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
3장, 가시를 숨긴 장미 (1)
장난이 아니었다.
착오도 아니다.
대륙의 여신이라 불리는 금링링이 정말로 홍콩 원화 한의원에 왔다.
그녀는 한지호가 홍콩에서 진료를 할 때 일정을 맞췄다.
금링링이 한의원 문을 열고 대기실로 들어서자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리펄스 베이에 거주하는 현지 환자들은 대부분 남 부럽지 않은 부자들이다.
그렇기에 웬만한 연예인이 와도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한류 스타인 유대성과 런런런 멤버들이 방문했을 때도 리펄스 베이의 현지인들은 크게 요동치지 않았었다.
대신 홍콩 각지에서 온 한류 팬들이 모여든 것이었다.
하지만 금링링은 달랐다.
만약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고 리펄스 베이 언덕길을 올라왔다면 한바탕 난리가 났을 것이다.
대기실에 점잖게 앉아있던 현지 환자들은 금링링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금링링……?”
“진짜 금링링이야, 금링링!”
각자 작게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모아져 제법 큰 웅성거림이 됐다.
그러나 금링링은 이런 반응이 익숙한 듯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대기실 구석 의자에 앉은 그녀의 곁에는 경호원과 매니저가 딱 붙어 다른 사람의 접근을 철통 같이 차단하고 있었다.
그들도 금링링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중국 연예계 소문에 의하면 금링링은 톱스타 중에서도 까다로운 성격으로 유명했다.
워낙 일찍 대륙을 대표하는 여배우가 됐기 때문에 안하무인으로 군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렸다.
그래서일까.
금링링을 쳐다보는 대기실의 환자들은 싸인이나 사진을 요청하지 않았다.
다들 한가락 하는 부자라는 자존심과 괜히 금링링에게 싸인 요청을 해봐야 무시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겹쳤을 것이다.
“계속 이렇게 기다려야 해?”
그때 금링링이 입을 열었다.
옆에 앉은 매니저를 힐난하는 말투였다.
헐리우드 영화까지 출연한 자신이 다른 사람들처럼 대기를 해야 한다는 게 믿기지 않는 것이다.
매니저도 곤란한 기색이었다.
“그게… 여기 원장님이 홍콩에 있을 때 스케줄을 맞춰서 예약을 최대한 빨리 잡았는데, 당일 아침에 먼저 도착한 환자들부터 보는 게 원칙이라고 해서…….”
“원칙? 내 앞에서 원칙이 중요해?”
“나도 정말 최선을 다한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 줘.”
진땀을 흘리며 설명하는 매니저가 안쓰러워 보였다.
흘깃흘깃 금링링을 쳐다보던 환자들은 말을 걸지 않기를 잘 했다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까칠한 성격이 너무 생생하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사실 웬만한 병원이라면 톱스타인 금링링이 도착하자마자 특별대우를 해줬을 것이다.
다른 환자들의 순서를 뒤로 미루고 그녀를 먼저 진료해도 뭐라 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순서가 밀린 환자들도 금링링이 왔다면 알아서들 이해를 할지 모른다.
하지만 한지호는 정해진 진료 원칙을 고수했다.
추위안차오를 치료하는 동안 홍콩의 환자들을 많이 기다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유명한 사람을 진료하게 되면 한의원 운영에 큰 도움이 된다.
한지호 입장에서도 금링링은 놓치고 싶지 않은 환자이자 고객이다.
그러나 거물을 밝히더라도 선을 지켜야 한다.
추위안차오의 일로 중국에서도 엄청나게 유명해진 지금이야말로 진정성을 보여줄 타이밍이다.
째깍, 째깍, 째깍-!
대기실에 걸린 고풍스러운 나무 시계의 초침 소리가 하염없이 울렸다.
금링링이 한의원에 도착하고 얼마가 지났을까.
그 사이 안내 직원이 한방차와 한과를 예쁜 그릇에 담아서 서빙했지만 그녀는 손도 대지 않았다.
벌써 1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금링링의 인내심도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어딘가를 노려고보만 있었다.
화가 많이 났는지 새하얀 얼굴에 붉은 기운이 감돌 정도였다.
금링링이 그럴수록 매니저와 경호원도 가시 방석에 앉은 기분일 터였다.
“금링링 환자님,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그때 드디어 간호사가 금링링의 이름을 불렀다.
짧지 않은 기다림 끝에 그녀의 차례가 돌아온 것이다.
금링링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빛에는 악역을 연기할 때 보여주던 표독스러움이 묻어났다.
혹시 한지호의 진료가 만족스럽지 않으면 한의원을 뒤집기라도 할 기세였다.
매니저와 경호원은 그녀를 뒤따르지 않았다.
환자 본인만 간호사와 함께 진료실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한지호입니다. 영어로 대화가 가능하십니까? 원하신다면 중국어 통역 직원을 부르겠습니다.”
한지호는 찬바람을 풀풀 풍기며 들어온 금링링에게 인사와 질문을 동시에 건넸다.
금링링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한지호를 빤히 쳐다보다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통역 필요 없어요.”
유창한 영어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영어로 배역을 소화한 금링링이 영어를 못 할 리 없었다.
한지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습니까?”
“간호사를 내보내줘요.”
금링링이 한지호 옆에 서있는 간호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것 자체는 유난히 까탈스러운 요구가 아니다.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 오직 의사에게만 자신의 증상을 말하는 환자들이 종종 있다.
한지호는 간호사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비켜줄 것을 부탁했다.
“고마워요.”
“네, 원장님.”
간호사도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진료실 밖으로 나갔다.
이제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한지호와 금링링 단 둘만 남았다.
한지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금링링을 쳐다봤다.
