.”

“새로운 환자와 관련된 일입니다. 사실 남자에게 있어 성 기능이 그만큼 중요한 문제인지 와 닿지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최 사장님과 문 부원장의 말을 들으니 죽음에 이를 때보다 더 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겠군요.”

“암, 그렇고말고. 확 죽는 것보다 오래오래 남은 평생 괴로워해야 한다는 점에서 무서운 게 비교가 안 되지 않나.”

“임계치를 넘어선 스트레스라면……. 알겠습니다. 두 분 말씀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한지호는 갈증이 느껴진 듯 남아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에 다 마셨다.

죽음과 비견 될 정도의 스트레스라면 몸이 무슨 영향을 받을지 모른다.

헨리오 무크의 잦은 발병과 부작용도 이해가 됐다.

성 기능 장애를 고치면 연거푸 터지는 다른 증상도 더 이상 속을 썩이지 않을 것 같았다.

‘뿌리부터 뽑아야겠지.’

본질은 성 기능 장애다.

우습고 만만히 볼 문제는 절대 아니다.

일반적인 장애와는 다른 양상으로 증상이 나타나고 있으니 고민을 더 많이 해야 할 것이다.

“자, 일단 시간이 됐으니 들어들 가시죠.”

한지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심을 먹기 전보다는 안색이 한 결 밝아졌다.

문재영과 최치우 덕분에 실마리 하나를 풀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소득을 얻은 셈이다.

“별 말을 해준 것은 없네만, 도움이 됐으면 좋겠네.”

“저도요, 원장님. 혹시 의논하실 일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최치우와 문재영이 한지호를 따라 나서며 믿음직스럽게 말했다.

한지호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가 눈앞에 닥쳐와도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다.

한지호가 따르는 사람들에게 꿈과 밥을 주는 리더라면,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울타리 안에 모인 식구들은 그에게 밝은 에너지를 준다.

뛰어난 리더를 만나기 어려운 것처럼 좋은 구성원을 만나기도 힘들다.

한지호는 가슴 가득 든든함을 품에 안고 한의원으로 돌아갔다.

헨리오 무크도 중요하지만 당장 그를 기다리는 환자들도 똑같이 소중하다.

기적 같은 성공 신화를 써가면서도 한지호의 초심은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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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링링을 치료할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금링링은 레지던시 아파트에 반 강제로 감금을 했었고, 헨리오 무크는 리츠 칼튼 스위트 룸에 머물며 자유롭게 돌아다닌다는 차이다.

사실 헨리오는 리펄스 베이의 홍콩 원화 한의원으로 찾아와서 진료를 받아도 된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모습을 비추면 쓸데없는 소문이 날 수 있다.

헨리오 무크는 세계적인 유명인사고, 한지호 역시 중국과 한국에서는 만만찮은 인지도를 지녔다.

치료가 되기도 전에 헨리오가 홍콩 원화 한의원에 드나드는 게 알려지면 추측성 기사가 쏟아질 것이다.

스트레스 관리 차원에서 좋을 게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한지호는 진료를 마치면 리츠 칼튼을 찾아 개인 진료를 하기로 했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한지호는 무척 비싼 진료비를 받는다.

따로 시간을 내서 개인 진료를 하는 경우에는 기하급수적으로 페이가 치솟는다.

하지만 문제될 건 전혀 없었다.

헨리오 무크는 금링링과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돈이 많은 사람이다.

수십 년을 헐리우드 최고의 음악 감독으로 군림했으니 부자가 되는 게 당연했다.

최근 몇 년 동안 활동을 안 했어도 펑펑 쓴 돈보다 저작권료로 통장에 쌓이는 돈이 더 많을 것이다.

하룻밤 숙박비가 천만 원을 훌쩍 넘는 홍콩 리츠 칼튼의 스위트 룸에 장기 투숙하는 것만 봐도 그의 재력을 짐작할 수 있다.

헨리오는 이미 한지호에게 충분한 대가를 지불했다.

일종의 선수금 개념으로 10만 달러 수표를 써줬다.

10만 달러면 현재 환율로 1억 2천만 원이다.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하기도 전에 먼저 이런 거액을 지불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만큼 헨리오 무크가 한지호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다는 뜻이다.

마냥 좋아할 일만은 아니었다.

기대를 받는 만큼 반드시 보답을 해야 하는 게 프로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삐비빅-

한지호는 헨리오에게 받은 카드로 스위트 룸 문을 열었다.

약속 시간을 정하고 왔기 때문에 헨리오는 당황하지 않았다.

긴 복도 저편, 한쪽 벽을 전면유리로 채운 거실에서 헨리오가 걸어 나왔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닥터 한.”

그는 저번처럼 깔끔한 셔츠와 치노 팬츠를 입고 있었다.

머리가 벗겨졌어도 하나도 이상해 보이지 않고 세련된 패션을 자랑했다.

그러나 기력이 없어 보이는 건 여전했다.

한지호에게 치료를 받게 되어 일말의 희망을 드러내고 있지만, 뼛속 깊이 파고든 무기력증을 어찌 할 수 없는 것 같았다.

