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
6장, 서로의 가는 길 (2)
“앞으로가 더 중요합니다.”
기쁨의 해후를 마친 한지호는 금링링이 방심하지 않도록 주의를 줬다.
그는 거실 소파에 마주앉아 주치의로서 주의사항을 설명하는 중이었다.
“금단 증상이 해소됐고, 전반적으로 예전보다 훨씬 건강해졌습니다. 담배와 대마초 중독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확신합니다.”
“이 말이 얼마나 듣고 싶었는지 몰라요.”
금링링의 눈가가 젖어들었다.
감정 표현을 함부로 하지 않는 그녀지만, 2주 넘는 사투 끝에 중독을 이겨냈다는 기쁨은 참기 힘들었다.
하지만 한지호는 일부러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원래대로 식사를 하고, 일상 생활로 돌아가겠지만 주의가 필요합니다.”
“어떤 걸 조심해야 하나요?”
“약을 더 지어줄 테니 꾸준히 복용을 하도록 해요. 그리고 술도 멀리하는 게 좋습니다.”
“담배가 아닌 술도요?”
“지금 금링링 씨의 몸은 깨끗한 백지 상태입니다. 탁기를 빼내고 선식으로 몸을 맑게 만들었으니까. 그만큼 외부의 충격이나 자극에 더 취약해졌다는 뜻도 됩니다.”
“이해하기 어려워요. 체질이 바뀌고 건강이 좋아졌는데 자극에 약해졌다는 건 무슨 말인지…….”
“쉽게 설명해줄게요. 인간의 신체 능력이 정점에 있을 때가 언제일 것 같습니까?”
“당연히 20대 아니에요? 아니면 10대 중후반?”
금링링의 대답에 한지호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곧이어 그가 고개를 저으며 비일 아닌 비밀을 알려줬다.
“정답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입니다.”
“아기가?”
“맞아요, 아기가.”
한지호는 농담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정말 진지하게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기들의 신체 능력은 경이적인 수준입니다. 걷지도 못하는데 물에서 자유롭게 수영을 하죠. 피부, 장기, 골격 모두 완벽에 가까운 상태입니다. 다만 근력이 부족하고, 경험이 부족할 뿐이죠. 나이가 들면서 근력과 경험을 얻는 대신 완벽에 가까웠던 신체는 세상에 물들어 퇴화합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어요.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금링링 씨의 몸은 아기와 비슷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극과 극의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각별히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보호를 해야 한다는 말인 거죠?”
“그렇습니다. 이해가 빠르니 편하군요.”
“선생님이 워낙 설명을 잘 하니까요.”
금링링도 이제는 한지호를 완벽히 신뢰하고 인정했다.
그녀는 말귀를 금방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영원히 금욕 생활을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최대한 몸에 안 좋은 것들을 멀리하고, 새롭게 정화된 몸이 제자리를 잡을 때까지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알겠어요. 새겨서 들을게요.”
한지호가 또 다시 미소를 지었다.
콧대 높고 제멋대로 굴기로 악명 높은 금링링에게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한지호는 대륙의 여신이자 헐리우드에서 떠오르는 신예인 금링링을 말 한 마디로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존재가 된 셈이다.
“내일부터는 원래 회사로 복귀합니까?”
“그럴 예정이었는데 선생님이 보내줘야죠.”
“하하, 내가 안 보내주면 이 아파트에서 더 지낼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처음엔 답답해서 죽어버릴 것 같았는데 지내다보니 적응이 되는 것 같아요. 떠나면 은근 섭섭할 것 같기도 하고요.”
“녹음을 할 걸 그랬습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고마워요.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상상하기도 싫네요.”
“금링링 씨가 2주 동안 참아내고 이겨낸 결과입니다. 난 도와준 것밖에 없습니다.”
한지호는 마음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보람을 느꼈다.
환자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을 때만큼 뿌듯한 순간이 또 없다.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해 한의사가 됐는지도 모른다.
금링링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한 번 한지호에게 진심을 표현했다.
“전에 말했던 치료비 잔금은 나가자마자 바로 보낼게요. 회사에 말해서 홍콩 원화 한의원 화보를 찍는 일정도 최대한 빨리 잡겠어요. 그것만으로 이 은혜를 갚긴 부족하겠지만.”
“우리가 이렇게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눌 줄 몰랐습니다. 좋네요, 이런 분위기.”
“나도 좋아요.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진 느낌이라 기분도 상쾌한 것 같아요.”
“정신은 몸의 지배를 받으니까요.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당부하겠습니다.”
한지호는 꼭 해줄 말이 남은 듯 했다.
