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
7장, 상전벽해(桑田碧海) (2)
역전의 용사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서울과 경기도 각 지역에서 원화(元化)의 깃발을 내걸고 한의원을 성장시킨 사람들이다.
바로 원화 정의 네트워크에 소속된 원장 네 명과 부원장 문재영, 총괄 이사 박우식, 네트워크 전속 약재상 명징 약초의 최치우, 그리고 대표 원장 한지호가 회의실에 몰려 앉았다.
부원장 중에서는 문재영만이 유일하게 참석했다.
네트워크의 대표 한의원의 부원장이기에 특별 대우를 받는 것이다.
“하하하, 조 이사장 표정을 내가 봤어야 했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사진이라도 찍어 오셨으면 좋을 뻔 했습니다.”
오랜만에 모두 모인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멤버들은 자유롭게 대화를 나눴다.
지금은 한지호가 조준혁에게 한 방 먹인 이야기를 하며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다들 정부에서 K-메디컬 타운을 준비한다는 소식은 들었다.
이어서 화제가 자연스레 그쪽으로 넘어갔다.
굳이 분위기에 제동을 걸지 않아도 알아서 본론이 꺼내졌다.
합이 잘 맞는 것이다.
네트워크 소속 원장들끼리 전화나 메일 등을 이용해 자주 교류하며 의견을 나눈 티가 팍팍 났다.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아직은 로드맵을 짜기도 이른 상황이기는 합니다.”
원장들 틈에 자리잡은 유일한 부원장 문재영이 입을 열었다.
곧이어 원화 한의원의 사무장이자 네트워크의 총괄 실장인 박우식이 말을 이어 받았다.
“확실한 것은 네트워크 차원에서 K-메디컬 타운 사업을 준비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박우식의 말에 모두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지호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고 비전을 제시했다.
목표를 정해주는 게 리더의 역할이다.
나이는 어려도 한지호는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중심축이자 리더로서 제몫을 다하고 있었다.
“원화 한의원이 아닌 원화 정의 네트워크가 K-메디컬 타운 사업에 공모하는 의료기관으로 나설 겁니다. 당연히 홍콩 원화 한의원까지 네트워크에 포함 되어 공모를 하는 거죠.”
“홍콩까지…….”
“아무래도 중국 의료 관광객들을 노리고 진행하는 국책 사업이니 홍콩 원화 한의원의 참여는 플러스 요소가 될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게 우리 네트워크가 이번 사업 공모에서 어필할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인지도 모르겠네.”
최 원장이 핵심을 정확하게 짚었다.
중국 현지에서 환자들에게 신뢰를 쌓은 홍콩 원화 한의원의 존재는 가산점 요인이 될 것이다.
한지호는 이 사업이 네트워크에 어떤 도움이 될지 다시 언급했다.
“우리 네트워크가 K-메디컬 타운에 입주하게 되면 전국민과 해외 관광객들에게 원화 정의라는 브랜드를 각인시킬 수 있게 됩니다. 세제 혜택과 정부의 지원금도 우리가 각각의 한의원을 성장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겠죠.”
최 원장을 비롯해 네 명의 원장들이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막상 한지호의 입으로 네트워크 소속 한의원들이 크게 성장하는 계기가 될 거란 말을 듣자 가슴 속 웅심이 꿈틀거린 것이다.
한지호가 워낙 독보적인 인물이라 그렇지 최 원장, 김 원장, 박 원장, 이 원장도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한의사들이다.
최고의 명문인 K대 한의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주류들이기도 하다.
그들이 한지호를 선택해서 한의학계에 새바람을 일으켰다면, 이제는 한지호가 그들에게 파이를 나눠주려 하고 있었다.
사실 네 명의 원장들은 그동안에도 원화 정의 네트워크에 소속되어 많은 어드밴티지를 누렸다.
한지호의 이름값을 이용해 각자의 한의원을 홍보했고, 공동으로 부원장을 뽑아 교육시키는 과정에서 우수한 인재들을 영입할 수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명징 약초는 서울 원화 한의원 3층에 자리를 잡은 이후 최상의 약재를 저렴하게 공급해줬다.
매달 최소한의 네트워크 운영 비용을 내고, 한의학계에서 한지호를 정치적 리더로 밀어준 것보다 더 많은 혜택을 받은 셈이었다.
