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
9장, 군주의 자질 (2)
공교롭게도 홍콩 리츠 칼튼에 자주 방문하게 되는 것 같았다.
한지호가 특별히 이곳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홍콩에서 따로 약속을 잡는 VIP들이 리츠 칼튼의 스카이 라운지나 스위트 룸을 좋아한다.
아무래도 홍콩의 마천루를 발밑에 두고 내려다볼 수 있는 입지가 상류층의 취향에 맞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스위트 룸이나 스카이 라운지의 프라이빗 룸을 빌리면 누구와 만났는지 비밀 보장이 철저하게 이뤄진다.
국제 도시 홍콩의 꼭대기에서 프라이버시까지 지킬 수 있는 장소이니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삐빅-
끼이이이익!
한지호는 얼마 전 추위안차오를 만났을 때처럼 미리 받은 카드를 들고 스위트 룸 문을 열었다.
추위안차오가 묵었던 방과는 다른 호수지만 전체적인 구조는 비슷했다.
문을 열고 스위트 룸 안으로 들어선 그는 기다란 복도를 지나 거실로 걸어갔다.
거실의 전면유리 너머로 눈부신 홍콩의 야경이 황홀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지호는 풍경에 넋을 잃지 않았다.
대신 거실과 연결된 바(bar)에 앉아있는 금링링을 쳐다봤다.
“먼저 와있었군요.”
한지호의 말에 금링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도착했는지 그녀는 최고급 위스키인 발렌타인 30년을 마시고 있었다.
한 손에 위스키 잔을 든 그녀가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스케줄이 일찍 끝났어요. 딱히 돌아다니기도 싫고, 여기서 술이나 마시고 있었죠.”
“이제는 몸이 많이 회복 됐겠지만, 금링링 씨 체질에는 가급적 음주도 피하는 게 좋습니다.”
“알아요, 나도. 그런데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마음이 허전해져요.”
금링링의 말에 한지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무척 어려운 과정을 거치며 대마초와 담배를 끊었다.
그러나 마음의 빈자리를 흡연 대신 음주로 채우고 있었다.
이건 심리적인 문제다.
중국 대륙과 헐리우드를 누비는 톱스타로 살아가는 금링링의 마음에 남모르는 빈틈이 큰 것이다.
한지호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바(bar) 테이블에 앉으며 말했다.
“머지않아 음주 중독 치료를 받기 위해 날 찾아오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냉정하게 말하지 말아요, 한 선생님.”
술에 취한 것일까.
금링링이 촉촉하게 젖은 눈길로 한지호를 바라보며 교태를 부렸다.
말 그대로 치명적인 몸짓과 표정이다.
“내가 뭘 해도… 한 선생님은 날 치료해 줄 거죠? 우린 특별한 사이잖아요. 어쩌면 앞으로 더 특별해질 수도 있는…….”
묘한 말이 이어졌다.
정상적인 남자라면 벌써 자제심을 잃고 금링링의 붉은 입술을 탐닉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지호는 달랐다.
그는 흐트러짐 없이 금링링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상습 중독은 몸의 병이 아니라 마음의 병입니다. 내가 아니라 정신과나 상담 센터를 찾는 게 나을 겁니다.”
딱히 냉정하진 않지만 분명한 선이 느껴졌다.
남자와 여자가 아닌 한의사와 환자의 관계라고 매듭을 지은 셈이다.
기대와는 다른 반응에 금링링도 자세를 고쳤다.
자신의 유혹이 먹히지 않는 상대가 있다는 사실에 약간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 도도한 표정을 지었다.
과연 타고난 연기자다웠다.
“됐어요. 아무튼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은 곧 도착할 거라고 하네요.”
“어떤 사람입니까?”
어처구니 없지만 한지호는 금링링이 누구를 소개해줄지 모른다.
그저 헐리우드 관계자라는 이야기만 들었다.
금링링의 인맥과 위치를 신뢰하기에 굳이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었다.
그녀가 전화 통화로 마지막 약속을 지키겠다고 말하며 일방적인 약속을 잡은 것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영양가 없는 인물이라면 실망스러울 것 같았다.
한지호는 홍콩에서도 진료 후 남는 시간을 K-메디컬 타운과 관련된 서류 준비로 바쁘게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를 기대하고 왔어요?”
금링링이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말을 빙빙 돌렸다.
한지호의 애를 태우고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한지호는 이런 식의 장난을 좋아하지 않는다.