금링링은 귀찮아하지 않고 눈을 똑바로 맞춘 채 경청할 자세를 보였다.
“금링링 씨는 중국 최고의 스타입니다. 헐리우드에서도 활동하고 있고. 앞으로도 각종 파티와 모임, 상류층들의 행사에 참여할 일이 많을 겁니다. 그러다보면 분명 대마초의 유혹을 받게 되겠죠. 특히 미국에서는 대마초를 피는 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 않습니까.”
“그건… 그래요. 헐리우드 파티에서는 위드를 피는 게 일상적인 일이죠.”
“헐리우드의 영화 감독이나 인기 배우가 대마초를 권해도 피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한 모금이라도 들이키는 순간, 우리의 노력은 물거품이 될 거니까요.”
“그럼 또 이런 인내의 시간을 겪어야겠죠? 아니, 내가 다시 한 선생님을 만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으니……. 그렇게까지 멍청하진 않아요. 절대 유혹에 흔들리지 않을 거예요.”
금링링은 스스로 각오를 확실히 한 듯 다부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지호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서야 만족했다.
사실은 이런 말이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절대로 두 번 다시는 같은 유혹에 빠지면 안 됩니다. 치료에도 내성이 있기에 다음에는 먹히지 않을지 모릅니다.”
“명심할게요. 그리고 헐리우드의 인연을 소개해준다는 약속도 지킬게요.”
“언제든지. 금링링 씨도 내 개인 번호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에 들어왔으니까.”
한지호가 웃으며 말했다.
금링링은 거액의 치료비와 홍보 모델 활동 외에도 헐리우드 인맥을 소개해주겠다고 제의했었다.
굳이 재촉하지 않아도 알아서 자신의 말을 지킬 것 같았다.
“우린 아마 자주 보기는 힘들겠죠?”
“각자의 길을 걷다보면 분명 또 만나게 될 겁니다. 길은 하나로 통하는 법입니다.”
“우리의 길이 다시 맞닿기를 기대하고 있을게요.”
한지호와 금링링이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의료계와 연예계.
완전히 다른 길이지만, 최고의 경지에 다다르면 생각보다 빨리 같은 지점에서 만날지 모른다.
중국을 정복하고 헐리우드로 진출하는 금링링도, 한국에 이어 홍콩까지 접수하는 중인 한지호도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
금링링이 약속대로 헐리우드의 거물을 소개해주지 않더라도 분명 언젠가는 다시 부딪칠 것이다.
둘 다 그런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다.
씨익-
한지호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어쨌거나 그는 추위안차오에 이어 중국 대륙 최고의 거물을 연달아 낚아챘다.
다들 무모한 도전이라 비웃었던 홍콩 원화 한의원의 앞날에 서광이 비치고 있었다.
위천 한방병원도 홍콩에서 퇴각한 지금, 대륙에서 그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현재로서는 어마어마한 승전보를 들고 한국에서 위세를 떨칠 일만 남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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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원장님! 피곤하실 텐데 죄송합니다. 몇 가지만 여쭤보고 싶습니다.”
기자로 보이는 사람이 따라붙었다.
인천공항 입국 게이트 밖으로 나온 한지호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꽤 듬직한 덩치에 짧은 머리, 부리부리한 인상만 봐서는 기자가 아니라 경호업체 직원 같다.
하지만 말투와 태도는 열정 넘치는 신입 기자의 전형이었다.
한지호는 한 손으로 캐리어를 끌며 입을 열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오신 건지 궁금하군요. 제 개인정보가 유출되기라도 한 건지…….”
“아, 아닙니다. 오늘 밤 비행기로 홍콩에서 귀국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기다렸습니다. 아마도 국적기를 이용하실 것 같아 비행기 시간을 일일이 체크했습니다.”
“열정이 대단하시네요. 어디서 나오셨습니까?”
“일요신문의 김태현 기자입니다!”
당차게 대답하는 모습이 묘하게 마음에 들었다.
머리를 잘 써서 한지호의 귀국 시간을 유추하고, 일단 공항으로 나와서 기다린 점도 대단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만큼 활동적인 기자도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일요신문은 주간지 중 가장 영향력이 큰 정통 매체다.
피곤하긴 해도 굳이 인터뷰를 거절 할 이유가 없었다.
“좋습니다. 공항까지 오셨는데 제가 커피 한 잔 사죠. 대신 오랜 시간은 내드리지 못합니다.”
“인터뷰를 허락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원장님!”
김태현 기자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덕분에 근처에서 걸어 다니던 사람들이 한지호를 유심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 이름도 유명한 국민 한의사 한지호가 나타났다고 하니 다들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국내에서 한지호의 유명세는 웬만한 연예인을 능가한지 오래다.