이런저런 이해득실을 따지면 네 명의 원장들은 이미 원화 정의 네트워크에 소속 되고나서 손익분기점을 넘겼다고 봐야 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데 한지호는 K-메디컬 타운이라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정복하자고 비전을 제시했다.
마치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으로 이끌었던 모세나 여호수아 같았다.
“사실 우리 네트워크에 대해 외부에서는 원화 한의원이 원톱이라고들 평가합니다. 한의학계 내부에서도 비슷하게들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거야 부정할 수 없는 팩트니까 우리가 기분 나빠할 수만은 없는 일이지.”
가장 연장자인 최 원장이 담담하게 사실을 인정했다.
쓸데없는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게 네트워크 소속 원장들의 장점이다.
속이 좁은 사람들이었다면 한지호도 이들과 함께 네트워크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바꿔야죠. K-메디컬 타운을 계기로 원화 한의원만 원톱인 게 아니라 어느 한 곳 무시할 수 없는 공포의 외인구단 이미지를 구축해야 합니다.”
“한의학계에 등장한 공포의 외인구단이라……. 재밌네요, 재밌어.”
박 원장이 흥미를 보였다.
중요한 대목에만 입을 여는 박 원장도 K-메디컬 타운에 욕심을 숨기지 않았다.
“네트워크의 이름 아래 뭉친 각각의 한의원이 우리나라 한의학계를 이끌어가는 겁니다. 유명세와 실제 매출 모두 국내 한의원들 중에서 최상위권을 장악해야죠. 위천처럼 문어발식 프랜차이즈 확장을 하지 않아도 우리가 한국을 대표하게 될 겁니다.”
위천 한방병원을 뛰어넘어 원화 정의 네트워크가 대한민국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
네 명의 원장들은 머지않아 국내 한의학계를 주도할 거라는 부푼 꿈을 꿨다.
한지호의 심장도 두근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홍콩에서 전투를 승리하며 위천과 조준혁의 예봉(銳鋒)을 꺾었다.
이제 K-메디컬 타운을 놓고 벌어지는 전투까지 이기면 완전히 승기를 굳히게 된다.
한 때는 거대한 위천 한방병원을 무너트린다는 게 실현 가능성이 없는 막연한 꿈으로 여겨졌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결코 불가능하지 않은 목표가 된지 오래였다.
어쩌면 위기에 몰린 조준혁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릴 기회인지 모른다.
한지호는 들뜬 네트워크 멤버들 틈에서 남몰래 각오를 다졌다.
‘조준혁, 당신은 의술을 돈벌이로만 여겨서 성공했지. 그런데 한의학의 본질을 가장 중시하는 우리가 그 성공을 끝내줄 테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야.’
한지호의 눈에 불꽃이 들어간 것 같았다.
그를 가까이서 오래 지켜봐온 최치우만 한지호가 속으로 뜨거운 불을 품었다는 걸 눈치챘다.
진짜 일을 내는 사람은 밖으로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요란하지 않게, 하지만 누구보다 철저하고 무섭게 자기 내면에서부터 준비를 시작한다.
이 순간의 한지호처럼.
조준혁이 이끄는 위천이라는 거성(巨星), 그리고 한지호가 일으킨 원화라는 신성(新星)의 전쟁도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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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도, 홍콩에서도 한지호는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그에게 진료를 받길 원하는 환자들이 갈수록 늘어나기 때문이다.
문재영과 바이룽이 부원장으로 든든히 버티면서 손을 거들어주지 않았다면 정말 한계에 부딪쳤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불평불만을 쏟아내지는 않았다.
한 명의 환자라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었던 때가 엊그제 같았다.
그를 만나기 위해 미리미리 예약을 하고 시간을 낸 환자들을 보면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진다.
천생 의사 체질인 것이다.
그러나 힘든 것은 사실이고, 오금희의 내공으로 버텨도 쌓인 피로가 쉽게 가시지는 않았다.
때문에 진료가 끝난 후 저녁 시간이 무엇보다 소중했다.
저녁 시간의 휴식이 다음날의 컨디션을 좌우하고, 한지호가 과부하에 빠지는 걸 막아주고 있었다.
가끔 진짜 거물들이 개인 진료를 원하면 저녁에 자택을 방문하기도 한다.
평창동의 황만금이나 동성 건설 회장 선운열, 그리고 플래티넘 홀딩스의 이재박 부사장 등을 진료할 때는 따로 시간을 낼 수밖에 없다.
“후우- 오늘은 이걸로 끝인가.”