“마음의 준비는 하셨습니까?”

“후우- 가족과 지인들에게 당분간 연락을 하지 말라고 했지요. 홍콩에서도 번잡한 일상을 추구하지 않고 휴식을 취할 생각이요. 치료에만 전념하고 싶으니.”

“좋습니다. 소파로 가서 앉죠.”

한지호는 헨리오와 함께 소파에 앉았다.

그가 치료에 집중 할 각오를 단단히 한 것 같아 다행스러웠다.

어차피 매사 무기력한 그가 홍콩에 머물며 다른 일을 할 엄두를 내지 않는 게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스으윽-

한지호는 소파에 앉자마자 백팩을 열었다.

평소에 들고 다니는 것보다 더 큰 가방을 가져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게 뭔가요?”

“이번에 쓸 약재의 샘플입니다. 어떤 약재가 헨리오에게 더 잘 맞는지 알아보려 합니다.”

한지호는 헨리오의 이름을 편히 불렀다.

그러면서 다양한 약재를 꺼내 소파 앞 탁자에 올려놓았다.

“보통 성 기능 장애, 즉 발기부전은 전립선 질환이 원인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전립선염이나 비대증, 세균성 감염 등이 발기부전을 일으키는 것이죠. 하지만 헨리오는 전립선 질환 증세가 전혀 없고, 발기부전으로 인해 신체의 다른 부위에서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정확해요, 정확해.”

“몸의 기운이 틀어졌을 때, 한의학에서는 내기(內氣)의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이런 증상이 발생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양기를 북돋아주며 몸의 균형을 찾아주는 여러 약재 중에서 헨리오의 체질과 가장 잘 맞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 어렵지 않은 설명이었다.

다만 내기(內氣)와 같은 한자 단어를 영어로 바꿔서 표현하는 게 까다로웠다.

한지호는 인사이드 파워(inside power)라는 신조어를 만들었고, 헨리오도 단어의 뜻을 이해한 것 같았다.

“자, 잠깐. 그전에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지요?”

탁자 위에 펼친 약재를 선별하기 직전에 헨리오가 입을 열었다.

한지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헨리오에게는 분명 심리적인 문제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는 게 중요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몸 안의 기운이 틀어져서 이런 문제가 발생했고, 나아가 다른 부위도 계속 아프다는 이야긴데… 좀 더 정확히 설명해줄 수 있겠어요? 생색을 내는 건 아니지만, 이미 많은 기회 비용을 지불하고 닥터 한에게 희망을 걸었지요. 그러니 어떤 계획이 있는지, 근거가 있는 치료를 하는지 들은 다음 내 모든 것을 맡기고 싶어서 말이요.”

“제 설명이 부족했군요.”

한지호는 조금도 불쾌해 하지 않았다.

의사와 환자 사이에 소통을 많이 하고 신뢰를 쌓는 것도 중요한 치료 과정이다.

그는 헨리오 쪽으로 몸을 더 돌리며 차근차근 대답을 해줬다.

“진맥을 해본 결과 심신불교(心腎不交)의 상태였습니다. 심장 기능과 신장 기능의 교류가 잘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럴 경우 몸의 기운이 빠지고, 식욕이 저하되며 헨리오가 겪었던 다른 증상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또한 심장과 신장의 기능 저하로 말초혈관이 긴장 상태에 놓이게 되어 발기 역시 힘들어지는 겁니다. 따라서 심장의 화기를 진정시키고, 신장의 기능을 도와줘 심신이 원활히 교류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음경의 말초혈관이 이완되고, 혈액의 유입량이 많아지면서 발기력이 스스로 살아나게 되죠. 비아그라 같은 약물을 통한 인위적인 치료가 먹히지 않았던 것은 몸 안의 근본적인 문제를 손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 오오-! 이제 확실히 이해가 되는 것이…… 금링링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한 이유를 알겠어요. 정말로 닥터 한에게 내 모든 것을 맡기리다.”

헨리오의 눈동자에 희망이 빛이 서렸다.

자세하고 정확한 한지호의 설명이 그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은 것이다.

한지호는 미소를 지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금링링과 같이 만났던 날, 이런 문제는 한의사의 전공이라고 했었죠. 그리고 헨리오 당신은 최고의 한의사를 만난 것이라고도.”

“맞아요, 맞아. 내가 정말 세계 최고의 한의사를 만난 것이요.”

치료를 하기 전, 질병의 원인과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환자의 신뢰를 살 수 있다.

원인과 방법을 안다는 것은 열쇠를 가지고 문을 열기 직전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제 열쇠를 넣고 잠긴 문을 열기만 하면 된다.

변수가 발생해도 한지호는 기어코 만능 열쇠를 찾아낼 것이다.

영화 음악의 거장을 고치기 위해 한의학의 젊은 거장이 약재를 집어 들었다.

알맞은 약재를 선정하는 과정도 깜짝 놀랄 쇼 타임(show time)이 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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