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63화 (163/255)

# 163

8장, 전초전(前哨戰) (2)

시찰 준비를 마치고, 바이룽과 고량주를 곁들인 저녁 식사를 한 다음날.

한지호는 아침 일찍 일어나 운기조식을 마치고 리펄스 베이로 출근했다.

도수 높은 고량주를 마셨어도 숙취가 느껴지지 않았다.

웬만한 술기운은 운기조식을 하며 날려버릴 수 있다.

게다가 고량주는 빨리 취하고 뒤끝은 없는 술로 유명하다.

한지호는 숙취의 뒤끝 대신 바이룽과 나눴던 진솔한 대화를 곱씹으며 택시를 탔다.

아직까지 홍콩에서는 호텔에 머물며 택시를 애용하고 있다.

하지만 머지않아 리펄스 베이의 아파트를 임대하거나 구매하고, 개인 차량도 구입 할 계획이었다.

단기로 머무는 게 아니라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홍콩에 한의원을 열었기 때문이다.

끼이이익-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고급 아파트와 빌라가 밀집 된 지구의 상가 건물 앞에 멈춰선 것이다.

한지호는 잔돈을 받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항상 요금보다 넉넉하게 지불하는 것이 습관이 됐다.

사회적 지위가 올라갈수록 사소한 것부터 주변에 베풀고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쪼잔하다는 악평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다.

“쎄쎄.”

택시 기사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들은 한지호는 기분 좋게 상가 건물을 쳐다봤다.

원화 한의원 간판이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한지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상가에 들어섰다.

아직 진료 시간이 되려면 멀었다.

하지만 그보다 일찍 출근한 직원들이 문을 열어 놓은 것 같았다.

“굿모닝!”

한지호는 영어로 아침 인사를 하며 들어왔다.

그런데 뭔가 달랐다.

문을 열자마자 환자 대기실과 안내 데스크가 보인다.

평소라면 안내 직원과 간호사, 상담 직원 정도만 있어야 한다.

간혹 바이룽이 아주 일찍 출근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처음 보는 사람이 진료 시간 전부터 한의원에 들어와 있을 수는 없다.

한지호는 낯선 얼굴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장 노동자들이 입을 것 같은 작업복 차림의 중년 남자가 대기실에 떡하니 앉아 있었다.

그도 한지호를 유심히 쳐다봤다.

“누구……?”

한지호가 질문을 던지려는 순간, 먼저 출근해있던 통역 직원이 입을 열었다.

“원장님, 오셨습니까.”

“네. 그런데 이분은 누구시죠?”

“그게…… 전에 말씀하신 추 중앙조직부장이 보낸 사람입니다.”

한지호의 눈빛이 달라졌다.

칼을 품은 것처럼 날카로운 기운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추위안차오.

그의 측근이 시찰을 나온 것이다.

한지호는 작업복 차림의 중년인에게 다가가며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원화 한의원의 원장, 한지호입니다.”

현지인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발음의 중국어로 인사를 했다.

기본적인 회화 정도는 중국어로도 할 수 있게 됐다.

중년 남성은 상당히 놀란 기색을 보이며 악수를 했다.

“중국어도 할 줄 압니까? 아무튼 반갑소. 추따이언이오.”

“인사 정도가 아니면 영어가 편합니다. 여기 통역이 있으니 불편함은 없을 겁니다.”

“내가 영어를 할 줄 아니 상관없소.”

추따이언이 갑자기 능숙한 영어로 대답했다.

순식간에 중국어에서 영어로 언어가 전환됐고, 한지호와 통역 직원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겉모습으로 봐서는 절대 영어를 못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추따이언은 전형적인 시골 지역 공산당 공무원처럼 생겼다.

의상도 촌스럽기 그지없었다.

요즘에는 공산당 간부들도 웬만해선 작업복을 입지 않는다.

그런데 유려한 발음으로 영어를 술술 쓰니 반전이었다.

“내가 영어를 하는 게 놀라운 모양이오?”

눈치를 챘는지 추따이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난처할 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한지호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보다 발음이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음…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오. 요즘 당의 젊은 간부들은 영어를 못 하면 진급이 안 되는 추세이니. 형님도 영어를 잘 하시는 편이오.”

“추 중앙조직부장님의 동생 되십니까?”

“그렇소.”

성이 똑같다 했더니 추따이언은 추위안차오의 친동생이었다.

친형을 치료할 한의원을 알아보기 위해 직접 시찰을 나온 것이다.

