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
7장, 상전벽해(桑田碧海) (1)
부우우우웅-
하얀색 벤틀리 컨티넨탈 쿠페가 묵직한 소리를 뿜어내며 국회의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미끈한 차체와 전방을 압도하는 커다랗고 동그란 헤드라이트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국회의원들은 국산 대형차를 이용한다.
공무가 있어 의사당에 방문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국산차를 타고 다닌다.
강제적 의무는 아니지만 불문율에 가깝다.
그런데 강남에서도 흔히 보기 힘든 하얀색의 벤틀리가 번쩍거리며 국회의사당으로 들어오니 다들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직접 차를 몰고 온 한지호는 당연하다는 듯 의사당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외부 차량은 한강변의 국회 공영 주차장을 이용해야 한다.
의사당 지하에 차를 댈 수 있는 사람은 국회 관계자들밖에 없다.
그는 보건복지부 정책 자문위원이자 동백장을 수여한 사람이기에 아무 때나 자유롭게 의사당 주차장을 이용할 수 있었다.
한지호의 개인 차량 번호가 정식으로 등록 돼 있기 때문이다.
별 것 아닌 일이지만, 국회에서 대접을 받는 느낌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그야말로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사람이 됐다는 기분이 들게 된다.
주차를 마치고 올라온 한지호는 의사당 본청으로 향했다.
초록색 지붕과 거대한 기둥을 자랑하는 본청 건물은 여전히 웅장한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1층의 방문자 검색대 직원들도 한지호의 얼굴을 알아보고 빠르게 통과를 시켜줬다.
그가 오랜만에 국회에 온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양성문 장관의 부름을 받고 보건복지부 정책 회의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한지호는 홍콩에 개원을 한 이후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었다.
그 사이 대통령에게 동백장을 받고, 계절이 가을로 접어드는 등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저벅저벅-
몇 달이 흘러 다시 국회의사당 본청 복도를 걷고 있으니 감회가 남달랐다.
똑똑똑!
보건복지위원회 회의실 앞에 다다른 그가 노크를 했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낯익은 얼굴의 여자 비서가 한지호를 맞이했다.
“장관님과 위원님들께서는 안에 계셔요.”
“제가 좀 늦었군요. 고맙습니다.”
한지호는 그녀에게 목례를 하고 또 하나의 문을 열었다.
넓은 방 안에 기다란 원탁이 놓여 있었고, 좌우로 여러 명의 정책 자문위원들이 앉아있는 게 보였다.
양성문 장관은 꼭짓점 자리의 상석을 지키며 위원들의 발언을 경청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한지호가 들어온 걸 보고 반갑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직 장관이 몸을 일으키며 환대를 해줄 정도로 한지호의 존재감이 무거워진 것이다.
“오! 한 원장, 바쁜데 이렇게 와줘서 정말 반가울 수가 없어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장관님. 다른 위원님들께도 면목이 없습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이제 막 회의를 시작하던 참이었어요. 저쪽에 앉으면 되겠네.”
양성문이 티 나게 한지호를 챙겼다.
다른 정책위원들도 불만스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한지호 덕분에 양성문의 장관 자리가 유지 됐다는 사실을 모두 알기 때문이다.
진짜 목숨은 아니어도 정치 생명의 은인이니 배려해주는 게 당연했다.
한지호는 안면이 있는 자문위원들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빈자리에 앉았다.
끼이익-
그때였다.
그가 앉고 30초도 지나지 않아 닫혀있던 회의실 문이 다시 열렸다.
또 한 명의 지각생이 도착한 것이다.
놀랍게도 한지호가 절대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트레이드 마크인 무표정한 얼굴로 들어왔다.
“늦었습니다.”
감정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목소리였다.
자연스레 뿜어지는 차가운 분위기에 다들 말을 삼갔다.
그러나 양성문 장관은 다소 불만스러운 얼굴로 늦게 도착한 자문위원을 나무랐다.
“조 이사장님, 바쁘신 것은 잘 알지만 다른 위원님들도 의료계의 이사장과 병원장님들이시지요. 항상 노고에 감사드리지만, 오늘 같이 중요한 날에는 조금만 서둘러주시면 더 좋을 것 같네요.”
양성문의 지적에 회의실 안이 얼어붙었다.