대륙의 남심을 훔친 섹시한 여배우가 눈앞에 있는데 조금도 긴장한 것 같지 않았다.
사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는 금링링 못지않게 섹시한 매력으로 유명한 김해수와 특별한 관계였었다.
그렇기에 중국 남자들을 잠 못 이루게 만드는 금링링을 보고도 태연할 수 있었다.
“자, 이제 편하게 말씀해주시죠.”
“나는…….”
당차다 못해 건방져 보이던 금링링이 말꼬리를 길게 늘어트렸다.
쉽게 꺼내기 어려운 증상 때문에 홍콩 원화 한의원을 찾아온 게 분명했다.
한지호도 예상하고 있던 일이다.
아무데서나 치료할 수 있는 문제라면 굳이 리펄스 베이의 한의원에 찾아왔을 리 없다.
곧이어 금링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담배를 못 끊겠어요.”
“네?”
그녀의 말에 한지호가 저도 모르게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환자 앞에서 감정을 노출하지 않아야 하지만, 예상이 완전히 빗나간 탓이다.
그러나 금링링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대마초도…….”
심각한 이야기였다.
한지호도 진중한 낯빛으로 금링링을 응시했다.
절대 장난을 치거나 허튼 소리를 할 얼굴은 아니었다.
추위안차오의 화독을 치료하고 좀 여유로워지나 싶었더니, 만만치 않게 난감한 환자가 찾아오고 말았다.
세상의 모든 난치병과 싸우는 게 한지호의 운명인 것 같았다.
+++
한의원에서 금링링의 병명 아닌 병명을 들은 한지호는 자리를 조용한 곳으로 옮기자고 제안했다.
원장실이 독립되어 있지만 간호사와 직원들이 오가고, 혹시 다른 환자들에게 이야기가 새어 나갈지도 모른다.
금링링의 문제는 너무 심각한 사안이라 철저한 비밀 유지가 생명이다.
그렇기에 시간이 걸려도 진료가 끝난 후 저녁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금링링도 동의했다.
그녀 역시 자신의 문제가 유출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금연이 힘들다는 건 웃고 넘길 사안이다.
여배우와 담배는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지만, 설령 알려진다고 해도 이미지 손상을 입는 게 전부다.
그로인해 광고 계약이 파기될 수도 있다.
그러나 목숨이 오가는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대마초는 다르다.
중국은 세계 어느 곳보다 철저하고 강경하게 마약 사범을 잡는 나라다.
아편 전쟁으로 국운이 쇠했던 트라우마 때문인지 마약 문제에 있어서는 신분고하를 가리지 않았다.
공산당의 고위직 간부라고 해도 마약과 연루되면 어김없이 사형 판결을 받는다.
사실 대마초는 마약류 중에서도 가장 낮은 등급에 속한다.
네덜란드 등 일부 국가에서는 대마초가 합법이고, 미국이나 호주에서도 단순 흡연자는 벌금 정도만 내고 풀려난다.
중독성 역시 다른 마약류에 비하면 매우 낮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여기는 중국이다.
금링링이 대마초를 핀다는 게 알려지면 사형은 아니더라도 최소 몇 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중국 연예계에서 영원히 퇴출당할 것도 확실했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셈이다.
한지호도 중국의 독특한 사정을 알기에 머리가 복잡했다.
진료를 마친 그는 금링링의 내원 이유를 물어보는 바이룽과 직원들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다.
환자의 프라이버시 보호 요구가 너무 강해서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하는 게 최선이었다.
부원장 바이룽은 못내 서운한 내색을 보였지만 한지호는 흔들리지 않았다.
치료가 다 끝난 후에 바이룽에게만 모든 과정을 이야기 해줄 생각이었다.
워낙 위험한 일이기에 아직은 시기상조다.
불이 꺼진 홍콩 원화 한의원을 뒤로 하고 나온 그는 자신의 레지던시로 향했다.
언젠가부터 한지호는 호텔 대신 리펄스 베이에 레지던시 아파트를 얻어 생활하고 있었다.
레지던시 아파트에는 호텔처럼 청소와 빨래 등을 담당하는 직원이 상주한다.
그에 더해 취사가 가능하고, 더 넓은 공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
그렇기에 외교관이나 주재원 등 고소득 해외 체류자들이 선호하는 주거 공간이다.
호텔보다 더 고급스러운 레지던시 로비를 지나쳐 엘리베이터를 탄 한지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파트에서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고민이 깊어만 갔다.
“잘못하면 나까지 엮일 수 있는데…….”
자칫 금링링을 치료하다 구설수에 휘말리면 한지호도 공범이 될 수 있다.
금링링이 마약 사범인 것을 알고도 눈을 감아줬다는 이유로 어떤 처벌을 받을지 모른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마약이라면 눈에 불을 켜는 중국 공안이 무슨 짓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다.
딩동- 딩동-!
리펄스 베이의 기가 막힌 야경을 바라보며 고민을 하는데 벨소리가 들렸다.
1층 로비에 금링링이 도착했다는 알림이다.
한지호는 그녀가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도록 버튼을 눌러줬다.
대륙의 여신으로 불리는 금링링이 매니저와 경호원도 대동하지 않은 채 한지호의 레지던시 아파트로 올라오고 있었다.
보통 남자라면 심장이 터져나갈 상황이다.
하지만 한지호는 머리가 지끈거리기만 했다.
대마초에 중독됐음을 밝힌 금링링과 어디서부터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쉬운 환자가 없다, 쉬운 환자가.”
그는 자기가 내뱉은 혼잣말에 웃음을 지었다.
중국 정부에 이어 연예계의 정점을 한의학으로 사로잡을 수 있는, 그러나 동시에 너무도 위험한 기회가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