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79화 (179/255)

# 179

5장, 금단의 끝 (3)

“달라진 게 느껴집니까?”

진료 도중에 전화를 받고 급히 달려온 한지호가 질문을 던졌다.

그는 속옷만 입고 엎드린 금링링의 전신에 침을 놓은 다음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뒤통수부터 발가락 끝까지 침을 맞은 금링링은 엎드린 채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 그녀는 속옷만 입은 몸을 보여주는 것도, 전신에 침을 맞는 것도, 그리고 약물로 인한 탁기가 배출되는 것까지 적응이 됐다.

“뭐가 달라졌어요?”

금링링은 잘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하긴 정신이 없을 법 했다.

급격히 심화 된 금단 증상으로 괴로워하다 한지호가 찾아와서 겨우 안정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금단 증상의 정도가 그제나 어제보다 심해서 혈도를 누르는 것만으론 해결이 안 됐다.

결국 하루에 한 번 펼치는 기경팔맥 해독 침술을 일찍 시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지호는 긍정적인 변화를 감지했다.

그가 누워있는 금링링을 내려다보며 설명을 해줬다.

“냄새가 덜 나는 것 같습니다. 어제와 비교해도.”

“어? 그러고 보니 정말…….”

금링링이 눈을 반짝였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악취의 강도가 훨씬 약해진 것 같았다.

여전히 땀구멍에서 보기 흉한 검은 액체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색깔도, 냄새도 모두 일주일 전 처음으로 침술을 펼쳤을 때보다 많이 개선됐다.

그만큼 금링링의 몸 안에 탁기와 불순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치료가 잘 되고 있음을 눈과 코로 확인한 금링링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불과 10분 전까지 몸은 물론이고 영혼을 옥죄는 금단 증상으로 괴로워하던 얼굴에 희망이 피어난 것이다.

한지호도 계속해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매일 차도를 체크했지만, 오늘은 특별히 예후가 더 좋았다.

의사, 중의사, 그리고 한의사.

분야를 막론하고 자신의 치료가 통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 가장 행복해하는 사람들이다.

한지호는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희열을 느꼈다.

“10분 더 있다 침을 뽑겠습니다.”

“선생님, 악취가 약해졌다면 지금 느끼는 금단 증상도 점차 약해지겠죠?”

“그럴 겁니다, 반드시.”

한지호가 전에 없이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그는 확신에 찬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나 혼자 이뤄낸 게 아닙니다. 금링링 씨가 선식과 한약을 잘 챙겨먹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았기에 여기까지 온 겁니다. 이제 고지가 눈 앞입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힘을 냅시다.”

진정성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금링링도 살짝 감동을 받은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지호는 그녀의 옆에서 시간을 재며 불순물이 배출되는 광경을 지켜봤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혐오스러울지 모른다.

그러나 환자의 치료 과정을 지켜보는데 감정이 개입 될 여지는 없다.

기쁨을 억누르고 주치의의 입장으로 돌아가 시간을 보낸 한지호는 조심스레 침을 뽑았다.

침이 뽑히는 것처럼 금링링을 괴롭히는 금단 증상도 뿌리째 뽑히기를 바랐다.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지가 멀지 않은 것만은 확실했다.

+++

한지호는 다시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

홍콩에서의 진료가 끝났고, 서울 행 비행기를 타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서울에서 4일을 보낸 다음에야 또 홍콩으로 오게 된다.

원래 정해진 스케줄이다.

하지만 한지호는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비행기 출발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았음에도 아직 레지던시 아파트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아파트가 아니라 위층에서 금링링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선식 먹었죠?”

“먹었어요.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티도 안 날 만큼 적은 양이지만.”

“그래도 익숙해지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래요.”

금링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철저하게 해독을 위해 만들어진 한지호 표 선식은 웬만한 다이어트 식단의 뺨을 후려친다.

양이 적고 맛도 좋지 않다.

천연 재료와 약초들을 거의 가공하지 않고 만들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연예계에 데뷔한 이후 내내 다이어트를 해온 금링링도 적응하기 힘든 식단이었다.

하지만 몸을 길들이라는 한지호의 말대로 그녀는 선식을 거르지 않았다.

