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68화 (168/255)

# 168

10장, 시간을 돌려서 (3)

평소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추위안차오의 손목을 잡은 한지호는 진맥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1초도 거르지 않고 그가 안면 근육을 일그러트렸기 때문이다.

얼굴을 찡그리고 목과 어깨를 부르르 떠는 과정에서 호흡이 흐트러진다.

호흡이 고르지 못하면 맥도 덩달아 들쑥날쑥 불규칙적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진맥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한지호에게도 무척 힘든 상황이었다.

‘몰아의 경지로 나아가자. 나의 존재도 사라지고 오직 환자의 맥박 뛰는 소리만 남는 거야…….’

두 눈을 감은 한지호가 스스로의 숨을 다스리며 정신을 모았다.

그의 온신경이 추위안차오의 손목 위로 몰렸다.

이 순간, 장소에 대한 감각마저 상실되기 시작했다.

이곳이 베이징 근교의 별장이라는 것, 방 안에 추따이언이 함께 있다는 것, 손목을 맡긴 환자가 중국 공산당의 고위 간부라는 것.

모든 정보가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오직 맥이 뛰는 소리만 울리는 듯 했다.

마치 암흑으로 뒤덮인 무(無)의 공간에서 맥박만 남은 기분이었다.

한지호는 자신마저도 잊은 채 불규칙한 맥박에서 단서를 찾아내려 애썼다.

이것이 무가(武家)에서 말하는 몰아(沒我)의 경지다.

검이나 칼을 들고 몰아의 경지에 접어들면 비로소 신검합일(身劒合一)을 이뤘다고 평가 받는다.

한지호는 그만큼 높은 경지에서 모든 것을 쏟아내며 진맥을 했다.

단 한 번의 진맥에 한의학의 위신과 국가의 실리가 걸려 있다.

몰아의 경지에 접어든 지금은 그러한 사실마저 지웠지만, 마지막 집중력까지 쥐어 짜내는 게 당연했다.

“왔다!”

한지호는 저도 모르게 입밖으로 소리를 냈다.

잡히는 게 있었다.

그는 조금 더 집중의 시간을 늘렸다.

정신력을 소모하는 것은 몸을 움직이는 것만큼의 체력 소모를 불러온다.

이마에는 이미 굵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한지호는 정신력과 체력, 그리고 오금희를 수련하며 쌓은 내공까지 소진하며 진맥을 하는 중이었다.

“후우우우우-.”

유독 길게 숨을 내쉰 한지호가 추위안차오의 손목에서 손을 뗐다.

그는 눈을 뜨고 환자와 보호자를 돌아봤다.

환자인 추위안차오는 얼굴을 움찔거리면서도 궁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보호자인 추따이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지호와 눈을 맞추자마자 입을 열었다.

“어떻소? 치료할 수 있겠소?”

추따이언의 목소리가 사뭇 절박하게 들렸다.

사실 한지호를 신뢰하지 않고 위천 한방병원의 유우선을 선택한 장본인이 바로 추따이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선택지가 없다.

추위안차오의 증상이 악화된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동아줄이 한지호다.

이들 형제의 모든 희망이 한지호의 대답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마비에 발작이 겹쳤으니 매우 위중한 상태입니다.”

“누가 그걸 모르겠소? 최고의 의사들이 다 나가떨어지며 그 말을 했소.”

“마음이 급하겠지만 천천히 들으세요.”

한지호는 목소리를 높이는 추따이언을 기세로 짓눌렀다.

공산당 고위 간부이건 뭐건 지금은 그저 한 사람의 환자 보호자일 따름이다.

숨을 돌린 한지호가 추따이언 대신 누워있는 추위안차오를 보며 말을 이었다.

“마비는 크게 외독으로 인한 마비와 내독으로 인한 마비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의학에서는 신체 부위가 마비되는 증상을 독성(毒性) 탓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내, 내 경우는?”

추위안차오가 힘겹게 입술을 가누며 부정확한 발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한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곧장 대답했다.

“외독으로 인한 마비입니다.”

“그, 그, 그…… 게 저, 정말인가?”

“신체 내부에서 발생 된 독으로 마비가 일어난 게 아닙니다.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외부에서 독이 들어와 쌓인 결과입니다. 누군지는 몰라도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한 것 같습니다.”

폭탄 발언이었다.

추위안차오와 추따이언 형제는 충격을 받은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계속 침대 옆에 서있던 추따이언은 몸을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누군가 계획적으로 추위안차오에게 독을 주입했고, 그 결과 심각한 마비와 발작 증상이 시작됐다니.

