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
9장, 군주의 자질 (1)
정부 주도의 의료 복합 단지, K-메디컬 타운은?
의료 한류를 개척하는 시도가 될 것인가!
경기도 김포 한강 신도시에 대규모 의료 특구, 1000억 원 프로젝트!
“다들 떠들썩하군.”
한지호는 주요 신문의 헤드라인을 확인하고 컴퓨터 모니터를 껐다.
한동안 쉬지 않고 기사를 검색했더니 눈이 아팠다.
그는 모처럼 신사동 자택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비공식적으로 진행되던 K-메디컬 타운 공모가 끝났고, 선정된 의료기관과 사업 내용이 밝혀졌다.
언론에서는 대서특필 할 수밖에 없는 대형 뉴스였다.
정부에서 초기 투자금을 무려 1000억 원이나 풀었다.
그 외에도 각종 혜택을 제공하며 국제적인 의료 특구를 조성하려 한다.
사업의 당위성을 떠나 모든 언론이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게 당연했다.
몇 몇 언론은 정부의 투자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아직까지는 호의적인 기사가 더 많았다.
입지 선정도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경기도 김포의 한강 신도시는 새롭게 건설되고 있다.
아파트 단지가 대거 들어서며 주민들은 급증하는 추세지만 상업 시설과 의료 시설은 부족하다.
뿐만 아니라 김포 공항과 접근성이 좋다는 게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애초에 K-메디컬 타운은 중국 관광객을 노리고 시작된 사업이다.
중국이나 일본 등지에서 한국을 찾는 관광객들은 주로 김포 공항을 이용한다.
내수 수요는 한강 신도시에 입주하는 주민들에게서 채우고, 주목적인 외국 의료 관광객에게는 공항과의 접근성을 내세워 매력을 어필하면 된다.
물론 성형수술을 받기 위해 한국에 오는 관광객들은 무조건 강남을 찾는다.
하지만 매력적인 입지에 들어서는 거대한 규모의 의료 특구는 새로운 수요를 창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원화 정의 네트워크는 K-메디컬 타운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한지호의 의도대로 원화 한의원이 아닌 원화 정의 네트워크가 한방 부문 의료기관으로 선정 됐다.
최종 결심까지 올라갔던 위천 한방병원은 탈락했다.
그래서일까.
전국 각지에 퍼져있는 위천의 프랜차이즈 지점들이 하나 둘 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사실 위천의 프랜차이즈 가맹비는 저렴한 편이 아니다.
일괄적으로 공급되는 약재 역시 꽤 비싼 값을 받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브랜드 가치가 있기에 수많은 한의원들이 가맹 계약을 맺었던 것이다.
그러나 홍콩에서의 사건으로 위천의 간판이던 유우선 병원장이 은퇴했고, 환자들의 신뢰도 많이 떨어졌다.
그에 비해 한지호와 원화 정의 네트워크 소속 한의원들은 너무 잘 나가고 있다.
정부가 투자하는 K-메디컬 타운에도 들어가게 됐으니 원화의 브랜드 가치는 천정부지로 치솟을 게 뻔했다.
K-메디컬 타운으로 위기를 극복하려 했던 조준혁은 진짜 벼랑 끝에 몰렸다.
벌써 몇 곳의 지점이 위약금을 물면서도 가맹계약을 해지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계약 기간이 끝나면 자연스레 프랜차이즈에서 이탈하는 지점들이 더 늘어날 것 같았다.
단기간에 쌓아올린 위천 한방병원의 신화가 침몰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한민국 한의학계를 장악했던 조준혁은 극복하기 어려운 내상을 입었다.
의술이 아니라 정치력에서도 한지호에게 밀렸다는 사실이 그에게 크나큰 패배감과 상처를 안겨줬다.
패배를 모르고 성공의 달콤한 열매만 누리던 사람, 철벽처럼 높은 자존심으로 무장한 사람은 단 한 번의 실패에 더 큰 내상을 입는 법이다.
