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78화 (178/255)

# 178

5장, 금단의 끝 (2)

철커덕!

급히 문을 열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선 한지호는 석상처럼 굳었다.

처녀 귀신, 아니 금링링이 거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끼야아- 미쳐버릴 거 같잖아!”

그녀는 한지호가 들어온 줄도 몰랐다.

한 번 더 비명을 지르며 손톱으로 멀쩡한 가죽 소파를 벅벅 긁었다.

긴 생머리는 묶지 않아 제멋대로 풀어 헤쳐진 상태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영락없이 미친 여자로 생각할 것이다.

불이 꺼져 있었다면 섬뜩한 귀기를 뿜어내는 처녀 귀신으로 오해 했을지 모른다.

“금링링 씨.”

한지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낮은 목소리였지만 오금희의 내공이 실려 있어 묵직한 힘이 느껴졌다.

그제야 금링링은 한지호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어? 언제부터?”

“방금 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녀는 발광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 게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내 몸 안에서 뭔가 치밀어 오르는 듯 고운 아미를 찡그렸다.

원래도 이목구비가 강한 금링링이 인상을 쓰자 정말 영화 속 악녀가 현신한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좋아요? 오늘 오후부터 미쳐버릴 것 같았어요.”

말을 하는데 호흡이 가쁘다.

그만큼 금단 증상이 그녀의 몸을 힘들게 만들었다는 뜻이다.

한지호는 천천히 금링링에게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전부 정상적인 과정입니다.”

“정상? 이게 정상이에요? 미친년처럼 발광을 하고 있는 걸 나도 알겠는데!”

“이전보다 금단 증상이 더 심해졌을 겁니다.”

“그래요. 아까부터 벌레들이 온 몸을 기어 다니는 것 같아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고요!”

“침술로 탁기를 많이 배출시켰으니 남아있는 약물의 기운이 그만큼 격렬하게 반항을 하는 거죠.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다시 중독의 쇠사슬에 묶여야만 합니다.”

“알아요, 다 아는데…… 그래도 미칠 것 같은 걸 어떡해요?”

금링링의 눈동자에 눈물이 살짝 고여 있었다.

표독스러운 표정을 짓고 이리저리 날뛰지만, 가장 괴로운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 자신이다.

약물 중독의 금단 증상은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을 선사한다.

담배만 끊으려고 해도 정상적인 생활을 못 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런데 금링링은 심각한 흡연자였고, 대마초에도 강하게 중독된 특이 체질이다.

그녀가 느끼고 있을 이질적인 고통은 주치의 한지호도 100% 짐작하기 힘들었다.

질병으로 인한 통증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괴로움이기 때문이다.

일단 당장의 증상을 완화시키지 않으면 공든 탑이 무너질 수 있다.

어느새 금링링의 코앞까지 다다른 한지호가 두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나를 믿어요.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게 해줄 테니까, 우선 한 숨 돌리고 봅시다.”

한지호가 금링링을 소파에 앉혔다.

거의 반 강제로 그녀를 소파까지 밀어붙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행히 금링링은 아직까지 통제 불능 상태에 접어들진 않았다.

이런 상태로 방치 됐다면 누가 와도 말릴 수 없는 패닉에 빠졌을 것이다.

한지호는 소파 옆에 앉은 금링링의 손목을 잡았다.

우선 맥부터 확인해야 한다.

그녀의 거친 숨소리에 방해 받지 않고, 짧고 굵게 진맥을 하는 게 순서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한지호는 맥이 전해주는 정보를 놓치지 않았다.

진맥이야말로 한의학의 뿌리다.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그가 손가락을 세웠다.

한지호의 손가락 끝에는 벌써 오금희의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금링링의 몸 곳곳을 손가락으로 강하게 눌렀다.

“어멋?”

금링링은 놀랐지만 몸을 빼지 않았다.

한지호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 치료라는 걸 믿게 됐기 때문이다.

꾸욱- 꾸우욱-

처음에는 팔과 쇄골 아래의 혈도를 눌렀고, 곧이어 그녀의 몸을 돌려 척추를 따라 기경팔맥을 자극했다.

물의 힘으로 사람을 안정시키는 오금희 녹공(鹿功)이다.

녹공을 바탕으로 지법(指法)을 펼치면 오장육부 중에서 신장이 반응을 한다.

신장이 기운을 받으면 빠른 속도로 몸의 밸런스를 되찾게 된다.

임시방편이긴 해도 금단 증상으로 고통스러워하던 금링링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어때요? 조금 괜찮아지지 않습니까?”