특별히 강하게 비판을 한 것은 아니지만,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일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위천 한방병원의 조준혁에게 공개적으로 망신을 준 셈이었다.
조준혁은 입을 꾹 다물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양성문을 쳐다봤다.
아주 짧은 시간이 흘렀지만 팽팽한 긴장감이 터지기 직전까지 치달았다.
그 순간, 조준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주의하겠습니다.”
그가 한 발 물러섰다.
전혀 공손한 태도는 아니지만 어쨌든 양성문의 지적을 받아 넘긴 것이다.
불과 몇 분 전에 한지호가 늦게 도착했을 때와는 완전히 딴 판인 상황이었다.
당연히 지각을 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위천 한방병원의 유우선 병원장이 추위안차오를 치료하다 실패했기 때문에 양성문은 장관 자리에서 물러날 뻔 했었다.
한지호가 나서지 않았다면 양성문은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방금 전의 문책은 뼈아픈 그 사건을 복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위천 한방병원이 양성문은 물론이고 우리 정부에 큰 빚을 졌음을 잊지 말라는 경고다.
조준혁이 양성문의 경고성 질책을 받아들이자 분위기가 슬슬 풀렸다.
먼저 발언을 이어가고 있던 대학병원 학과장이 눈치껏 말을 이어갔다.
“이번에 정부에서 발표한 K-메디컬 타운 조성에는 국내 최고의 의료센터뿐 아니라 한의학 분야까지 포함하여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원스톱으로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만들 예정입니다.”
K-메디컬 타운.
생소한 이름이지만 마냥 낯설지는 않았다.
K-푸드, K-뮤직, K-드라마 등등.
정부가 앞에 K를 붙여서 한류(韓流) 열풍을 조성하려고 애쓴 일이 한 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드라마와 영화, 음악 산업을 열심히 키우던 정부가 한식 세계화에 이어 선택한 카드가 바로 K-메디컬 타운이다.
한지호도 양성문으로부터 K-메디컬 타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회의에 참석한 것이었다.
조준혁이 껄끄러울 것을 알면서 모습을 비춘 이유 역시 동일했다.
정부가 주도해 대규모 자금을 투자하는 K-메디컬 타운 사업은 놓치기 아까운 기회다.
사업에 참여하게 되면 엄청난 투자금을 받고, 한국을 대표한다는 명예와 홍보 효과를 누리게 된다.
승승장구하고 있는 원화 정의 네트워크가 명실상부한 국내 한의학계의 선두주자로 자리를 굳힐 수 있다.
반면 위천 한방병원의 K-메디컬 타운의 사업권을 따내면 지금 겪고 있는 위기를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중국에서 의료사고를 낸 유우선 병원장은 한지호 덕분에 풀려난 후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실질적 은퇴라고 봐도 무방하다.
뿐만 아니라 위천의 브랜드 가치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거액을 투자한 홍콩 센트럴 지점도 철수해야 했다.
국내에서 야심차게 시작한 한약방 프랜차이즈 사업 역시 홍콩에서의 악재 때문에 초기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한 실정이다.
한의학계에서 불패의 비즈니스 성공 신화를 써오던 조준혁이 사면초가에 처한 것이다.
조준혁은 K-메디컬 타운 사업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게 아니고서는 추락하고 있는 위천 한방병원을 되살릴 방법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이번에도 한지호에게 선수를 뺏기면 동요하고 있는 전국의 프랜차이즈 지점들이 우후죽순 위천에서 탈퇴할지 모른다.
전국의 지점들은 위천의 간판을 내리고, 그동안 꾸준히 지출하던 프랜차이즈 비용을 안 내면 그만이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지만 조준혁은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통과하는 중이었다.
이윽고 양성문이 자세한 설명을 시작했다.
“미리 들으셨겠지만, 보건복지부의 정책 자문을 맡고 있는 의료 기관에 한해 우선적으로 K-메디컬 타운 공모를 받을 예정이지요. 아직 구체적인 투자 액수와 선정 지역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의료 관광단지로 육성할 계획이니 서울에서 그리 멀리 떨어질 가능성은 무척 낮아 보이네요. 물론 서울 시내에 타운이 들어설 확률도 있어요.”
다들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평소 정책 회의 때는 마지못해 참석한 티를 팍팍 내는 자문위원들이 적지 않았다.