어쩌면 사람들이 몰려 곤란해질 수도 있다.
“지하에 있는 카페가 조용합니다. 그쪽으로 가죠.”
“네!”
한지호는 열정은 넘치지만 아직 디테일이 부족한 김태현 기자를 데리고 공항 지하로 바삐 움직였다.
인천공항은 엄청나게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고, 그만큼 곳곳에 숨겨진 장소들이 많이 있다.
특히 주차장이나 공항 철도와 연결 된 지하에는 사람들이 잘 이용하지 않는 카페와 식당이 꽤 많다.
한지호는 한적한 카페 구석에서 김태현 기자와 마주앉았다.
김태현은 그제야 생각이 난 듯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건넸다.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기자님 열정이 대단하시네요.”
“회사에서는 사고뭉치라고 늘 불안해하십니다.”
“하하, 우리 한의원이나 네트워크 사람들이 늘 제가 무슨 사고를 칠지 불안해하는데. 비슷하군요.”
한지호가 웃음을 터트리자 분위기가 풀렸다.
김태현은 용기를 내고 궁금한 것들을 묻기 시작했다.
“다름 아니라 이번에 대륙의 여신 금링링이 홍콩 원화 한의원의 홍보 모델이 된 게 화제였습니다. 몸값도 무척 비싸고, 아무 광고나 찍지 않는 걸로 유명한 여배우가 한의원 모델을 맡은 건 최초라고……. 소문으로는 원장님께서 치료를 해주신데 대한 보답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사실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치료였는지는 환자 프라이버시를 위해 밝힐 수 없지만, 아주 성공적이었습니다. 금링링 씨와는 지금도 가끔 개인적인 연락을 주고받습니다.”
“와아! 이거는 단독 특종 감입니다. 원장님께서 금링링을 치료하셨고, 고마움을 느낀 금링링이 모델이 됐다는 걸 직접 확인한 건 제가 최초인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네요. 최근에는 가급적 인터뷰 요청을 피하고 있으니까요.”
김태현의 눈에 불꽃이 일렁거렸다.
한지호는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쁜 일정을 소화하는 사람이고, 한국에서는 더 이상 홍보가 필요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고 한의원 차원에서 보도 자료만 내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김태현은 졸지에 특종을 잡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다른 질문을 쏟아냈다.
“중국 정치계의 거물에 이어 연예계 최고 스타까지 치료하신 셈인데, 이로서 한의학으로 중국을 정복하겠다는 포부를 달성하셨다고 보십니까?”
“정복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한의학이 중국 대륙에서도 통한다는 사실은 확실하게 증명했다고 자부합니다. 유명인들을 치료한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홍콩의 현지 주민들이 신뢰를 보내며 한의원을 찾아주기 시작해서 무척 고무적입니다.”
정도를 지키면서 핵심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답변이었다.
신입 기자 김태현은 인터뷰에 도가 튼 한지호의 화술에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한 원장님, 기자 선배들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진짜 말씀을 잘 하시네요.”
“있는 그대로 꾸밈없이 말 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럼 실례가 안 된다면 한 가지만 더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서울과 홍콩에서 원화 한의원이 대성공을 거두고 있는데 또 다른 목표가 있으신지 알고 싶습니다. 이미 한의학계 전체를 대표해서 엄청난 업적을 이루셨지만, 한 원장님이라면 상상하기 힘든 도전에 뛰어드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지호가 김태현 기자의 눈을 바라봤다.
예상 이상으로 그의 내면을 자극하는 질문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는 흥미롭다는 듯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당분간 원화 한의원을 확장할 계획은 없습니다. 물리적으로 서울과 홍콩을 오가는 게 한계이니까요. 그렇지만 다른 방식으로 전세계에 한의학을 알리고 싶습니다.”
“전세계에 한의학을 알리고 싶다는 것은 어떤 뜻이신지…….”
“유명한 가수들은 월드 투어를 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세계 각국을 다니며 한의학으로 치료를 할 수 있다면 참 의미 있는 일이겠죠?”
월드 투어(World Tour).
세계 최정상의 가수들에게만 허락된 특권이지만, 한지호는 한의학 월드 투어를 꿈꾸고 있었다.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니다.
금링링이 소개해줄 헐리우드의 관계자는 그 꿈의 다리가 되어줄 것이다.
문재영과 바이룽도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으니 본진인 두 곳의 한의원도 맡길 수 있다.
한지호는 김태현 기자가 입을 떡 벌리는 광경을 보며 시원하게 웃었다.
그는 언제든 더 넓은 세계로 달려갈 준비가 돼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