그 역시 만만찮은 직위의 간부일 것 같았다.

상대의 정체를 알게 됐지만 한지호는 긴장하지 않았다.

열심히 준비를 했고, 결정은 그들 스스로 내리는 것이다.

추위안차오를 치료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싶고, 위천과의 경쟁에서 지는 게 싫은 건 분명하다.

하지만 한의원의 운명이 걸린 문제도 아니다.

그저 최선을 다하면 되는 일이었다.

“먼저 저희가 준비한 자료를 보여드리겠습니다. 판단을 내리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좋소.”

한지호가 통역 직원을 쳐다봤다.

그의 눈빛을 받은 직원이 재빨리 안내 데스크로 걸어갔다.

직원은 곧바로 데스크 밑에 정리해둔 언론 자료를 가져와 내밀었다.

자료를 받은 추따이언은 예리한 눈길로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한지호는 그의 앞에서 가만히 서있었다.

아직 진료시간까지는 여유가 있다.

서두를 것 없이 시찰에 응해주면 된다.

이윽고 자료를 검토한 추따이언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봐도 중국 대륙을 이끄는 고위 간부라기보다는 시골 공장의 노동자 같은 인상이었다.

“원화 한의원이 한국에서도 무척 유명하고, 홍콩에서도 연예인들을 고치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는 걸 알고 있소.”

“알고 계시겠지만, 한국 최초로 대학병원 암센터와 협진을 시도해서 성공한 전력도 있습니다. 난치와 불치를 오가는 중병에 저만큼 성공적인 성과를 거둔 한의사가 많지는 않을 겁니다.”

“크흐으으음…….”

“홍콩에도 최상품의 약재를 준비해 놓았고, 한의원 규모가 작다는 것뿐 서울과 다를 바 없는 진료가 가능합니다. 혹시 더 보기 원하시는 게 있으십니까?”

“어느 정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형님께서는 원인 불명의 마비에 시달리고 있소. 치료할 자신 있으시오?”

“세상에 원인 불명의 질병은 없습니다. 다만 원인을 찾기 힘든 질병이 있을 뿐이죠.”

한지호는 예의를 갖췄지만 짚을 건 딱 짚고 넘어갔다.

추따이언이 흠칫하는 기미를 보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 말을 이었다.

“또한 환자를 직접 보지 않고 치료 여부를 단언할 수 없습니다. 함부로 확언을 하는 의사가 있다면 명의가 아니라 사기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추 중앙조직부장님께서 오시지 못한다면, 그 상세를 최대한 자세히 말씀해주셔야 저도 정확히 가늠을 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서 치료를 할지 확정하기 전에는 자세한 증상을 말할 수 없소. 행여 소문이라도 나게 되면 크나큰 타격을 입게 되니 이해를 바라오.”

“원장실로 들어가서 제게만 말씀하셔도 됩니다. 환자의 정보는 철저히 비밀에 붙입니다.”

“불가, 불가하오!”

추따이언이 언성을 높였다.

절대 안 된다는 뜻의 네버(never)라는 단어를 힘주어 강조했다.

한지호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저를 찾아오는 환자라면 아무리 고치기 힘든 병을 앓고 있어도 외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아무 정보도 없이 구걸하듯 치료를 따내야 하는 입장은 아닙니다. 한의사로서 자부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고, 치료의 원칙을 지키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무슨 뜻이오?”

“추위안차오 중앙조직부장님의 증세를 가능한 자세히 말씀해주셔야 한의사로서 의견을 말씀드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처럼 원인 미상의 마비 증세라는 단서만으로 어떤 말씀을 더 드리겠습니까.”

“알겠소. 그럼 이만 일어나겠소.”

추따이언이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일어났다.

한지호는 성큼성큼 걸어가 한의원 밖으로 나가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시찰에 대비해서 언론 자료를 모으고, 질 좋은 약재까지 홍콩으로 들여왔다.

허탈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기회를 위해 한의사로서 소신을 꺾을 수는 없었다.

환자의 증세도 듣지 못하고 치료를 할 수 있는 것처럼 감언이설을 흘리고 싶지 않았다.

“원장님, 괜찮으세요?”

추따이언이 떠나간 자리, 통역 직원이 걱정스런 얼굴로 질문을 했다.

한지호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우리는 우리대로 오늘의 진료를 준비합시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활기차게 움직이는 한지호의 모습은 직원들을 감탄하게 만들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권력자를 치료할 기회가 아니라 바로 한의원에서 제몫을 다하는 거라고 몸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추따이언은 한지호에 대해 좋은 보고를 올리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홍콩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원화 한의원은 계속해서 순항할 것 같았다.

