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
6장, 서로의 가는 길 (1)
한지호는 진료를 마치고 근처의 일식집으로 향했다.
역삼역 근처에는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기 좋은 식당들이 많이 있다.
드르륵-
그는 예약을 해둔 일식집에 들어가 따로 마련 된 룸의 문을 열었다.
좌식 방 안에는 먼저 도착한 조기운이 앉아있었다.
“형님.”
조기운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지호를 맞이하려 했다.
한지호는 손짓으로 그를 앉히고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표정이 그리 밝지는 않았다.
한의원에서 조기운이 독립을 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환자의 예약이 잡혀 있었기에 오래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그래서 진료가 끝나자마자 다른 일정을 미루고 조기운과 마주앉은 것이다.
“이렇게 둘이서 같이 밥 먹는 것도 오랜만이다.”
“옛날 생각도 나고, 좋습니다.”
“그러게. 불광동에서 같이 뚝배기 먹던 때 생각이 나네.”
한지호는 조기운이 의경으로 복무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세상물정 모르고 파릇파릇하기만 했던 조기운이 어느새 이만큼 성장했다.
곧이어 미리 주문해둔 신선한 사시미와 일식 요리가 한 상 가득 차려졌다.
둘은 젓가락질을 하며 편하게 그동안의 근황을 털어놓았다.
앉자마자 독립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바로 이야기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홍콩 상황은 좀 어떠신가요?”
“환자들이 많이 늘어났어. 고액의 치료비를 부담스러워하지 않는 현지 부자들의 예약이 폭증했지.”
“역시 런런런과 유대성 씨의 역할이 컸겠네요?”
“초기 홍보에는 런런런 멤버들이 큰 도움이 됐지만, 실질적인 VIP 환자 증가는 추위안차오 조직부장을 치료한 다음 늘어난 것 같아. 공산당의 고위 간부를 치료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홍콩 부자들이 우리 한의원을 신뢰하기 시작했나봐.”
“하긴, 깐깐한 사람들이니 연예인보다는 정치인을 치료한 걸 더 높이 평가했을 것도 같습니다.”
“넌 좀 어때?”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던 한지호가 예상 못한 타이밍에 훅 치고 들어갔다.
젓가락으로 참치 뱃살을 집던 조기운이 눈을 크게 떴다.
한지호는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직 어수룩한 모습이 남아있는 게 보기 좋았기 때문이다.
“독립 말이야, 독립. 뭘 어떻게 독립해서 일을 할지 계획은 세워 놓았겠지?”
“아…… 네, 형님. 미리 말씀드리고 상의를 했어야 하는데, 너무 바쁘셔서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우리 사이에 죄송하다는 말은 쓰지 말자. 그럴 사이 아니잖아.”
“네.”
“젓가락에 든 참치 먹으면서 들어. 혼 내는 자리 아니니까 긴장하지 말고.”
한지호는 조기운이 부담을 느끼지 않게끔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물론 조금 서운하긴 했지만, 동생이 오래 고민하고 독립을 준비했다면 응원해줄 작정이었다.
다만 어떤 길을 가려는지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다.
“니가 계획한 것들이 뭔지 말해봐. 독립을 하더라도 나랑 남남이 되려는 건 아닐 거잖아?”
“형님, 그런 건 절대 절대 아닙니다. 만약 형님께서 독립 생각 하지 말고 계속 한의원 일을 도우라 하시면 무조건 따를 겁니다.”
“그냥 듣고 싶어서 그래. 내 동생이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그리고 내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궁금하니까.”
한지호는 자연스럽게 진심을 전했다.
조기운의 독립을 응원하겠다는 뜻을 넌지시 표현한 것이다.
청우단 판매를 담당하며 조기운도 눈치가 많이 늘었다.
금방 한지호의 말뜻을 알아들은 그는 감격한 듯 목소리를 떨었다.
“지호 형님…….”
“닭살스럽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네!”
이내 마음을 가다듬은 조기운이 어렵게 세운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에스코트 전문 회사를 설립하려 합니다. 이미 투자를 결정해주신 분도 있습니다.”
“에스코트 전문 회사?”
“경호 회사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그러나 기존의 경호, 용역과는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VIP 중심의 회사입니다. 형님께서 원화 한의원을 성공적으로 운영하시는 것을 보고 많은 영감을 얻었습니다.”
