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
7장, 런런런 (1)
와아아아아아-!
짝짝짝짝짝!
열화와 같은 함성, 그리고 고막을 때리는 박수 소리가 넓은 운동장을 가득 채웠다.
런런런 멤버들은 수만 명의 홍콩 팬들 앞에서 멋진 무대를 선보였다.
한국에서부터 연습한 아이돌 그룹의 커버 댄스를 완벽하게 소화한 것이다.
런런런은 중국을 넘어 아시아 전체를 들썩이게 만든 예능 프로그램이다.
그 멤버들이 얼굴만 비치는 게 아니라 아이돌 댄스 무대까지 준비했으니 팬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취재를 위해 무대 앞쪽에 몰려있던 기자들도 박수를 쳤다.
콧대 높은 중국 기자들도 런런런 멤버들 앞에서는 한류 팬으로 돌아간 것이다.
“쎄쎄-! 땡큐, 홍콩!”
유대성을 비롯한 런런런 멤버들이 마이크를 잡고 인사를 했다.
오늘따라 런런런의 메인 MC인 유대성의 컨디션이 아주 좋아 보였다.
힘차게 무대를 소화했을 뿐 아니라 행사 내내 밝은 얼굴이었다.
갑자기 쓰러졌던 베이징에서의 행사, 또 내내 지쳐 보였던 상하이 행사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에 대한 질문은 기자회견에서 쏟아졌다.
런런런 멤버들은 옷을 갈아입고 회견장으로 나왔다.
홍콩에서 중국 투어를 마무리하기 때문에 엄청난 수의 취재진이 몰렸다.
사전에 질문 순서를 정해놓지 않았다면 아수라장이 됐을 것 같았다.
런런런 멤버들 모두 인기가 많지만, 기자회견 초반에는 유대성에게 질문이 집중됐다.
베이징에서부터 터진 그의 건강 문제가 아시아 팬들의 관심을 샀기 때문이다.
“유대성 씨, 베이징에서 쓰러진 이후 상하이까지 계속 컨디션이 안 좋아 보였었는데요. 오늘 활기찬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요? 건강 문제는 모두 해결 됐는지 궁금합니다.”
통역 담당이 중국 기자들의 질문을 매끄럽게 바꿔서 전달했다.
유대성은 마이크 가까기 입을 붙이고 웃으며 대답했다.
“먼저 건강 문제로 중국과 아시아의 팬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몸살과 두통으로 무척 힘들었지만, 무대에서 쓰러졌던 건 자기 관리 실패입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저의 잘못이라 다시 한 번 행사장을 찾아주셨던 팬분들께 사과드립니다. 사실 홍콩에서도 계속 몸이 좋지 않았는데 귀인을 만나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분 덕분에 컨디션이 빨리 회복되어 마지막에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과연 국민 MC이자 한류 스타다운 말이었다.
건강 때문에 누구보다 자신이 힘들었음에도 팬들에게 사과를 하는 모습이 중국 기자들을 감탄시켰다.
인성으로 1인자가 됐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그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다른 기자가 통역을 통해 질문을 이어갔다.
“홍콩에서 귀인을 만나 치료를 받았다고 하셨는데,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그 질문에 유대성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한국 기자님들은 잘 아실 것 같습니다. 원화 한의원의 한지호 원장님께서 치료를 해주셨습니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홍콩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런런런 멤버들과 함께 리펄스 베이의 원화 한의원에 들어 보약을 지을 계획입니다. 이번에 너무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간접 광고나 다름없는 구체적인 대답이었다.
그렇지만 누구 하나 토를 달 수 없었다.
유대성의 몸 상태가 굉장히 안 좋았던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만한 컨디션 난조를 해결해줬으면 유대성이 기자회견에서 특별히 언급을 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한국 기자들은 한지호의 이름을 듣자마자 탄성을 내뱉었다.
국민 한의사가 홍콩에서 국민 MC를 치료해줬다.
당장 대서특필할 특종 기사였다.
반면 한국 소식에 밝지 않은 중국 기자들은 웅성거리며 서로를 쳐다봤다.
“원화 한의원이 뭐야?”