그 중심에는 잔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뚝심 있게 한의원을 이끄는 선장 한지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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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 됐네, 한 원장. 나도 정말 아쉬워요.”

“아닙니다. 여러모로 신경 써주셨는데 죄송합니다, 장관님.”

“내게 죄송할 일이 아니지만……. 아무튼 마음 쓰지 말고 계속 힘을 써요. 홍콩에서도 잘 하고 있다는 소식 기분 좋게 듣고 있으니.”

“네. 또 뵙겠습니다.”

“그래요, 조만간 식사나 하십시다.”

한지호는 양성문 장관과 통화를 했다.

추위안차오가 위천 한방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로 선택했다는 전화였다.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렇기에 조금도 충격적이지 않았다.

홍콩 원화 한의원에서 추위안차오의 동생인 추따이언과 다소 불쾌한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을 겪고도 선택을 받을 거라 기대할 만큼 순진하진 않았다.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것이다.

한지호는 씁쓸한 입맛을 다셨지만, 이내 훌훌 털어버렸다.

지금은 흘러간 기회보다 더 기쁜 일에 집중해야 할 타이밍이다.

그는 유초아가 여주인공으로 데뷔한 연극을 보기 위해 D대 캠퍼스에 왔다.

비록 연극영화과의 학내 연극이지만 신입생이 여주인공을 맡은 건 대단한 일이다.

마리아 수녀와 아이들은 오프닝 공연을 봤다고 한다.

한지호는 그 기간에 홍콩에서 진료를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혼자 연극을 보러 온 것이다.

묘하게 신경이 쓰일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가 된 유초아의 연극.

그녀가 과연 어떤 배역을 맡았고, 제대로 소화는 할런지 기대 됐다.

철컥-

한지호가 묵직한 차문을 열었다.

한손에는 유초아에게 줄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처음으로 그녀의 연극을 보는 것이니 축하의 의미로 준비한 선물이었다.

주차장 구석 자리에 하얀색 벤틀리를 세워둔 그는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양성문 장관과 통화를 하느라 시간을 지체했다.

자칫하면 연극 시작 시간을 놓칠 수도 있다.

저벅저벅-

꽃을 들고 D대 연극관에 다다른 한지호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았다.

요즘 세상에 남자가 꽃다발을 들고 다니는 건 흔치 않은 광경이다.

게다가 오늘은 오프닝 공연도 아니다.

보통 출연 배우들에게 꽃을 전해주는 지인이나 가족들은 오프닝 때 온다.

꽃다발 때문에 일차적으로 눈길을 준 사람들은 한지호의 얼굴을 알아보고 수군거렸다.

눈에 금방 들어오는 훤칠한 이목구비를 조금만 자세히 보면 그가 TV에 숱하게 나온 국민 한의사라는 걸 깨달을 수 있다.

한지호는 자신을 가리키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유초아로부터 받았던 초대권을 제시하고 가장 뒷좌석에 앉았다.

D대 연극관은 그리 크지 않았다.

소극장 정도의 규모라 뒷좌석에 앉아도 무대 위 배우들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후우-.”

다행히 아주 늦지는 않았다.

연극이 시작되긴 했지만, 여주인공인 유초아가 등장하기 전이었다.

바깥과 달리 공연장 안은 조용했고, 배우들의 대사 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어? 초아다!’

그때 드디어 유초아가 나타났다.

유독 청초하게 분장한 그녀는 갑자기 집안이 몰락한 비련의 여주인공 역할을 맡았다.

관객들을 몰입시키기 충분한 외모였고, 대사도 제법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한지호는 뭔가 눈에 거슬렸다.

유초아의 얼굴에 고정된 그의 눈이 사나운 빛을 뿌리고 있었다.

‘안색이 좋지 않아. 분장 때문이라고 해도 평소와는 너무 달라. 목덜미에는 긁힌 상처가 있고… 왼팔과 손목에 멍 자국이 보여. 뭐지?’

한지호의 시력은 평범한 사람들과 비교가 안 된다.

오금희를 수련하며 육체 능력이 범인의 한계를 초월하게 된지 오래였다.

그래서 분장에 가려 보이지 않는 미세한 부분도 캐치할 수 있었다.

여주인공으로 무대 위에 오른 유초아에게서 이상한 부분을 발견한 한지호는 저도 모르게 내공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연극이 끝나면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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