“레드 오션인 건 알고 있지?”
조기운의 말을 들은 한지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에스코트 전문 회사라고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경호 회사를 차리겠다는 것이다.
그 바닥이 얼마나 험한지, 그리고 진입 장벽이 높은지는 전문가가 아니라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다행히 조기운은 아무 생각 없이 진로를 결정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한지호의 지적에 곧바로 답을 내놓았다.
“우선 철거 현장에 사람을 투입하는 용역 회사를 만들려는 건 아닙니다. 연예인, 정치인, 재계 VIP들의 공식 행사뿐 아니라 비공식 사생활 영역까지 관리해주는 전문 경호 회사를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그 쪽도 레드 오션인 건 마찬가지일 텐데. 이미 거래처를 잡아놓은 다른 경호회사들을 어떻게 제치고 들어가려고?”
“청우단을 판매하며 알게 된 분이 있습니다. 엔터 회사에 계셨던 분인데, 함께 투자하며 그쪽 거래선을 뚫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에스코트 전문 업체라고 말씀드린 건 단순한 경호 업체와는 다른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서비스?”
“공석과 사석에서 경호를 하는 건 물론이고, 고객의 모든 요구를 맞춰서 들어줄 수 있습니다. 통역과 경호가 동시에 가능한 직원, 일일 비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직원, 개인 포토그래퍼가 되어줄 수 있는 직원 등 모든 영역의 서비스를 경호와 함께 제공할 생각입니다.”
“아이디어는 좋은데? VIP들, 특히 비공식 사석에서는 많은 인원이 따라붙는 걸 부담스러워 할 테니까. 경호원이 다른 서비스까지 제공할 수 있다면 다들 반기겠지. 그렇지만 문제는…….”
“문제는 이런 역량을 가진 직원을 선발할 수 있는가, 아니겠습니까.”
“맞아.”
한지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조기운이 한지호 옆에서 놀고먹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러 임무를 수행하며 한지호가 어떻게 일을 진행하는지 눈 여겨 봤었다.
그렇기에 어떤 방식으로 계획을 짜고, 일을 추진하는 것이 좋은지 터득한 것이다.
“처음부터 원하는 인재들을 선발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대신 자체 교육에 그만큼 투자하기로 방침을 정했습니다.”
“교육 비용과 시간이 만만치 않겠다. 쉽지 않은 거 알고 있지?”
“네, 형님. 그냥 돈만 많이 벌기 원한다면 번화가에 프랜차이즈 식당이나 카페, 술집을 여는 게 가장 빠른 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통해서 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증명해보고 싶습니다. 또 저처럼 기회를 박탈당한 후배들을 어엿한 사회인으로 키우고 싶은 욕심도 있습니다.”
조기운은 아주 오래 고민을 한 모양이다.
결코 가볍지 않은 마음이 담겼다는 게 느껴졌다.
체육 전공자 출신인 조기운은 가난하다는 이유로 정당한 기회를 얻지 못했었다.
에스코트 전문 회사를 만들어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후배들을 경호원으로 뽑고, 그들을 교육해서 다양한 서비스를 할 수 있는 인재로 키우는 건 사회적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성공하기만 한다면 경호 업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킬지 모른다.
한지호는 조기운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을 쳐다보는 게 아니었다.
반짝이는 눈동자 너머, 조기운이 스스로 개척 할 미래를 그려보는 것이다.
“기운아, 어쩌면 내 울타리 안에서 너의 가능성을 묶어두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닙니다, 형님. 그런 말씀은……. 형님이 저를 알아봐주시지 않았다면 지금도 희망 없이 노가다 판을 전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네 가능성을 알아. 너의 독립, 막을 수 없겠다.”
“감사합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나도 니가 만들 회사에 투자자로 참여해도 되겠지? 비용이 많이 들 테니 좋은 분들도 소개해 줄게.”
“형님… 그렇게까지…….”
“오해하지 마, 의리나 우정 때문이 아니다. 될 것 같은 사업이니 투자를 하는 거야. 이제부터는 형 동생 이전에 투자자와 사장이 되는 거지.”
“저도 인정에 호소하지 않고 당당하게 제 사업을 일궈 보겠습니다.”
“그래, 이런 날 한 잔을 안 할 수가 없지.”
한지호는 종업원을 불러 소주와 맥주를 시켰다.