적어도 현재로서는 조준혁과 위천은 무너지는 성으로 보였다.
반면 한지호는 신성(新星)을 넘어 밤하늘을 환히 밝히는 보름달이 됐다.
서울과 홍콩의 원화 한의원 두 곳만 해도 입지전적인 성공을 경신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원화 정의 네트워크 소속 한의원들까지 K-메디컬 타운을 계기로 한층 성장시킬 기회를 얻었다.
처음 네트워크를 만들 때 그는 한의학계의 외인구단이 되자고 말했었다.
양보다 질로 승부하는 공포의 외인구단.
지금은 그때의 포부를 뛰어 넘은지 오래다.
원화 정의 네트워크는 한의학계를 넘어 의료계 전체의 주목을 받는 돌풍의 핵이 됐다.
한지호는 최 원장을 비롯해 모두 네 명의 원장들과 의견을 주고받으며 K-메디컬 타운 입주를 준비하고 있었다.
다른 네 명의 원장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열심히 준비를 했다.
그들 입장에서도 K-메디컬 타운에 참여해서 새로운 수익원을 창출하는 게 엄청난 기회이기 때문이다.
넷은 한 번의 옳은 선택으로 두고두고 이득을 보는 케이스였다.
그들로서는 한지호와 손을 잡고 원화 정의 네트워크를 만든 게 그야말로 인생의 선택이었다.
가장 어린 후배 한지호를 대표 원장으로 세우고 따른 것이 조금도 후회되지 않았다.
한지호는 자기 사람을 확실하게 챙기는 리더다.
네트워크의 다른 원장들은 한지호와 원화의 울타리 아래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진짜 리더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증명한다.
삼국지 시대에도 영웅들을 거느린 군주는 커다란 비전과 함께 확실한 보상을 제공했다.
천하통일의 비전, 그리고 당장의 관직과 부귀영화.
둘 중 하나라도 만족시키지 못하면 인재들이 떠나고, 결국에는 몰락할 수밖에 없다.
한지호는 삼국지 시대를 수놓았던 여러 군주들을 알고 있다.
전생의 규호가 천하를 떠돌며 영웅들을 만났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비전과 보상이라는 리더쉽의 핵심을 깨달은 것이다.
한지호가 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군주론(君主論)은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었다.
그를 따르는 네 명의 원장과 문재영, 바이룽, 박우식 등 날고 기는 인재들이 두 마음을 품지 않는다는 게 확실한 징표다.
군주의 자질은 특별한 게 아니다.
따르는 사람들에게 꿈과 밥을 주는 것이 전부다.
물론 그 두 가지를 충족시키는 게 실제로는 무진장 어렵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서른 살 한지호는 계속해서 꿈과 밥, 비전과 보상을 주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있다.
훗날 그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꿈과 밥을 주는 군주로 성장할지 누구라도 기대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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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심한 밤, 청담동 라운지 클럽은 음악 소리와 웃음 소리가 뒤섞여 자유로운 분위기를 풀어낸다.
한지호는 매상 자리라고 부르는 가장 좋은 테이블에 앉았다.
같은 테이블에 문재영 부원장과 조기운, 그리고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최 원장과 박 원장도 함께 했다.
미남 미녀들이 즐비한 청담동 라운지 클럽에서 가장 비싼 매상 자리, 그 위에는 당연히 돔 페리뇽과 아르망디가 몇 병씩 진열 돼 있었다.
음악에 몸을 맡기는 사람들, 난간에 기대거나 걸어 다니며 이성과의 대화를 기다리는 사람들 모두 한 번씩 한지호의 자리를 쳐다봤다.
원래 주목을 받는 자리기도 하지만 국민 한의사이자 훈남으로 유명한 한지호가 왔다는 게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아- 좋네, 좋아. 역시 사람은 이렇게 물 좋은 곳에서 놀아야 해.”