보건복지부와의 관계 때문에 예의상 참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수능을 앞둔 고3 수험생처럼 양성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공모 지원을 위한 서류 양식은 등록 된 메일로 일괄 발송할 예정이고, 오늘은 외부에 공식적으로 알리기 힘든 사항을 먼저 전해드리기 위한 자리이지요. 꽤 긴 시간 조건 없이 자문위원으로 활동해주신 여러분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기도 하고 말이에요.”
아직 공식적으로 알리기 힘든 사항이 뭐가 남았을까.
의료계에서 날고 기는 자문위원들은 나이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양성문의 말이 이어지기만 기다렸다.
“정부 차원의 투자 금액은 미정이지만, 한 가지 혜택은 확정이 됐지요. K-메디컬 타운에 입주하는 의료 기관에는 세제 혜택이 주어질 거라고 하니, 다들 열심히 준비해 주시리라 믿어요.”
세제(稅制) 혜택.
그 한 단어가 여러 사람의 심정을 뒤흔들었다.
보건복지부에 정책 자문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대형 의료기관 소속이다.
개인 명의의 의료기관에서 나온 자문위원들도 규모가 크고 유명한 병원의 원장들이다.
그들에게 있어 세금 감면은 실로 어마어마한 혜택이다.
정부가 합법적으로 세제 혜택을 제공하면 얼마만큼의 돈을 아낄 수 있는지 모른다.
항상 체면을 차리는 자문위원들이 눈에 불을 켜기 충분해졌다.
“그럼 나머지 안건,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주요 법안에 대한 여러분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네요.”
당근을 내민 양성문이 조련을 시작했다.
K-메디컬 타운 심사에서 양성문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게 분명하다.
아마 오늘 회의에 참석한 자문위원들은 역대급 열정을 보이며 어느 때보다 열심히 의견을 낼 것 같았다.
한지호도 질 수 없다는 듯 흐름을 살피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가끔 조준혁과 눈이 마주쳤지만 특별히 의식하지는 않았다.
모르긴 해도 회의가 끝나면 따로 말을 나눌 기회가 생길 것 같았다.
자문위원 모두에게 달콤한 기회가 주어진 날,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회의실의 공기는 여름이 지나간 게 무색할 만치 뜨거워지고 있었다.
+++
한지호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열기로 가득 찼던 정책 회의가 끝났지만 조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양성문 장관이 다음 일정을 위해 먼저 나갔고, 다른 자문위원들도 모두 회의실 바깥으로 사라졌다.
이제 남은 사람은 단 두 명, 한지호와 조준혁 밖에 없었다.
한지호는 일부러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요지부동 앉아있는 조준혁이 눈빛으로 자신을 부른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넓은 회의실 안에 둘만 남게 되자 그가 입을 열었다.
“한 원장님, 우리 유우선 병원장님을 구제해준 것부터 감사드려야겠습니다.”
조준혁이 낮게 깔린 음성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조금도 고마워하는 태도가 아니었지만, 그가 감사 인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한지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의학계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을 했습니다.”
“그 넓은 아량에는 감탄했지만, 이번 K-메디컬 타운 사업은 반드시 우리가 따낼 겁니다.”
“홍콩에서처럼 선의의 경쟁을 펼치길 기대하겠습니다. 이번에도 홍콩과 같은 결과가 나오겠지만.”
한지호의 말에 조준혁이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하지만 한지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무덤덤한 얼굴로 결정타를 날렸다.
“요즘 위천이 많이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아무쪼록 건투를 빕니다, 조준혁 이사장님.”
한지호가 정중한 태도로 조준혁의 심장에 비수를 꽂아넣은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는 조준혁이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으로 보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벽에 균열을 내고 완전히 무너트리기 직전까지 왔다.
비겁한 방법을 쓰지 않고, 오직 의술로 정도를 걸으며 한지호 스스로 이뤄낸 일이다.
조준혁은 분노를 참지 못해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한지호는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그에게 여유로운 미소를 보여주고 일어나 등을 돌렸다.
이보다 더 통쾌할 수 없었다.
K-메디컬 타운이라는 먹음직한 사냥감을 발견한 것보다 더 큰 수확을 얻은 기분이었다.
국회의사당 복도를 가로지르는 한지호의 발걸음이 깃털처럼 가벼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