답답할 텐데 아파트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처음의 걱정과 달리 한지호가 정해놓은 원칙을 충실히 지킨 것이다.

“아마 오늘 밤, 그리고 내일이 지나면 금단 증상도 한 풀 꺾일 겁니다.”

“정말 그렇겠죠?”

“확실합니다. 나를 믿어요.”

“지금껏 선생님이 한 말대로 다 됐으니까요. 그런데 오늘과 내일이 걱정이네요. 나 혼자 견딜 수 있을지…….”

금링링이 말끝을 흐렸다.

한지호가 홍콩에 없을 때는 바이룽이 그녀의 상태를 체크한다.

하지만 그녀는 한지호를 훨씬 더 신뢰하고 있다.

바이룽도 한지호에게 배운 해독 침술을 펼칠 수 있지만 아무래도 차이가 느껴질 것이다.

게다가 오금희를 이용한 지법(指法)으로 금단 증상의 고통을 다스리는 건 한지호만 가능하다.

금링링이 불안해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그녀는 지난 며칠 동안 주기적으로 금단 증상에 시달렸었다.

그때마다 한지호가 달려오지 않았다면 고비를 넘기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오늘밤부터는 한지호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

한지호도 금링링이 불안해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고 천천히 말했다.

“약물로 쌓인 탁기가 거의 다 빠져나간 건 금링링 씨도 확인했죠?”

“네.”

“그 빈자리를 선식과 한약의 좋은 기운으로 채워 넣고 있다는 것도 알겠죠?”

“알아요. 피부가 많이 좋아졌고, 몸도 엄청 가벼워졌으니까요.”

“금단 증상은 길어야 이틀 더 지속될 겁니다. 막바지에 다다랐으니 내가 없어도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래도… 여기 이틀만 더 있으면 안 되나요?”

금링링은 마치 떠나려는 남자 주인공을 붙잡는 여주인공처럼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배우는 배우다.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연기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한지호는 금링링이 진심으로 걱정한다는 것을 믿었다.

그녀는 스스로의 의지로 금단 증상과 싸우고 있다.

그가 자연스레 금링링의 새하얀 손을 꽉 붙잡고 다독였다.

“하루나 이틀은 내가 없이도 견딜 수 있을 겁니다. 불가능한 일이라면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겠죠. 하지만 힘들어도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알기에 금링링 씨를 믿는 겁니다.”

“나를… 믿어요?”

“당연하죠. 환자가 의사를 믿는 게 중요한 것처럼 의사도 환자를 믿어야 합니다. 금링링 씨는 내게 믿음을 주는 환자가 됐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아니었지만.”

웃음기를 머금었지만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한지호의 말에 금링링이 자극을 받은 듯 입술을 세게 다물었다.

그가 서울에 있는 동안 혼자서도 금단 증상을 버티고 말겠다는 표정처럼 보였다.

“그럼 비행기 시간 때문에 이만 가보겠습니다.”

한지호는 금링링의 손을 놓고 인사를 건넸다.

4일 뒤면 다시 이곳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4일이란 시간이 절대 짧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중독 치료가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가 남은 4일 안에 결정이 날 것이기 때문이다.

“힘내고 있을게요. 여기서 한 발짝도 안 나가고요.”

“한결 나아진 모습으로 보겠군요, 4일 뒤에는.”

“나도 꼭 그랬으면 좋겠어요.”

한지호는 금링링을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녀도 아주 오랜만에 활짝 웃고 있었다.

이제 정말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비행기를 놓칠 수도 있다.

몸을 돌려 아파트 현관문을 닫고 나온 한지호는 잠시 멈춰서 한숨을 쉬었다.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도 무척 금링링이 걱정 됐다.

결승선이 눈앞에 보이는데 혹시 그녀가 포기하지 않을까, 금단 증상을 못 이기고 공든탑을 허물지 않을까 신경이 쓰이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스스로 말한 것처럼 환자를 믿어야 한다.

최종 관문은 금링링 스스로 넘어서야 앞으로 다시는 대마초나 담배를 찾지 않을 것이다.

‘믿어 보겠습니다, 진심으로.’

한지호는 닫힌 현관문을 향해 속마음을 전했다.

항상 한국에 갈 때는 설레고 기뻤는데 이번엔 좀 달랐다.