최 원장이 샴페인을 마시며 너스레를 떨었다.
오늘은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회의 겸 회식이 있는 날이었다.
박우식과 다른 원장들은 일찍 귀가했고, 조기운이 합류해서 3차가 시작 됐다.
최 원장은 끝까지 남은 보람을 느끼는 중이었다.
청담동 스타일의 미녀들이 힐끗힐끗 테이블을 쳐다보니 몸이 달아오르는 모양이다.
“한 원장, 먼저 스타트를 끊지 그래? 마음에 드는 여자 아무나 잡으면 다 같이 놀자고 할 것 같은데 말이야.”
최 원장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콧대 높은 미녀들이 매상 자리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한지호, 혹은 그의 일행이 말을 걸어주길 은근히 기다리는 게 확실했다.
하지만 한지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생각 없으니까 최 원장님이랑 박 원장님 실컷 노세요. 문 부원장이랑 기운이도 고생하는데 오늘은 재밌게 놀아야지.”
“에이- 그래도 우리 한 원장이 함께 즐겨야지!”
“지금도 충분히 즐겁습니다. 메디컬 타운에 들어갈 준비도 착착 되어가고, 이렇게 맛있는 술에 좋은 분위기까지. 더 바랄 게 없어요.”
“하여튼 워커홀릭이라니까.”
한지호는 잔에 남은 샴페인을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운지 안의 여자들에게 말을 걸려고 일어선 게 아니다.
다른 일행들이 편히 놀 수 있도록 잠시 자리를 비워주려는 것이다.
“스트레스 많을 텐데 오늘은 신나게 놀아도 된다. 알지?”
“네, 형님.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하하! 다 컸어, 이거.”
에스코트 업체를 창업하기 위해 독립한 조기운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그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휘이이이이-
바람 부는 테라스로 문을 열고나오니 한결 조용해졌다.
라운지 내부의 음악 소리와 들뜬 열기, 대화와 웃음이 오가는 소리 대신 어느새 제법 쌀쌀해진 바람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그러고 보니 가을이 한창이다.
땀을 뻘뻘 흘리게 만들었던 한여름이 엊그제 같은데 계절은 속절없이 흘러간다.
꽤 넓은 테라스에 한지호 말고도 잠시 몸을 식히러 나온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데 시선을 주지 않고 폰을 꺼냈다.
지금쯤 기다리던 결과 하나가 나올 시간이 됐기 때문이다.
“지호 오빠!”
전화기 너머에서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운지 안을 채우는 끈적끈적한 음악보다 훨씬 듣기 좋았다.
한지호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오디션 결과 나왔지? 어떻게 됐어?”
“안 그래도 방금 사장님께 연락 받고 오빠한테 톡 보내고 있었는데… 딱 그 타이밍에 전화가 온 거 있죠.”
“뜸 들이는 거 보니까 좋은 소식 맞지?”
“맞아요! 저 붙었어요, 지호 오빠.”
“그럴 줄 알았어! 진짜 잘 됐다, 초아야.”
한지호는 K-메디컬 타운 공모에서 승리했을 때처럼 환하게 웃었다.
유초아가 공중파 드라마 오디션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여주인공은 아니지만 제법 비중 있는 조연 캐릭터를 그녀 자신의 힘으로 따낸 것이다.
내년 봄에는 그녀를 TV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잘 될 거라고 했지? 진짜, 진짜로 축하해.”
“전부 오빠가 좋은 회사를 소개해준 덕분이에요. 수녀님이랑 아이들도 좋아할 것 같아요.”
“그럼, 다들 좋아하겠지. 수녀님도 기뻐하실 테고.”
“촬영은 겨울부터 시작되는데요, 그전에 오빠한테 꼭 밥을 사고 싶어요.”
“밥은 내가 사야지.”
“아니에요. 이번에 드라마 출연료의 30%가 먼저 정산 된다고 해요. 그러면 꼭 맛있는 거 살게요. 소원이에요.”