“리펄스 베이? 홍콩에 한국식 한의원이 있다고? 대체 언제부터?”
“전에 기사로 봤던 거 같긴 한데…….”
질문 순서가 아닌 기자들이 중국어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사이 자기 순서를 확인 받은 기자는 급히 질문을 바꿨다.
원래 다른 질문을 할 예정이었지만 유대성의 말을 듣고 포인트를 변경한 것이다.
“방금 런런런 멤버들과 함께 리펄스 베이의 원화…? 맞나요? 원화 한의원에 방문하실 거라고 하셨는데요. 중국 투어 계약에 포함 된 공식 일정인 것입니까?”
“공식 일정은 아닙니다. 투어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한지호 원장님은 우연히 인연이 닿아서 제 건강을 회복시켜주셨고, 개인적으로 고마움을 느낄 따름입니다. 런런런 멤버들도 제가 치료 받은 것을 보고 흥미를 드러내서 같이 한의원에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그뿐입니다.”
공식 일정은 아니지만 유대성과 런런런 멤버들이 리펄스 베이의 원화 한의원을 방문하기로 한 건 기정사실화 됐다.
그곳에 가면 런런런 멤버들이 사복을 입고 있는 사진 한 장이라도 건질 수 있다.
눈치 빠른 기자들은 재빨리 메모를 했다.
유대성, 런런런, 원화 한의원, 리펄스 베이.
이 정도의 단서면 취재 일정을 잡기에 충분하고도 넘친다.
연예계에서 잔뼈가 굵은 유대성이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는 한지호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일부러 기자회견에서 단서를 흘린 것이다.
곧이어 질문이 다른 멤버들에게로 넘어갔다.
유대성 말고도 런런런 출연진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기 예능인과 가수, 배우들이다.
그들 역시 화려한 스폿 라이트를 받았다.
만약 돈을 주고 런런런 멤버들을 한 자리에 모으려면 얼마를 써야할지 예상하기도 힘들다.
그런데 유대성과 몇몇 멤버들은 자발적으로 홍콩 원화 한의원을 방문할 예정이라 한다.
치료비를 따로 받지 않았지만, 한지호는 역대급 홍보 효과를 누리게 될 것 같았다.
회견장에 모인 중국 기자들의 뇌리에 리펄스 베이의 원화 한의원이 단단히 각인 됐다.
벌써 어떤 기자들은 유대성이 한의사의 치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는 기사를 발송하고 있었다.
낚시에 비유하면 대어 중의 대어, 최고의 월척을 낚은 셈이다.
유대성을 치료했더니 런런런 멤버들도 함께 딸려오게 됐다.
홍콩에서의 고군분투 끝에 해가 뜨기 직전이었다.
+++
리펄스 베이가 떠들썩해졌다.
해안가 위 고급 주택 밀집 지역은 평소에 그리 시끄럽지 않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유대성과 런런런 멤버들이 홍콩 원화 한의원을 찾았고, 그들을 보기 위해 취재진과 팬들도 줄을 지었다.
번잡하지 않던 상가 건물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리니 리펄스 베이 주민들도 시선을 줄 수밖에 없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나 둘 구경꾼이 모였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저 때문에 너무 시끄러워진 것 같습니다.”
원장실에서는 유대성이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사과를 했다.
취재진과 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게 되어 미안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한지호는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잘 아시겠지만 TV에 광고 열 편을 내보내는 것보다 더 효과적일 겁니다. 유대성 씨와 런런런 멤버들 덕을 아주 크게 볼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다행입니다. 다른 멤버들이 지은 보약까지 모두 제가 계산하겠습니다.”
유대성은 자신보다 앞서 진맥을 받은 런런런 멤버들에게 보약을 쏠 생각이었다.
서울과 홍콩의 원화 한의원은 다른 곳보다 월등히 비싼 진료비와 약 값으로 유명하다.
그럼에도 흔쾌히 계산을 자처하는 모습은 연예계의 좋은 소문 그대로였다.
“사실 기자회견에서도 저를 언급해주시고, 그런 것만 생각하면 약 값을 받지 않아도 되는데…….”
한지호는 정말 공짜로 보약을 지어주고 싶었다.