“아직, 아직 잘 모르겠어요.”

“내 손을 잡고 있어요. 곧 나아질 겁니다.”

한지호는 두 손으로 금링링의 하얀 손을 꽉 잡아줬다.

손을 잡아주는 것의 의학적 효과는 이미 여러 논문으로 검증이 됐다.

병상에 누운 환자들이 괜히 보호자의 손을 잡길 원하는 게 아니다.

주치의나 보호자의 손을 잡으면 따뜻한 체온이 교환되고, 심리적으로 기댈 곳이 생기면서 멘탈이 안정 되는데 영향을 끼친다.

“같이 심호흡을 합시다. 코로 숨을 마시고, 깊이… 깊이. 그리고 입으로 내쉬는 겁니다. 아주 천천히. 나랑 같이 해요.”

“어떻게요?”

“이렇게. 스으읍- 후우우우우-.”

한지호는 시범을 보이며 금링링과 함께 복식호흡을 했다.

운기조식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제대로 복식호흡을 하는 것도 안정을 취하는데 도움이 된다.

다행히 그의 노력이 통했는지 금링링의 안색이 점점 정상으로 돌아왔다.

빨갛게 달아올랐던 얼굴빛이 원래 TV에서 보던 고운 흰색으로 회복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좀… 덜 간지러워요.”

“간지러웠습니까?”

“뭐랄까, 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것 같다고 했잖아요. 간지러우면서도 아프고, 속이 쪼그라들고, 당장 하나 말아서 피우면 다 해결될 것 같고요. 그랬었어요.”

“지금은요?”

“지금도 속이 답답하긴 마찬가지에요. 그래도 아까처럼 못 견뎌서 소리를 지르고 보이는 걸 다 부수고 싶진 않아요.”

금링링의 말을 들은 한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의 고비는 넘겼다.

아마 오늘부터 본격적인 금단 증상이 발현되는 모양이다.

한지호가 예상한 것보다 며칠 빨랐지만, 그래도 제 때 상태를 체크할 수 있어 다행스러웠다.

만약 몇 시간이나 하루 늦게 홍콩에 왔다면 금링링이 버티지 못하고 뛰쳐나갔을지도 모른다.

금링링도 방금 전까지 비정상적이었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 정말 이겨낼 수 있을까요? 사흘 동안 침을 맞으며 몸에서 이상한 것들을 많이 빼냈고, 선생님이 없는 동안에도 선식과 한약을 꼬박꼬박 잘 챙겨먹었는데도 이렇게 힘들어서…….”

그녀가 어울리지 않게 의기소침해 보였다.

한지호는 일부러 금링링과 눈을 똑바로 맞춘 채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더 힘들어질 겁니다. 괜찮을 거라는 거짓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이 시기를 버티면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자유…….”

“언제 공안에게 적발되어 모든 것을 잃고 감옥에 끌려갈지 걱정하지 않아도 될 자유 말입니다.”

금단 증상 때문에 흔들리던 금링링의 눈동자에 초점이 생겼다.

자유라는 말이 주는 달콤함이 당장의 고통보다 강렬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지호는 진정성을 담아 말을 이었다.

“만약 나가고 싶다면 언제라도 문을 열고 나가면 됩니다. 알다시피 어떤 제약도 해두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을 왜 해요?”

“사실을 직시하자는 겁니다. 홍콩 시내에서는 대마초를 구하는 게 어렵지 않다죠.”

“리펄스 베이 뒷골목의 클럽에만 가도 당장 살 수 있어요.”

“그럼 됐네요. 난 최선을 다해 금링링 씨를 돕겠지만, 결국 본인의 의지로 이겨내야 합니다. 지금 여기를 박차고 나가서 대마초를 피운다 해도 말릴 수 없습니다.”

“말리지 않겠다고요?”

“도와주는 것과 강제적으로 붙잡는 건 다르지 않습니까. 전자는 주치의가 할 수 있는 영역이지만, 후자는 아닙니다. 그렇게 억지로 치료해봤자 기회가 되면 다시 중독에 빠지고 말 겁니다.”

한지호는 단호했다.

우선 심각한 금단 증상을 완화시킨 후 금링링의 의지를 묻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중독을 극복하겠다는 환자 자신의 의지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금링링은 사뭇 심각해진 얼굴로 한지호를 쳐다봤다.

그냥 바라보는 게 아니라 노려보는 것 같았다.

한지호도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으음.”