“무슨 소원을 그렇게 써. 아무튼 알겠어. 오늘은 참 여러모로 기분이 좋다.”
“지호 오빠, 전 이제 지하철 타고 부천으로 가려구요. 너무 늦게 들어가지 마세요.”
“이제 내 걱정도 하고, 기운이처럼 너도 다 컸네. 아무튼 좋은 소식 전해줘서 고맙다.”
한지호는 웃음을 지우지 못한 채 전화를 끊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특했다.
믿을만한 대형기획사를 소개해줬지만, 그 다음부터는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
물론 기획사 사장이 한지호의 얼굴을 봐서 유초아에게 특별 대우를 해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드라마 오디션에서 배역을 따낸 건 그녀가 이뤄낸 성취다.
하고 싶은 일을 찾고, 그 분야에서 쑥쑥 성장하는 유초아의 모습이 참 예뻤다.
다만 이게 단순히 여동생을 대견해하는 마음인지 점점 헷갈리고 있었다.
우웅- 우우웅-
그런데 손에 쥔 스마트 폰에서 다시 진동이 울렸다.
한지호가 자기 감정을 솔직하게 들여다보려는 찰나, 기막힌 타이밍에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어?”
폰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확인한 한지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모르는 번호는 아니었다.
그저 예상하지 못했던 상대가 전화를 걸어와 약간 놀랐을 따름이다.
“기대하지 못 했는데, 오랜만입니다.”
한지호는 유창한 영어로 인사를 건넸다.
상대도 마찬가지로 영어를 썼다.
“약속을 마저 지키려고요.”
“우리 사이에 남은 약속이라면…….”
“치료비는 드렸고, 홍보 모델도 했고, 남은 건 헐리우드 관계자를 소개해주겠다는 것 밖에 없지 않아요?”
“이렇게 빨리 그 약속을 지킬 줄은 몰랐습니다.”
한지호가 미소를 지었다.
유초아와 통화를 할 때 지었던 웃음과는 조금 느낌이 달랐다.
순수하게 사람이 좋아서 웃는 것과 야망을 성취하며 웃는 것은 확실히 다르다.
“소개 받을 거에요, 말 거에요?”
“당연히 받아야죠.”
“홍콩엔 언제 와요?”
“내일 밤 비행기로 갑니다.”
“그럼 3일 뒤 저녁에 봐요. 리츠 칼튼에서.”
띠- 띠- 띠-
대륙의 여신, 금링링이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안하무인으로 유명한 그녀다운 행동이었다.
그러나 한지호는 불쾌하지 않았다.
도도하기로 악명 높은 금링링이 막상 자신을 만나면 얌전해지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녀는 약속을 완전히 지켰다.
사실 거액의 치료비와 원화 한의원의 홍보 모델이 되어준 것으로 충분했다.
그런데도 먼저 헐리우드 관계자와 약속을 잡아 연락을 한 것이다.
까칠하긴 해도 스스로 뱉은 말을 지킨다는 점에서 겉만 멀쩡한 인간들보다 금링링이 훨씬 낫다.
두 명의 여인과 나눈 두 통의 전화가 한지호의 기분을 업 되게 만들었다.
그는 몸을 돌려 라운지 안을 쳐다봤다.
돔 페리뇽과 아르망디가 깔린 테이블에 어느새 낯선 여자들이 섞여 앉아 있었다.
최 원장과 조기운이 수완을 발휘했고, 의외로 문재영과 박 원장도 잘 노는 것처럼 보였다.
이래저래 흥겨운 밤이다.
스으윽-
테라스 문을 열자 음악 소리가 커졌다.
한지호는 자연스레 흥겨운 비트에 몸을 맡기며 테이블로 걸어갔다.
달콤쌉쌀한 샴페인을 원 없이 마시며 날이 밝을 때까지 축배를 들 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