언제나 본론부터 간단하게 말하는 것이 그의 대화 스타일이다.
“솔직히 말해서 헐리우드에 누가 있는지도 잘 모릅니다. 영화에 큰 관심이 없기도 하고. 세계적인 스타라는데 이름을 못 들어본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요? 여기 올 사람은 영화배우는 아니에요. 그렇지만 헐리우드에서, 전세계 영화계에서 보증수표로 통하는 위대한 사람이죠.”
“감독? 아니면 제작자?”
“헨리오 무크. 들어봤어요?‘
“아는 척을 하고 싶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헐리우드 최고의 음악 감독이죠. 그가 오랜 지병 때문에 최근 활동이 줄어든 것도 영화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뉴스이고요.”
한지호의 뇌리에서 파바박 불꽃이 튀고 있었다.
금링링이 알려준 단편적인 정보를 조합해 판단을 내린 것이다.
‘세계적인 음악 감독이면 유명한 사람이겠지. 그가 지병 때문에 활동을 못 한다는 사실도 널리 알려졌고……. 만약 내가 치료해서 헨리오 무크? 그 사람이 현장에 복귀하면 자연스럽게 이슈가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야. 다음에는 헐리우드 스타들과도 연결이 될 거고.’
헨리오 무크를 만나기 전부터 의지가 활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금링링의 말대로 그가 헐리우드 최고의 음악 감독이 맞다면 이건 엄청난 기회다.
한지호는 인천 공항에서 일요신문의 김태현 기자와 인터뷰를 했던 걸 떠올렸다.
그는 한의원을 더 늘리지는 않아도 세계를 돌아다니며 거물들을 치료하는 꿈을 꾼다고 말했었다.
역사에 전무후무한 한의학 월드 투어.
어쩌면 헨리오 무크가 그 꿈의 초석이 될지도 모른다.
삐빅-
그때였다.
스위트 룸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는 카드를 미리 받은 사람은 금링링, 한지호, 그리고 헨리오 무크밖에 없다.
“헨리오가 왔나보네. 셋이서 같이 한 잔 하면 좋겠어요.”
“그만 마셔요.”
한지호는 금링링의 손에서 위스키 잔을 뺏으며 고개를 돌렸다.
아카데미 상과 그래미 상을 6번이나 수상한 영화 음악의 거장, 살아있는 전설 헨리오 무크가 들어오고 있었다.
+++
“그게…… 정말입니까?”
한지호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왼편으로 보이는 홍콩의 스카이 라인도, 스위트 룸을 장식한 호화로운 크리스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맞은편에 앉은 단 한 사람에게 온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상대가 어렵게 털어놓은 이야기의 충격파가 예상을 훌쩍 상회했다.
발렌타인 30년을 3분의 1병이나 마신 금링링도 정신이 번쩍 든 얼굴이었다.
그녀는 취기로 빨개진 얼굴을 갸웃거리며 말했다.
“지난 몇 년 동안 부쩍 활동이 뜸해진 게 그 이유 때문이었어요?”
한지호와 금링링의 질문을 연달아 받은 사람, 헨리오 무크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는 60대의 노인이다.
하지만 높은 콧대와 깊고 푸른 눈, 잘 차려입은 정장까지 흠 잡을 구석이 없는 젠틀맨처럼 보였다.
다만 원래는 풍성하던 하얀 머리칼이 어디로 갔는지 지금은 조명을 받아 번쩍이는 대머리가 됐다.
서양 사람들은 워낙 대머리가 많으니 이상해 보이지는 않았다.
“헐리우드 관계자들은 이 사실을 아나요?”
금링링이 고개를 숙인 그에게 다시 질문을 했다.
헨리오 무크는 얼굴을 허리 가까이 파묻은 채 천천히 대답했다.
“아주 가까운 사람들을 제외하면 거의 없지요. 이런 고민을 누구한테 털어놓겠어요? 그저 지병이 악화되어 작곡 활동이 힘들다고 알리는 게 최선이요…….”
그의 음성은 익히 알려진 이미지대로 적당한 중저음의 온화한 톤이었다.
동유럽 이민자 출신이지만 구사하는 영어 발음도 정확했고, 말투의 뉘앙스도 부드러웠다.
그러나 힘이 빠져 있었다.
앉아있는 자세부터 목소리, 눈동자 모두 기운이 없어 보였다.