마지막 환자의 진료를 마치고, 차트를 꼼꼼히 작성한 한지호가 두 팔을 쭉 뻗었다.
다행히 오늘은 저녁에 별다른 일정이 없었다.
특별한 VIP 진료나 외부 미팅이 잡히지 않았기에 온전히 쉴 수 있다.
마음 같아서는 유초아를 만나 저녁을 먹고 싶었다.
하지만 대형 기획사에 들어간 유초아는 드라마 오디션을 앞두고 트레이닝을 받는 중이다.
그녀의 꿈에 방해가 될 수 없기에 당분간은 연락만 주고받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지은이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한지호는 옛 여자친구인 이지은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보다 항상 자신의 꿈을 먼저 생각했던 게 이별의 이유였다.
이제 유초아의 꿈을 밀어주는 키다리 아저씨 입장이 되어보니 이지은에게 괜히 더 미안해졌다.
똑똑!
그때 누가 원장실 문을 두드렸다.
개인적인 상념에 빠져있던 한지호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진료는 다 끝났어도 아직 퇴근하기 전이다.
공식적으로 서울 원화 한의원의 근무 시간이기에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원장님, 사무장입니다.”
“들어오세요.”
2층 원장실에 노크를 한 사람은 사무장 박우식이였다.
요즘 그는 원화 정의 네트워크를 하나로 묶어 K-메디컬 타운 공모에 참여하는 문제로 애를 쓰고 있다.
아마 지금도 공모 진행 현황을 보고하려 올라온 것 같았다.
“K-메디컬 타운 문제로 원장님께 알려드릴 일이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한지호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한지호는 매일 관련 보고를 받기 때문에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늘도 특별한 소식은 없나요?”
“두 가지 중요한 소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평소와 달리 박우식이 중요한 소식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두 가지라고 밝혔다.
절대 허튼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니 기대가 됐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으로 나뉘는 겁니까? 이왕이면 좋은 소식만 듣고 싶군요.”
“원장님……. 이제는 돗자리 까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좋은 소식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라도 좋은 게 있다니 다행이네요.”
“네, K-메디컬 타운의 상세한 공모 조건이 나왔습니다. 원화 정의 네트워크로 서류를 준비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서류 외에는 또 뭐가 중요합니까?”
“개별 면접과 비공개 심사위원단의 자체 실사입니다.”
“면접은 자신 있고, 실사는 복불복인데 준비를 잘 해야겠습니다.”
한지호가 턱 밑을 쓰다듬으며 계산을 했다.
서류에서는 밀릴 게 없다.
면접 역시 누구보다도 잘 할 자신이 넘치는 종목이다.
문제는 심사위원단의 실사 평가다.
원화 한의원뿐 아니라 네트워크 소속의 다른 한의원들도 실사 대상이 될 것이다.
혹시 모를 변수가 발생하면 점수를 잃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죄송하지만 나쁜 소식도 전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원장님.”
한지호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됐든 박우식이 따로 보고를 올리는 내용은 확실히 파악해 놓아야 한다.
“얼마나 나쁜 소식인지 한편으로는 기대도 됩니다.”
“그것이… 위천 한방병원의 조준혁 이사장이 K-메디컬 타운 공모의 비공개 심사위원단 선정에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소문입니다. 압력이 아니라 로비로 해석해도 되겠습니다만은, 결과는 똑같기에…….”
“조준혁 이사장이 로비를? 이미 홍콩에서의 일로 양성문 장관님께 단단히 찍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무슨 수로 비공개 심사위원단에 자기 사람을 심는다는 거죠?”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는 국책 사업이라 보건복지부만으로 주관하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조준혁 이사장은 정부 쪽 다른 라인을 통해 비공개 심사위원단 구성을 유리하게 만들어서 K-메디컬 타운 사업을 따내려는 것 같습니다.”
한지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조준혁이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한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위천 한방병원으로 한의학계를 주무르며 쌓은 인맥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오랜 시간 축적된 조준혁의 인프라는 위협적인 무기다.
양성문과 껄끄러운 사이임에도 그가 K-메디컬 타운에 의욕을 보인 걸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름대로 비장의 한 수를 준비한 것이다.
‘이거였군, 조준혁.’
조준혁은 정정당당한 승부 대신 정치력을 이용한 모략을 선택했다.
그게 조준혁의 무서운 점이고, 이제껏 위천을 키워온 원동력이다.
한지호는 말없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가만히 앉아서 당해줄 생각은 눈꼽 만큼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