금링링은 새빨간 입술을 피가 나도록 강하게 깨물었다.

정말 영화 속에서 한이 서린 처녀 귀신 연기라도 하는 듯 했다.

“이 손을 잡으면 내가 끝까지 도와주겠습니다. 홍콩에 있는 동안 전화를 하면 최대한 빨리 여기로 올게요.”

“생각했던 것보다 더 힘들어요. 내가 이걸 견딜 수 있을까요?”

“답은 금링링 씨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봐요. 정말 중독에서 벗어나고 싶은지, 아니면 이 기회를 놓쳐도 상관없는지.”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혈도를 자극해 금단 증상을 억눌러놨지만, 그녀는 곧 다시 버티기 힘든 괴로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한지호는 한 손을 내밀고 가만히 서있었다.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재촉을 하지도 않았다.

째깍, 째깍-

거실 벽에 걸린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만 들렸다.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한지호는 금링링이 어떤 선택을 내릴지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 순간, 그녀가 가느다란 팔을 내밀어 한지호의 손을 잡았다.

“계속 도와줘요.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해요, 난.”

금링링의 의지가 이겼다.

한지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치료가 끝나는 날, 금링링 씨는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게 될 겁니다.”

단순히 진정만 시킨 게 아니라 환자의 의지를 이끌어낸 한지호는 좋은 결과를 확신했다.

오늘부터 홍콩에 머무는 동안 최선을 다하면 다음 주에는 이 싸움의 끝이 날 것 같았다.

+++

우웅- 우우웅-

주머니에 넣어둔 스마트 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한지호는 살짝 폰을 꺼내 누가 전화를 걸었는지 확인했다.

그가 예상한 대로 금링링의 이름이 폰 화면에 떠올라 있었다.

그녀가 금단 증상으로 괴로워한다는 신호다.

한지호는 금링링 때문에 홍콩 원화 한의원에서 진료를 하는 중에도 폰을 진동으로 해두었다.

원래라면 무음으로 해두고 쉬는 시간 외에는 폰을 보지 않는다.

“자, 됐습니다. 지어드린 약 잘 챙겨 드시고 다음번에는 건강하게 뵙겠습니다.”

한지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마주앉은 환자에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통역 담당 직원이 그의 말을 중국어로 바꾸어 전해줬다.

기분 좋게 환자 한 명의 진료를 끝낸 그가 바이룽을 불렀다.

“원장님, 부르셨습니까?”

한지호가 다음 환자 대신 자신을 호출하자 바이룽이 놀란 눈을 하고 진료실로 들어왔다.

다른 큰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바이룽의 역할이 꼭 필요한 순간이었다.

“금링링 씨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또 상태가 안 좋아진 것 같으니 잠시 올라갔다 와야겠습니다.”

“아…… 어제도 그렇고, 사흘 째 계속 불안정한 것 같습니다.”

“지금이 금단 증상을 넘어서는 고비라서 그렇습니다. 원래 마지막 관문이 제일 힘든 법이죠.”

“다녀오십시오, 원장님. 제가 환자들을 보면서 원장님 오실 때까지 컴플레인이 발생하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있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부원장님이 없었으면… 어휴,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요.”

한지호는 괜히 너스레를 떨며 바이룽과 바통을 터치했다.

택시를 타고 레지던시 아파트로 가는데 10분, 금링링을 진정시키는데 20분, 다시 한의원으로 돌아오는데 10분.

급히 움직여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40분이 소요된다.

그동안 바이룽이 한지호 대신 환자들을 케어해줄 것이다.

아무 대책 없이 환자들을 기다리게 하는 것과 부원장이 케어를 해주며 기다리게 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바이룽 덕분에 한지호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금링링에게 다녀올 수 있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후다닥 가운을 벗고 홍콩 원화 한의원이 들어선 럭셔리 상가 건물 밖으로 나온 한지호가 택시를 잡아탔다.

어제도 진료 시간 중에 두 번이나 금링링을 돌보러 다녀와야 했다.

진료가 끝난 다음 저녁 시간에는 지난주처럼 전신 기경팔맥에 침을 놓아 찐득한 불순물을 빼냈다.

한지호에게도, 금링링에게도 쉽지 않은 과정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중독 치료의 결판이 날 것이다.

어쩌면 이미 최후의 관문을 통과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금방 도착하니까 버티고 있어줘요.’

택시에 탄 한지호는 손목시계를 보며 속으로 말을 삼켰다.

오늘도 금링링이 잘 견뎌주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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