사실이라면 중국 정계 한복판에 피바람이 불 수 있다.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상무위원 후보를 음해했다면 누구든 무사하지 못 할 것이다.

피바람 정도가 아니라 피의 폭풍이 몰아쳐 대규모 숙청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방금 그 말! 책임질 수 있소?”

추따이언이 두 손을 부들부들 거리며 따지듯 물었다.

너무도 엄청난 이야기를 들었기에 아직까지 진정이 안 된 것 같았다.

한지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아까 치료할 수 있냐고 물으셨죠? 치료를 해낸다면 내 말에 신빙성이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무, 물론… 그렇다면……?”

“치료해보겠습니다. 치료를 하면서 마비 증세를 일으킨 외독에 대해 자세히 밝힐 테니, 범인을 잡는 것 그쪽에서들 알아서 하시죠.”

한지호의 입에서 치료를 하겠다는 말이 나왔다.

그 말은 치료를 할 수 있다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칙칙하게 죽어가던 추따이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침대에 누워있던 추위안차오의 눈동자에도 처음으로 생기가 번쩍였다.

그때 돌연 추따이언이 태클을 걸었다.

“유우선도 치료할 수 있다고 말했소.”

“유우선 병원장은 치료에 실패하고 감옥에 갔습니다. 내가 실패하면 나 역시 중국 공안에 끌려가겠죠. 그걸 각오하고도 치료를 하겠다고 말한 겁니다.”

한지호는 추따이언을 빤히 쳐다보며 꼿꼿한 자세로 말했다.

빈틈이 없는 논리였다.

치료 성과가 시원찮으면 유우선처럼 중국 감옥에 끌려갈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섰으니 괜히 오기를 부리는 것은 아니란 뜻이다.

추상같은 한지호의 기파가 추따이언을 위축시켰다.

어차피 환자인 추위안차오는 최후의 동아줄을 잡을 수 있다면 물불을 안 가릴 것 같았다.

누워있는 눈빛만 봐도 그의 절박함을 알 수 있었다.

“형님을… 잘 부탁하오.”

한지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다.

속전속결로 독성을 제거하며 차도를 보여야 한다.

그래야만 추 씨 형제가 계속 한지호를 믿고 치료를 맡길 것이다.

중국 정부가 외교적인 움직임을 취하기 전에, 한의학이 더 이상 국제적 망신을 사기 전에 치료를 끝낸다.

그렇게 마음먹은 한지호는 지체 없이 추따이언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가 연장자인 것도, 중국 고위 간부인 것도 개의치 않았다.

“대혈침을 비롯해 몇 가지 필요한 의료 도구를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내가 적어주는 것을 바로 부탁합니다.”

“알겠소!”

한지호는 캐리어에 침 세트와 짐을 챙겨왔지만 추위안차오의 상태를 보고 나니 특수한 도구가 더 필요해졌다.

그의 지시를 받은 추따이언이 마치 부하 직원이 된 것처럼 날래게 움직였다.

어디인지도 모르는 베이징 근교의 별장에서 운명을 건 한지호의 도전이 급물살을 탔다.

이 도전의 끝에서 그를 기다리는 게 구속 수감일지, 아니면 영웅 대접일지 모르지만 주사위는 던져졌다.

시간을 돌이킬 수는 없다.

다만 추위안차오의 시간을 되돌려 마비 증세가 찾아오기 전으로 데려다놓아야 한다.

여러모로 이번 치료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한지호는 질병을 향한 전의를 불태우며 마음을 다잡았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쉽지 않은 싸움이겠지만, 물러서고 피할 전투는 아니다.

추위안차오의 목과 어깨 그리고 얼굴을 마비시키고 일그러지게 만든 외독(外毒).

한지호는 머릿속의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샅샅이 뒤지며 심기일전을 노리고 있었다.

+++

필요한 의료 도구를 얻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추따이언은 수행원들을 닦달해서 한지호가 말한 것들을 모두 가져왔다.

그 사이 한지호는 추위안차오의 혈도를 개방시키고 있었다.

탈의를 시키고, 전신의 땀을 닦아낸 후 목과 어깨에 침을 놓았다.

다른 의미가 있는 침술은 아니었다.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하기 앞서 근육을 풀고, 혈도를 열어 기운을 받아들이기 쉽게 만든 것이다.

이윽고 그는 하얀 수건을 침대 밑바닥에 깔았다.

이미 추따이언에게는 경고를 해두었다.

침대를 통째로 버려야 할지 모른다고 말이다.

물론 두 형제의 운명이 걸린 치료인데 그들이 침대 정도에 연연할 리 없었다.