얼른 홍콩으로 돌아오고 싶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원장님, 금링링 씨가 무척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제가 침을 놓고 응급 처방을 했지만 금단 증상이 쉽게 가라앉지 않습니다. 제 앞에서도 비명을 지르고 침대 커버와 이불을 손으로 뜯을 만큼 스트레스가 극심합니다. 이대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

바이룽이 홍콩에서 메시지를 보냈다.

서울 원화 한의원에서 진료를 하던 한지호의 낯빛이 어둡게 물들었다.

세상이 좋아져서 메신저 하나만 깔면 홍콩에서 보낸 메시지를 즉각 확인할 수 있다.

돈도 들지 않는다.

그러나 뛰어난 IT 기술 덕분에 더 답답해지는 경우도 존재한다.

서울에서 환자들과 약속을 지켜야하는 한지호는 바이룽의 메시지를 읽고 발만 동동 굴릴 수밖에 없었다.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쉰 한지호가 짬을 내어 바이룽에게 답장을 전송했다.

- 잘 이겨낼 겁니다. 지금으로선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요. 금링링 씨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기거나 증상을 못 이기고 아파트 밖으로 나가면 알려주세요. 그게 아니면 그냥 지켜보시면 됩니다. -

메시지를 보낸 한지호의 복잡한 심경에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돌려서 말했지만 진짜 큰 문제가 아니면 일일이 보고를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서울에서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에 괜히 마음만 어지러워진다.

이틀이 지나고 늦은 밤 비행기로 홍콩에 간다.

한지호의 예상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때쯤 고비가 끝나 있을 것이다.

억지로라도 시간을 재촉하고 싶었다.

“조 간호사님, 지금 잠시 브레이크죠?”

“네, 원장님. 다음 환자분 30분 뒤에 예약 잡혀 있으세요. 그리고 조기운 실장님과 약속 있으십니다.”

“맞다, 기운이 들여보내주세요.”

그는 내선 전화로 간호사와 이야기를 하며 조기운과의 약속이 있었음을 기억해냈다.

똑똑-

곧이어 조기운이 노크를 하고 원장실로 들어왔다.

처음 만났을 때는 어수룩한 의경이었던 조기운은 점점 자신만의 색깔을 확립하는 중이었다.

청우단 판매를 전담하며 인맥도 늘어났고, 그만큼 대인관계나 처세술도 좋아졌다.

한지호의 특명을 받고 지방을 돌아다닌 끝에 위천 한방병원의 약점을 파악한 것도 조기운에게 큰 경험이 됐다.

실제로 조기운이 알아낸 정보가 위천을 공략하는데 쏠쏠하게 쓰였다.

위천이 한약방 사업을 추진하는 것, 그리고 병원장 유우선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 모두 조기운이 지방에서 고생하며 캐낸 값진 소식이었다.

“너무 멋있어지는 거 아냐? 조기운!”

한지호는 정장을 차려입은 조기운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치며 환하게 웃었다.

운동선수 출신답게 탄탄한 몸에 정장을 갖춰 입으니 어디서도 빠지지 않을 포스가 흘러나왔다.

정작 조기운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아닙니다, 형님. 아직 촌티를 못 벗었습니다.”

“촌티는 무슨. 그런데 무슨 일이야? 나중에 신사동 집으로 찾아와도 될 텐데.”

“사적인 이야기가 아니라서 형님 댁이 아닌 한의원에서 말씀드려야 될 것 같았습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조기운의 태도가 사뭇 진지했다.

한지호도 표정을 바꿨다.

하긴 조기운이 그냥 잡담이나 하려고 진료 시간 도중에 약속을 잡진 않았을 것이다.

“일 때문에 할 이야기가 있어?”

한지호의 물음에 조기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한지호는 가만히 그가 본론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호흡을 가다듬은 조기운이 폭탄 선언을 했다.

“형님께서 허락해주신다면…… 독립을 하고 싶습니다.”

불광동 주택 철거 현장에서 발견한 원석이자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든든한 오른팔, 조기운.

한지호를 대신해 험하고 궂은일을 묵묵히 맡아준 의동생이 독립을 원한다.

“독립?”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기에 한지호는 조기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또 한 번 변화의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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