수십억 원 이상의 홍보 효과를 누리게 됐으니 약값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유대성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평소 알려진 성격대로 빚지고 사는 것을 끔찍히 싫어하는 게 분명했다.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계속 골골거리다가 홍콩 무대에 서지 못했을 겁니다. 보약에 제 치료비까지 더해서 고마운 마음을 전달하고 싶습니다. 사양하지 말아주세요.”
“그럼 감사히 받고 최고의 약재로 보약을 짓겠습니다. 유대성 씨와 멤버분들 약은 서울에서 받으실 수 있습니다.”
홍콩에서 진맥을 하고 처방을 내렸지만, 어차피 모두 한국에 근거를 둔 연예인들이다.
서울로 돌아가서 처방대로 약을 지은 후 배송하면 된다.
한지호는 굳이 보약이 얼마인지, 치료비는 어느 정도를 받는지 말하지 않았다.
유대성은 한국에서 한지호가 어떤 대우를 받는 한의사인지 충분히 알아보고 왔을 것이다.
그만한 주변머리도 없다면 험난한 연예계에서 10년 넘게 1인자의 자리를 유지하기 힘들다.
“서울에서는 꼭 식사 한 번 하시죠, 선생님. 제가 잘 아는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영광입니다. 국민 MC와의 식사인데 언제든 시간을 내겠습니다.”
“아휴, 그런 말씀 마세요. 국민 한의사 아니십니까?”
“과분한 별명입니다, 하하하.”
둘은 사이좋게 웃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한의원 바깥에는 여전히 취재진과 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런런런 멤버들이 진료를 마치고 나오는 모습이라도 한 번 더 보기 위해서다.
멤버들이 한의원으로 들어갈 때 이미 수백 수천 장의 사진이 찍혔다.
홍콩 원화 한의원 간판은 자연스레 노출되어 기사는 물론이고 팬들의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을 장식하게 될 것이다.
“그럼 바쁘실 테니 저는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한참 이야기를 주고받은 유대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지호는 그와 악수를 나눴다.
“서울에서 다시 뵐 때는 꼭 인증샷 부탁드립니다.”
“인증샷은 제가 선생님께 부탁드려야죠! 서울에서 뵙겠습니다.”
“조심히 귀국하세요. 한방차 자주 마시는 것 잊으시면 안 됩니다.”
밤을 새며 치료를 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유대성과 한지호 둘 다 붙임성이 좋아서인지 편하게 농담을 나눌 정도가 됐다.
한지호는 원장실 겸 진료실 밖으로 나가는 유대성을 따라가지 않았다.
아무리 한류스타라도 원장이 병원 현관까지 나서서 배웅하면 그림이 우스워진다.
대기하고 있는 다음 환자는 없지만, 그래도 한의사로서 지켜야 할 품위가 있는 법이다.
“시작됐군.”
한지호는 원장실 의자에 다시 앉아 혼잣말을 읊조렸다.
유대성과 런런런 멤버들이 한의원이 들어선 상가 건물 바깥으로 나간 모양이다.
건물 밖에서 기자들과 팬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이번 일을 계기로 홍콩에서도 한지호와 원화 한의원의 이름이 알려지고 유명세를 타게 될 것 같았다.
판은 잘 깔았다.
이제 호기심에 하나 둘 찾아올 리펄스 베이의 현지인들, 그리고 홍콩의 부호들을 사로잡기만 하면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자리를 잡을 수 있다.
마치 목이 좋은 강가에 커다란 그물을 설치한 기분이었다.
물고기들이 강물의 흐름을 타고 그물 안으로 빨려드는 걸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한편으로는 유대성과 연결 시켜준 김여정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여정은 한 시가 바쁜 여배우고, 전 여친의 베프라는 다소 껄끄러운 사이지만 아주 큰 도움을 줬다.
그냥 입을 싹 닦고 외면하는 건 도리가 아니다.
한지호는 이런저런 구상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어쨌거나 유대성이라는 기회가 더 큰 기회를 부를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단단하게 잠겨있던 중국과 홍콩이라는 성문의 빗장이 조금씩 열릴 기미가 보이고 있었다.