그가 스위트 룸의 문을 열고 거실까지 걸어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겉모습은 다른 60대 노인보다 늙어 보이지 않는데 유독 힘없는 분위기가 풍겨졌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왜 헐리우드의 거장 헨리오 무크가 몇 년째 활동을 하지 않는지 이제야 알게 됐다.
방금 두 사람 앞에서 비밀을 털어놓은 헨리오는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한지호는 그를 부끄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지만, 정확한 증상을 파악하기 위해 한 번 더 확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부터 남성으로서 생식 기능이 심각하게 저하됐고, 그에 따른 여러 부작용이 겹쳐서 건강을 잃었다는 말씀이시죠. 탈모 역시 부작용 중의 하나이고.”
“맞… 아요. 그 문제가 생긴 이후 간 수치도 나빠지고, 식욕 저하에 각종 면역 질병에……. 하나를 치료하면 다른 병이 생기고,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 방법이 없다고들 하니 앞으로 평생을 시달려야 하는지요.”
헨리오의 말을 들은 한지호는 웃을 수 없었다.
금링링도 혹시 그에게 상처가 될까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실제로 심각한 상황이기도 하다.
헨리오 무크의 무기력증은 성(性)기능 장애에서 비롯됐다.
단순한 노인성 발기부전은 아닌 것 같았다.
약물로 치료가 안 된다는 게 첫 번째 문제이고, 성 기능 장애로 인해 여러 합병증이 발생한다는 게 두 번째 문제다.
스트레스가 극심해져서 탈모로 머리가 벗겨진 건 그나마 약과다.
헨리오의 말에 의하면 간 수치 저하로 만성 피로에 시달리고, 황달도 자주 앓게 됐다.
간장약으로 치료를 하면 잠깐 증상이 호전 되지만 신장이나 허리, 근육 등 다른 부분이 말썽을 일으킨다.
이러한 질병과 증상들의 근본 원인이 성기능 장애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에게 있어 성기능 장애는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헨리오 무크의 경우 약도 듣지 않고, 다른 질병까지 끊임없이 터진다.
남은 평생 부작용을 번갈아가며 치료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무기력증에 빠트렸다.
헨리오와 같은 상황에 처하면 누구라도 인생을 비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세계적인 음악 감독이기에 이미 다 쓰고 죽지 못할 정도로 많은 돈을 벌어 놓았다.
하지만 건강과 남성성을 잃으면 태산 같은 돈도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법이다.
그렇게 절망에 빠지던 중 헨리오가 금링링의 뉴스를 접한 것이다.
어느 의사도 고치지 못한 금링링의 난치병을 한국 전통 의사가 해결했다는 뉴스가 홍콩과 중국 전역을 강타했었다.
중국에서 이슈가 된 소식은 미국에서도 널리 알려지는 세상이다.
게다가 금링링도 처음부터 헨리오 무크를 소개해줄 생각이었다.
그가 밝히지 않은 지병으로 고생한다는 소식은 헐리우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참으로 절묘하게 타이밍이 맞은 셈이다.
그러고 보면 의사와 환자가 만나는 것도 보통 인연이 아니다.
하늘이 점지해준 것처럼 끈끈하고 기막힌 인연이 없으면 몸을 맡기는 사이로 만나기 힘들다.
한국의 한의사 한지호가 미국 헐리우드에서 활동하는 음악 감독 헨리오 무크의 속사정을 듣게 된 것도 참 신기한 일이다.
이것은 대단한 기회 이전에 인연이다.
한지호는 주어진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으로서 말에 진심을 담았다.
“미스터 무크, 무척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 종류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최선의 방법은 한의사를 만나는 겁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은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한의사와 만났습니다.”
담담하게 오버하지 않았지만 말투와 내용에 자신감이 넘친다.
이제껏 무기력하게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던 헨리오 무크가 한지호를 쳐다봤다.
주름진 그의 얼굴에 희망이란 것이 피어나기 직전이었다.
“치료가… 가능하겠어요?”
“두고 봐야죠. 하지만 날 소개해준 금링링 씨에게 두고두고 고마워하게끔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겁니다. 나에게 모든 것을 맡겨준다면.”
거장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아직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슨 말을 꺼낼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한지호는 헨리오 무크의 장애와 부작용을 치료하고, 전세계의 팬들에게 그가 만드는 아름다운 영화 음악을 돌려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또 다른 차원의 도전이 시작되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