다른 좋은 술도 많지만, 새로운 결의를 하는 날에는 역시 소맥이 진리다.
그는 진심으로 조기운의 출발을 응원해줬다.
뒤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며 동생이 개척하는 길을 지켜볼 것이다.
황만금이 그에게 투자해서 원화 한의원을 열 수 있었던 것처럼, 이제는 한지호가 가능성을 지닌 누군가에게 투자 할 위치에 올랐다.
“기분 좋다, 진짜로.”
한지호는 서운함보다 더 큰 기쁨을 느꼈다.
자신만의 길을 걷겠다고 선언한 조기운이 거물이 될 거라 확신했다.
소맥 한 잔을 시원하게 말아준 한지호가 잔을 높이 들었다.
“자룡, 아니 기운아! 너의 미래를 위하여!”
“위하여!”
두 사람이 건배를 하고 단숨에 폭탄주를 털어 넣었다.
같은 길에서 갈라지게 된 의형제의 앞날이 어떻게 펼쳐질지 사뭇 기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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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이 바뀌었다.
몇 시간 전까지 서울의 도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홍콩의 야경이 그를 반긴다.
아무렇지 않게 해외를 다니며 시공간의 제약을 극복하는 삶.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경험이 한지호에겐 일상이었다.
그는 다시 홍콩에 도착해서 리펄스 베이로 가는 길이다.
서울에 있는 동안 바이룽으로부터 몇 통의 메시지를 받았었다.
금링링이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 알리는 메시지였다.
그러나 그 이상의 다른 연락은 없었다.
금링링이 아파트 밖으로 뛰쳐나갔다면, 혹은 심각한 문제를 겪었다면 바이룽은 메시지 대신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한지호는 치료 결과를 낙관하고 있었다.
그녀가 끝까지 버텼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금단 증상에서 벗어나 중독의 고리를 끊는 단계까지 도달했을 것 같았다.
자세한 건 금링링을 직접 봐야 알 수 있다.
차에서 내린 한지호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엘리베이터에 탔다.
자신의 아파트에 캐리어만 넣어둔 그는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순식간에 계단을 거슬러 위층에 도착한 한지호는 잠깐 숨을 골랐다.
이제 초인종을 누르기만 하면 금링링이 문을 열어줄 것이다.
나흘 만에 만나는 그녀가 과연 어떤 모습일지 기대가 컸다.
딩동-
한지호가 벨을 눌렀다.
번호키 비밀번호를 알고 있지만 늦은 시간이라 먼저 초인종을 누른 것이다.
고작 몇 초에 불과한 시간이 영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곧이어 안에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드르륵-!
잠금 장치가 풀리고, 굳게 닫혀있던 현관문이 활짝 열렸다.
문이 열린 틈으로 시원하게 쭉 뻗은 실루엣이 보였다.
금링링이다.
그녀가 언제나처럼 얇은 슬립만 입고 말없이 서있었다.
한지호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눈빛과 표정만 보고 뜻이 통하는 중이었다.
이윽고 무겁지 않은 침묵을 깨고 한지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금링링 씨.”
“다시 보네요, 선생님.”
“이겨냈군요.”
“그래요. 이겨냈어요, 힘들었지만.”
한지호가 기대하고 믿었던 것처럼 그녀는 힘든 시간을 버텨냈다.
약물의 탁기는 이미 다 빼놓았고, 문제는 금단 증상이 해소될 때까지 참을 수 있느냐 였다.
결코 쉽지 않았을 혼자만의 싸움을 잘 이겨낸 금링링의 얼굴색이 한창 밝아 보였다.
선식과 한약의 효과로 피부도 맑아지고 혈색도 훨씬 좋아진 것이다.
한지호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대뜸 손목을 잡았다.
물론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라 진맥을 하려는 것이다.
둥- 두둥- 둥-
손끝으로 전해지는 맥이 아주 고르고 안정적이다.
한지호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은 채 이가 보이도록 환하게 웃었다.
“축하합니다.”
샴페인도, 축포도 없지만 그의 말이 금링링에게 무엇보다 큰 위로가 됐다.
따로 또 같이 2주간의 고비를 넘은 한지호와 금링링은 시간이 멈춘 듯 서로를 보며 계속 웃기만 했다.
함께 고생을 했기 때문인지 둘 사이에 끈끈한 전우애 비슷한 게 흐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