스으윽-

한지호는 추따이언을 통해 구해온 대혈침을 잡았다.

대혈침은 혈도를 찔러 죽은피를 뽑아내는 용도로 쓰인다.

일반적인 침술에 쓰이는 침보다 두께가 굵고 바늘 끝이 날카롭다.

한의학에서는 외피에 상처를 내며 치료를 하는 경우가 무척 드물다.

그렇기에 부황을 뜨며 피를 뽑을 때 정도를 제외하면 대혈침을 쓸 일이 거의 없다.

평소였다면 한지호도 피를 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워낙 급박한 상황이었고, 한시라도 빨리 성과를 보여줘야만 의료사고가 외교 문제로 번지는 걸 막을 수 있다.

때문에 무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추위안차오 조직부장님, 지금부터 목숨을 내게 맡기는 겁니다.”

한지호의 말은 제법 섬뜻하게 들렸다.

엎드려 누워있던 추위안차오는 힘겹게 고갯짓을 했다.

어차피 이대로는 희망이 없이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삶이다.

환자의 동의를 받아낸 한지호가 대혈침을 놓았다.

날개뼈 바로 윗부분, 그냥 침을 놓아도 극심한 통증을 느끼는 곳에 굵고 날카로운 대혈침이 꽂혔다.

“끄으으으……!”

고통을 참기 힘든지 추위안차오가 신음을 흘렸다.

방 밖에 나가있는 추따이언의 귀에도 충분히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한지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잠시 대혈침을 꽂았다가 곧바로 뽑았다.

침이 놓였던 자리에 작은 상처가 구멍처럼 뚫렸고, 검은색의 진득진득한 핏방울이 올라왔다.

“역시 사혈이 아닌 독혈이군.”

한지호가 한국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추위안차오에게서 죽은피라고 부르는 사혈(死血)이 아닌 독혈(毒血)이 나왔다.

사혈은 혈액순환이 안 되거나 기혈이 막혔을 때 나오는 피다.

그보다 훨씬 더 검고 진하며 점성이 강한 독혈에서는 피 냄새 외에 비릿한 악취가 섞여 있었다.

독혈을 확인한 한지호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마치 아무렇게나 장난을 치는 아이처럼 연달아 대혈침으로 날개뼈 주위에 상처를 냈다.

“으윽-! 끄으으읍…….”

안면 마비를 앓고 있는 추위안차오는 신음소리조차 조금 이상하게 냈다.

툭 튀어나온 그의 날개뼈가 검은색 핏방울로 물들었고, 침대 시트와 하얀 천도 금방 물들었다.

검붉게 색이 변한 시트는 기괴해 보이기까지 했다.

한지호는 다 쓴 대혈침을 옆에 내려두고 맨손을 뻗었다.

아직도 핏방울이 송송 올라오고 있는 추위안차오의 날개뼈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검지 끝부분에 피를 묻힌 그는 곧장 맛을 봤다.

다른 사람의 몸에서 나온 피, 그것도 외독에 의해 검고 끈적끈적하게 변한 핏방울을 입에 넣기란 꺼림칙한 일이다.

한의사라 해도 쉽게 할 수 있는 시도는 아니었다.

자칫하면 덩달아 중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한지호는 자신을 믿었다.

단전에 쌓아둔 오금희의 내공으로 이깟 독성쯤은 불태울 수 있다고 믿었다.

‘피 맛과 악취 뒤에 숨겨진 이 맛은…….’

한지호의 눈빛이 달라졌다.

핏방울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맛이 느껴졌다.

첫맛은 독혈답게 비릿했으나 끝에서는 달콤 쌉싸름한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한지호는 물에 적셔놓은 수건으로 추위안차오의 피를 닦아주며 말했다.

“임시방편으로 독혈을 조금 빼냈으니 어깨 부위의 떨림은 살짝 잦아들었을 겁니다. 문제는 안면 마비를 일으킨 독을 몸 안에서 완전히 해독하는 것인데, 이게 무슨 독인지 알아냈습니다.”

엎드려있던 추위안차오가 눈을 크게 떴다.

마비 증상의 영향을 받지 않은 그의 오른쪽 눈동자에서 빛이 났다.

누구도 알아내지 못했던 마비의 원인을 한지호가 찾아냈기 때문이다.

“추 조직부장님은 오랜 시간에 걸쳐 화독에 중독되셨습니다.”

화독(花毒).

상무위원의 문턱까지 다다른 추위안차오를 망가트린 것은 꽃에서 추출된 독이었다.

한지호의 얼굴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 8권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